사는이야기 - 장콩 선생이 만난 팔도 역사교사 9
>>장용준(前 전남 함평고등학교 교사) | 객원 에디터
☞ 왜 아홉 번째 인터뷰이로 ‘차경호’를 선정했는가?
대구가 낳은 역사교사 차경호는 팔방미인이다. 하고픈 일도 많고, 또 실제로 교단에 선지 10여년에 불과하면서도 40년 이상 교단에서 살아간 교사보다 더 많은 일을 성취해 왔다. 영상수업 전문가, 방송대본 작가 밎 진행자, 팟캐스트 진행자, 답사 전문가, 대학 겸임교수, 역사만화 감수자, 역사교과서 집필자, 인터넷 교사연수 진행자 등등
“무엇이 그니로 하여금 팔방미인이 되게 했을까?” 그게 궁금했다. 인터뷰 요청을 넣었더니, 역시나 다방면에서 활약하는 에너자이저답게 바로 응답해왔다. 무척 고마웠다. 대구의 상남자 방탄차력사 차경호! 그를 그답게 만드는 힘은 어디에 있을까?
네. 다행히도 저는 아직 잘 버티고 있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학교가 대구에서 코로나로 난리가 났을 때 가장 많은 확진자가 나왔던 신천지 대구교회와 신천지 신자들이 거주했던 한마음 아파트 사이 정확히 중앙에 있죠. 당시에는 세상의 종말이라도 온 줄 알았어요. 제가 마음먹고 바깥에 나가봤는데 도로에 차만 몇 대 다닐 뿐 정말 한산해서 마치 좀비 영화에 등장하는 거리 모습 같았습니다. 화급을 다투며 도로를 질주하는 앰뷸런스들을 보는 것도 어렵지 않았고요. 하지만 조금씩 방역체계가 잡혀갔고, 일상을 회복했죠. 우리 학교의 경우 현재는 모든 학생들이 매일 등교하고 있습니다.
아! 제가 욕심꾸러기인가요?(웃음) 저는 심심한 걸 잘 못 견디는 성격입니다. 그리고 워낙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여기저기 다 끼어들고 있나 봅니다. 올해는 전국역사교사모임의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박시백 화백 일제강점기를 다룬 역사만화 ‘35년’ 편집에 참여했고요. 현재는 그 작품을 어떻게 하면 교실 수업에 연결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 중입니다. 35년 편집에 참여한 가장 큰 이유가 학습만화를 활용한 역사수업에 관심이 있어서였거든요. 또 역사교육연구소의 미디어 리터러시 분과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신생 분과지만 모두 관심이 많은 선생님들이라 즐겁고 재미있어 하십니다.
네. 2019년 1년 동안 휴머니스트 출판그룹의 후원을 받아 박래훈, 김종민, 전영갑 선생님과 함께 전국역사교사모임 공식 팟캐스트인 ‘역사유랑단’을 진행하였습니다. 목표로 했던 팟캐스트 순위 100위권 진입에는 실패했지만(200위권까지는 진입했습니다.ㅋㅋ), 알음알음 들어주시는 분들이 있었나 봅니다. 그러다가 중앙교육연수원 쪽에서 제게 역사 관련 원격연수를 제작해보는 것이 어떤가 하는 제의가 왔습니다. 들리는 팟캐스트도 좋은 콘텐츠지만 원격연수는 볼 수 있는 비디오 타입이라 멤버들 모두 재미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이왕이면 선생님들께서도 재미있어 하는 연수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러다 보니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과 우리가 가장 잘 말씀드릴 수 있는 역사를 연결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역사에서 찾는 음식이야기’가 탄생했죠.
