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글(130호)
함부로 추천하거나 남에게 선물하기 어렵습니다. 마음먹고 버리기엔 더욱 쉽지 않죠. 바로 ‘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책 한 권을 토대로 이번 가을호를 소개해 보려 합니다. 바로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브래디 미카코, 2020)라는 책입니다. 영국에서 20년 넘게 살아온 일본인인 저자가 계층 격차와 이주민 이슈로 신음하는 영국 사회를 생생히 그린 에세이입니다. “사회 문제에 대한 글을 이렇게 힘을 빼고 쉬운 문장으로 깊은 사유를 담아 쓸 수 있다니!” 왜 그렇게 이 책을 읽는 내내 행복할 수 있었을까요? 브래디 미카코가 삶을 정면으로 응대하고 현실 문제를 진솔하게 풀어냈기 때문이라고 전 생각했습니다.
때때로 ‘역사를 가르친다 혹은 공부한다’라는 문장의 서술어는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건 아마도 ‘살아낸다’가 아닐까요? 그런 점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친다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야 하는 방식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지속적으로 던지게 만듭니다. 아이들과 함께 평생 역사를 살아내는 일, 그 자체가 역사교사들의 평생 숙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학교에서 ‘팀’이랑 ‘다니엘’이 싸운 얘기를 아들이 하고 있다. 팀의 가방이 찢어져서 물건들이 쏟아지는걸 본 다니엘이 '가난뱅이'라며 비웃자 팀이 '퍼킹 헝키'(중유럽과 동유럽 출신자를 경멸하여 부르는 말)라고 해서 싸움이 벌어진 것.
아들은 ‘팀’이 더 심한 벌을 받은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인종차별이 불법이긴 해.
그런데 가난하거나 불우한 사람을 차별하는 건 합법이라니 이상하잖아.
정말로 그게 올바른 거야?”
-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p.82
이번 가을 호에서도 이렇게 아이들과 역사를 살아내는 교사들의 수업 이야기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수업 사례는 해당 교사가 삶과 마주하는 방식을 엿볼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늘 우리를 설레게 합니다. <특집> 코로나 시대의 역사교육 2편에서는 지난 호에 이어 코로나19를 주제로 꾸린 수업 이야기를 다룹니다. 모두들 넋을 놓고 하루살이가 되었던 2020학년도 1학, 우현주 선생님이 아이들과 꾸려간 멋진 코로나 역사수업을 만나보시길 바래요. 더불어 부산대학교 역사교육과 학부생 분들이 교실 현장을 탐방하고 기록한 보고서에 대한 글을 만나보셔도 좋겠습니다. 김용천 선생님께서 나누어 주신 <수업이야기> 수업사례 「세계사 수업으로 나의 삶을 돌아보기」도 놓치지 말아주세요. 세계사 수업 사례글이 흔치 않은 실정에서 선생님들의 목마름을 해결해드릴 훌륭한 수업 디자인, 성찰이 담긴 글이기 때문입니다.
이 밖에도 다문화 중점학교에서의 역사수업을 고민한 청춘교사 정일배 선생님의 글(수업이야기 「고민보다 GO」), 역사교육자이자 문화재 수집가로 최근 ‘인싸’가 되신 박건호 선생님의 인터뷰(책이야기 「만나書」도 일독을 권합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내는’ 역사교사들의 삶과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분열이란 여러 정체성 중 하나를 타인에게 덮어씌운 다음,
그 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정체성을 골라 자신에게 둘렀을 때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p.75
최근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여러 이슈들을 하나의 키워드로 묶어 이야기해본다면 ‘혐오와 차별’이 아닐까요? “왜 유독 요즘에 사람들이 화가 많아졌다고 느껴지는 걸까?”, “그 화는 어떤 과정을 통해 특정 집단과 그룹에 돌려지게 되는 걸까?”. 많은 선생님들과 시민들