사실 지금까지 원격 연수를 들을 때마다 좀 딱딱하고 재미없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제작을 해보니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알겠더군요. 팟캐스트, 유튜브 방송과는 달리 연수 특유에 품격을 유지해야 하는 압박(?)이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좀 진지한(?) 캐릭터지만 역사유랑단 다른 멤버들의 입담은 알아주지 않습니까? 그런데 연수만의 틀이 있다 보니 그런 장기를 거의 살리지 못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도 제작하는 쪽에서 지금까지 제작한 연수 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재밌었다. 토크쇼 형식으로 지금까지와는 달리 새로운 형식을 창조했다고 위로해 주시더군요.
현재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임용고사를 준비할 때는 모교에 역사교육론을 전공하신 교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제게는 역사교육론이 외계어 같이 느껴져 항상 두려움의 대상이었죠. 교사가 되고 보니 저처럼 역사교육론 때문에 고생하는 선후배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몇 년간 임용고사를 준비하는 동문들과 스터디 모임을 함께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역사교육론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대학원에 진학하여 역사교육을 전공했죠.
2017년 모교에서 겸임교수 제의를 해주었습니다. 저는 학자도 연구자도 아니지만, 후배들에게 현장 수업 이야기는 들려줄 수 있겠다 싶어 그때부터 후배들 앞에 서기 시작했죠. 모교가 대구 외곽 1시간 거리라 1주일에 한 번 출강하는 것도 부담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대학생들과 역사교육을 놓고 궁리하고 토론하는 것은 중고등학교 수업과는 또 다른 즐거움을 주었죠.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기 이전에 제가 너무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 교단에 섰을 때는 지금처럼 멀티미디어 수업자료가 풍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과서 내용을 요약하여 판서하면서 설명하는 전형적인 MBC(Mouth, Board, Chalk) 수업을 했었죠. 그러다 전국역사교사모임에서 나온 ‘영상수업지도안’을 얻게 되었습니다. 화려한 PPT와 동영상으로 이루어진 자료에 매료되고 말았죠. 이후 직접 영상자료를 만들어보고 싶어 그냥 인터넷을 보고 따라하며 막무가내로 하다 보니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곧 영화로 할 수 있는 수업안을 모아 선생님들에게 제공하기 위한 작업을 하나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여러 가지 문제로 자료를 가지고 있어도 선생님들께 공급하는 게 쉽지 않네요. 그래서 영화 수업의 전문가, 송치중 선생님과 함께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또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역사교육연구소에 미디어 리터러시 분과도 신설되어 여러 선생님들과 좋은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제 영화와 같은 영상자료를 활용하는 것은 수업 중 하나의 장르가 아니라 약방의 감초 같은 기본 옵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요즘은 강의식 수업이건, 토론식 수업이건 수업에서 영상자료 하나쯤은 빠지지 않거든요. 문제는 영상자료를 사용하고 아니고가 아니라 어떤 발문과 활동으로 연결하느냐는 것입니다. 영상을 그냥 흥밋거리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상을 통해 무엇을 묻고 답하게 할 것인가? 흔히 사료를 가지고 수업할 때 비판적으로 읽고 창조적으로 쓰게 해야 한다고 하는데, ‘영상자료도 하나의 사료’라고 생각하고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이 영상을 통해 무엇을 파악하고, 그것을 어떻게 자기만의 해석으로 연결하여 표현할 것인가? 그것이 미디어 리터러시의 핵심이겠죠. 발문을 먼저 고민하면 선택하는 영상도 달라집니다.
물론 이런 수업을 해보겠다는 제 생각과는 달리 실제 수업에서는 판판이 깨지고 있습니다만.....
네. 제가 아는 것도 사실은 그 정도인데요. 요 몇 년 사이 갑자기 미디어 리터러시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이른바 정보화 사회가 된 지금은 정보가 없어서 문제가 되기보다는 정보가 넘쳐나서 소화를 시키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TV, 신문, 영화, 소설, 웹툰, SNS, 유튜브 따위 등.
문제는 이 정보의 홍수 속에 사실은 나에게 별 필요나 의미가 없는 정보도 있고, 심지어 쓰레기 같은 가짜뉴스까지 있죠. 그래서 이런 매체에서 제공하는 정보를 잘 분석하고 또 판단하여 그것을 자기만의 정보로 정리하고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굉장히 중요해졌습니다. 학생들에게 길러줘야 할 것도 이제 지식이나, 정보를 찾는 기능을 넘어 바로 이 미디어 리터러시라는 것이죠. 신문방송학 쪽에서 이론을 정리한 논문과 책들이 있고요, 교육에서도 국어과 같은 경우에는 수업 사례가 활발히 공유되고 있더군요.
생각해 보면 역사야말로 미디어 리터러시에 가장 적합한 학문인 것 같아요. 시간의 거리만 있을 뿐 과거인의 미디어를 분석하여 해석하고 결론을 내는 역사의 특성은 미디어 리터러시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분과에서 공부를 해보니 미디어 리터러시의 정의는 아직 완전히 합의되거나 정리된 건 아닌 것 같더라고요. 미디어라는 말 대신 다양한 매체나 활동을 넣어서 비주얼 리터러시, 멀티 리터러시, 비판적 리터러시, 문화적 리터러시, 정보 리터러시, 소셜 미디어 리터러시, 소프트웨어 리터러시, ICT 리터러시, 트랜스 리터러시 등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역사를 활용한 역사 리터러시, 역사 영화나 역사 드라마를 활용한 사극 리터러시 같은 정의도 내려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전국역사교사모임의 역사교육연구소 미디어 리터러시 분과는 송치중 선생님이 처음 제의하셨고, 여러 선생님들이 이에 반응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송 선생님이 지금 역사교육연구소 편집부장으로 바쁘셔서 어쩔 수 없이 제가 분과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현재 저를 포함하여 11분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일단 미디어리터러시가 뭔가 알고 싶어서 함께 책 읽는 공부를 시작했고요. 2차 세계대전을 다룬 수십 편의 영화를 분석해서 그 시선과 입장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하여 수업에 적용하려는 시도도 하고 있습니다. 아마 연말에 순천에서 개최될 예정인 ‘전국역사교사모임 역사교사의 날’ 행사 때 발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 사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학생 스스로 역사적 진실을 검증하고 자기만의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수업이라고 답하면 모범답안은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매시간 이런 수업을 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강우규 의사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특히 그의 유언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라고 말씀하셨죠. 그때 저도 ‘짧은 한 차시의 수업이지만, 이 수업을 통해 학생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제 수업으로 학생들이 하나라도 얻어가도록 만들고, 무언가를 그들의 가슴에 남길 수 있다면? 저는 그런 역사수업이 잘된 수업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배님들의 활동량이나 존경하는 후배 샘들의 모습에 비하면 그렇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일만 하고 있거든요. 다만 제가 지금까지 참여했던 일은 모두 제가 좋아서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 일이었습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할 때 제 적성과 소질을 따지지 않고, 여건만 보고 선택한 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 3년간 저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죠. 그때 제가 얻은 교훈은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진로를 틀었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하고 싶은 걸 해보겠다고요. 그래서 역사교육과를 선택했죠. 그렇게 들어간 대학에서는 공부하는 게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새로 뭔가를 알아가는 것도, 함께 토론하는 것도 모두 말이죠.
지금도 저는 제가 감당하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만 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넓고 재미있는 일들은 많습니다.
2012년이었습니다. 대선 직전이었는데 대구 MBC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라디오 방송을 함께할 역사 선생님들을 찾는다고요. PD님은 역사를 제대로 알리는 것이 보수편향의 도시, 대구를 바꿀 수 있는 길이라 믿고 계셨습니다. 저 역시 라디오 방송을 통해 역사를 시민들에게 알리는 일은 재미와 의미 모두 얻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방송이 2018년까지 햇수로 6년 동안 이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즐거운 일이었지만, 말씀대로 만만하지는 않았습니다. 일주일 내내 밥 먹을 때도, 잘 때도 무슨 이야기를 할까 고민해야 했습니다. 소재가 잡힌 후에도 혹시 잘못된 역사를 전할까 봐 자료를 계속 찾아봐야 했고, 또 매주 대본을 써야 한다는 것도 보통 스트레스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한 명이라도 제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로 인해 조금이라도 역사의 진실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된다면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촛불혁명이 일어나고 정권이 교체되면서 비로소 이제는 그만두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더는 소재도 동력도 없었고요. 무엇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저 스스로는 할 만큼 했으니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대구역사교사모임의 다른 선생님께 후임을 부탁드리고 마이크를 놓았습니다.
근데 대본을 모아 놓은 폴더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조금 아까운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래도 이것도 나름 6년간의 역사 기록인데 싶어서요. 다행히 지인을 통해 노느매기 출판사를 알게 되었고, 감사하게도 책으로 엮을 기회를 얻었습니다. 제목은 친한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 ‘방탄차력사의 오늘 이야기’로 정했습니다. 맞아요. 그때 장콩 선생님께서 제목을 바꾸라고 조언해주셨는데, 요즘은 그때 그 말씀을 따를 걸 하는 생각도 듭니다.(웃음) 농담이고요. 책의 판매와 관계없이 그 시간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어 저는 만족합니다. 출판사 대표님께 죄송할 뿐이지요.
가족들에게는 미안한 점이 많습니다. 제가 워낙 밖으로 도는 것을 좋아해서 소홀한 부분이 많았죠. 와이프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다 포기했는지 평일은 마음대로 해도 주말에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주말에는 가족 여행이나 와이프가 좋아하는 캠핑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마저도 어긴 적이 많지만요. 그러다가 전국역사교사모임의 비슷한 또래, 비슷한 처지의 선생님들끼리 ‘아따투어’라는 가족 답사모임도 결성하게 됐죠. 함께해서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만나보니 집마다 사정이 비슷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 우리 집만 그런 게 아니구나, 저 쟁쟁한 사람들도 사는 건 다 똑같구나!’하는 안도감? 매도 같이 맞으면 위로가 되는.....(웃음) 한번은 아따투어 멤버들끼리 어느 사모님이 최고의 ‘보살’(대구에서는 성인군자라는 말 대신 보살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인가 따져 본 적도 있습니다. 다행히 우승은 하지 못했습니다.
아! 당연히 아니지요. 건뚱 쌤은 우리 중에 그나마 모범 남편에 가까운 분인데요. 저도 우승자가 누구인지 알려드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선수 보호 차원에서 여기에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선생님들이 떠올리시는 그 선생님은 아니라는 거죠. 아주 의외의 인물이었습니다.
초임 발령지에서 대구역사교사모임 회장을 역임하신 장대수 선생님과 함께 근무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만남인가 봅니다. 후배 교사에게 항상 따뜻하게 대해주시는 장대수 선생님의 모습을 깊이 존경하게 되었고, 결국 선생님이 하시는 모임을 모두 따라 다니게 되었죠. 그리하여 그때 시작했던 세 모임을 아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마을학교라는 공부모임, 두 번째는 전교조, 마지막이 대구역사교사모임입니다.
대구역사교사모임은 가장 늦게 가입했는데요. 솔직히 처음에는 장대수 선생님께서 권하셔도 선배들만 많이 계신 줄 알고 좀 부담스러워서 피하고 있다가, 1정 연수를 통해 지금 회장을 맡으신 빈수민 선생님을 비롯한 또래 선생님들도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래서 1정 연수 마치자마자 바로 합류하였습니다. 역시 모임에는 또래가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공식적으로는 한 번도 모임을 갖지 못했습니다. 1학기 때 ZOOM으로 한 번 모임을 한 적이 있죠. 하지만 전국역사교사모임 공동수업프로젝트에 응모하여 온라인으로는 소통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또 교육청에서 예산을 지원받아 ‘웹툰으로 하는 역사수업지도안’ 개발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연말에는 우리 모임에서도 소소하지만 쓸 만한 수업자료가 나올 것 같습니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서 고등학교까지는 교회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것도 굉장히 보수근본주의적인 교회였죠. 그러다 대학교 서양사 수업 때 엄청나게 혼난 일이 있었습니다. 광신에 빠져 산다고요. 처음에는 그 말씀에 반감을 많이 가졌는데, 수업을 듣고 이후 교수님께서 소개해 주신 책들을 읽으면서 조금씩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신앙과 광신은 종이 한 장 차이이다.’, ‘신념을 위해 목숨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사람을 주의하라’ 등 소설 ‘장미의 이름’의 구절을 통해 받은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만약 은사님이 아니었더라면 어쩌면 지금 보수 우익 역사교사로서 양손에 태극기를 쥐고 광화문에 서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웃음)
그걸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지금까지도 그냥 하루하루 살다가 지금까지 흘러왔거든요. 지금도 무엇을 하겠다거나, 무엇이 되겠다거나 하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제 삶의 매 순간이 최고였다는 사실이죠. 아! 오해하지 마셔야 할 것이 ‘제가 최고’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단지 제 이전의 삶에 비해 그렇다는 거죠. 고등학교 때 저는 대학교도 못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대학교 때는 임용 합격이 꿈같은 일이라고 생각했고요. 교직에 들어오고 나서는 수업에 자신이 없어서 학생들 앞에 서는 것이 항상 두려웠죠. 그런데 지금 돌아보니 좋은 선배님들, 동료들, 친구들의 도움으로 어찌어찌 모두 극복해왔더군요. 그건 결코 제 능력이 아니었지만, 어제의 나와 비교하여 오늘 내가 서 있는 곳은 항상 최고점이었습니다. 앞으로도 항상 오늘을 살면서 계속 최고 기록을 경신하고 싶습니다.
저는 특히 같이 교직을 걷고 있는 친구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교사가 되어 찾아와서 자기가 교직을 선택하는 일에 저의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해 줄 때 진짜 뿌듯하더라고요. 물론 인사말이라는 것은 알고 있으면서도 교사로서 큰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일전에 고3이 되어 사대에 가겠다고 상담을 신청한 친구들이 있었는데, 성적을 따져보니 영어교육과, 국어교육과를 충분히 갈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인들은 역사교육과를 가고 싶다는 겁니다. 저는 속으로 반가웠지만, 역사교사 T.O를 잘 알고 있는 터라 차마 그렇게 안내하지 못하겠더라고요. 결국 성적대로 지도했고 그 친구들은 지금 영어교사, 국어교사가 되어 있습니다.
어떤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된 제자와 같은 교무실을 쓰기도 했습니다. 참 어렵더군요. 뭔가 선생님으로서, 교직 선배로서 모범이 되어야 하는데 혹시 제가 그런 모습을 보이지 못할까 봐 여러 가지로 부담스러웠습니다. 지금 대구역사교사모임에도 함께하는 제자가 있습니다. 제가 고3 담임을 할 때 우리 반 서기를 맡았던 서병국 선생님입니다. 전국역사교사모임 자주연수에도 같이 갔죠. 정말 뿌듯하고 든든합니다. 임용고사에 합격하자마자 저를 찾아왔는데 보자마자 “혹시 내가 담임할 때 너한테 뭐 잘못한 거 없냐?”고 물었죠.(웃음)
저는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한테 항상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부 잘해서 다른 사람들 무시하고 자기 이익만 챙기는 사람보다는 평범하게 살면서 행복을 느끼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모두 이롭게 하는 사람이 훨씬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저는 사랑하는 마음에서 불의에 대한 분노가 나오고, 분노가 행동으로 이어진다고 믿습니다. 저를 거쳐 간 학생들이 사랑, 분노, 행동 이 세 가지를 기억하는 사람으로 자라나면 좋겠습니다.
저는 역사교사가 지상 최고의 직업이라고 자부합니다. 인류가 구원받을 방법은 서로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뿐이며, 그 가장 훌륭한 교재가 바로 역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게 역사교육은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고, 역사교사는 선지자입니다. 따라서 수업은 단지 지식을 전달하는 시간이 아니라, 진리가 선포되는 시간이 됩니다. 너무 종교적이고 황당한가요? 그냥 저만의 개똥철학이라고 이해해 주십시오.(웃음)
제 교직 경력이 그리 길지 않지만 정말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갈수록 힘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나마 수업이 저를 버티게 해줍니다. 학교 일과 중에서 수업시간이 제일 힐링되는 시간이거든요. 그런데 언젠가 이런 수업이 즐겁지 않은 날이 온다면...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입니다. 다행히 아직은 대구역사교사모임, 그리고 전국역사교사모임 선생님들을 만날 때마다 힘든 것을 나누며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은 자기가 임하고 있는 학교 현장에서 동료 교사들과 소통하고 서로 위로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에는 학교에 있으면서도 모임 선생님들과 함께하는 날만 기다렸어요. 그러다 모임도 좋지만, 제가 자꾸 모임만 찾는 것은 어쩌면 스스로 힘들어하는 현장에서 도피하려고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옆에 있는 선생님이 힘들어하는 것을 들어주고, 또 내가 힘들 때 도움 요청하면서 서 있는 자리에서 즐거움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이죠. 앞으로는 근무하는 학교에서 동료 선생님들과 더 즐겁게 지내기 위해 노력하려 합니다.
사실은 계획이 없는 것이 저의 계획입니다. 저는 안 될 일은 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이루어지지 않고, 제가 하려고 하지 않아도 될 일은 반드시 된다고 생각합니다. 스페인어로 ‘케세라 세라(될 것은 된다)’라고 하던가요?
갑작스러운 죽음을 몇 번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가족인 경우도 있었고, 동료 교사도 있었으며 그냥 아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존경을 받으며 최고의 자리에 있었거나, 계속 든든하게 우리와 함께 싸울 거라 믿었던 인물이 하루아침에 세상을 져버리는 사건들도 있었잖아요? 그러면서 저는 오늘 하루를 즐겁게 후회 없이 사는 것이 최고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을 후회 없이 살면 그런 오늘이 모여 내일을 만들어 줄 것이고, 또 그런 내일이 오지 않더라도 미련은 남지 않을 테니까요.
이따금 바보 같은 짓을 했던 과거의 제 모습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침대에서 자다가 이불을 발로 차곤 하죠. 하지만 이불을 천 번을 차고, 만 번을 찬다고 그 시간을 돌이킬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24시간 미래를 걱정해서 제 미래가 잘 풀린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만, 저도 이제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 나이가 됐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일이고, 미래는 제가 만들 수 없습니다. 제게 주어진 것은 오늘뿐입니다. 오직 오늘만 있습니다.
물론 하고 싶은 일은 있습니다. 교직에 들어왔을 때 저는 교직 마칠 때까지 후배들 앞에서 강의도 해보고 싶고, 교과서 집필에도 참여하고 싶고, 내 이름이 찍힌 책도 한 권 써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냥 그랬으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한 꿈이었지, 교직 끝날 때까지도 하나라도 제대로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찌하다 보니 그게 어설프게라도 다 이루어지더군요.
지금은 교실 현장뿐 아니라 교실 밖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와 역사교육 대중화에 관심이 갑니다. 대구 MBC 방송, 팟캐스트 ‘역사유랑단’, 연수 ‘역사에서 찾는 음식이야기’, 만화 ‘박시백의 35년’에 참여한 것도 모두 그런 맥락 위에 있죠. 역사 대중화가 전공자가 아닌 엔터테이너들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역사 대중화에 앞장서는 역할을 역사교사들이 해야 하는 것 아닌지 말이죠. 제가 보기에는 전국역사교사모임 선생님들은 교실 역사수업뿐 아니라 역사교육 대중화에도 전문가이십니다. 그리고 대중에게 전해 줄 역사이야기 만큼은 더 재미있고 유익하게 꾸밀 분들을 많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만나다보니 어느덧 저도 그 사람들한테 좀 꼽사리 끼어 가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 제자이자 동료인 서병국 선생님이 본 ‘차경호’ - 거북이 같은 나의 선(先)생님
2007년 3월, 고등학교에서 처음으로 국사 수업을 듣는 날 딱 지금의 나정도 나이쯤 되는 젊고 스타일 있으신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보통 국사 선생님 하면, 도덕 선생님(비하의 의미가 아니라...)과 함께 고리타분한, 나이 많은 그런 선생님을 많이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들어오신 선생님은 그런 생각을 깨부수기에 충분했다. 박력 있는 목소리, 현실감 있는 표정, 그리고 모두를 주목하게 하는 커다란 압축 플라스틱 막대기. 담임선생님은 아니었기에 교실에서 그것이 공기를 가르는 일은 딱히 없었고 수업 때 쓰는 커다란 지휘봉과 같은 역할을 했다.
선생님은 강렬한 인상으로 수업 때 지켜야 할 것 10가지에 대해 칠판에 쓰시면서 얘기하셨다. 그리고 그때, 나는 맨 뒷자리에 앉아서 졸고 있었다. 아 또 말 많으신 선생님이구나 하는 나의 생각은 바로 그다음 수업 시간에 깨졌다.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 준비된 교재, 현실감 있는 매체, 뿐만 아니라 학생들과의 적절한 교감. 이 시간만큼은 졸고 있는 학생이 아니라 박장대소해가며 수업에 집중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선생님과 함께하는 50분은 모든 학생들이 기다리는 시간이었고, 학교를 나가는 주중은 국사가 들어있는 날과 들어있지 않은 날로 구분되곤 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돌이켜보면 그 시절 유독 친구들 가운데 역사에 관심 많고, 관련된 진로를 생각한다고 대화했던 아이들이 꽤 있었던 것 같다.
2009년 3월, 세계사를 선택한 나에게 선생님은 담임의 모습으로 오셨다. 기대가 반, 두려움이 반인 나의 앞에서 선생님은 2년 전 알 수 없었던 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계셨다. 2년 전의 화려한 언변, 박력 넘치는 모습은 그대로였지만 알게 모르게 진중해진 모습을 보이셨다. 물 흐르는 듯 유려하게 진행된 수업도 수업이지만 인간으로서 교사란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하셨다. 이 때는 이미 역사교사라는 진로를 결정한 이후여서, 단순히 교과를 가르치는 선생님일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교사는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할지에 대해 한발 앞서 모범을 보이고 계셨던 것이다.
10년이 흘러, 교사가 되고 처음 학생들 앞에 섰다. 처음 출근을 하자마자 담당하는 반이 생기고, 학생들 앞에 서자 막막한 느낌과 함께 선생이라는 위치의 무게가 느껴졌다. 학창시절 선생님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많은 힘을 얻었던 나는, 이제 많은 학생들에게 그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위치에 섰다. 그리고 더 많은 학생들이 나에게 ‘역사’라는 과목을 배운다. 수업에 있어서 막연했던 나에게 10년 전 선생님이 보여주신 모습은 지금 내가 다다르고 싶은 이상적인 모습이다. 박력 넘치는 목소리, 자신감 있게 하는 수업, 적절한 센스. 초년 교사에게 그것은 언제나 따라하고 싶은 모습이었고 배우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선생님과 나랑 정확히 똑같은 나이 차이가 나는 첫 학생들에게 나는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을까? 선생님이라면 여기서 어떤 설명을 했을까, 하는 생각은 수업을 설계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나침반과도 같은 지침이었다. 선생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은 교사라는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 때 나의 앞을 비춰주는 등불과 같은 모습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고등학교에서 만난 이 선생님은, 이 후 이어질 수십년이라는 인생의 길에서 저만치 앞서 가시는 모습으로,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처럼 언제까지나 한발 앞서서 나를 이끌어주는 영원한 선생님이 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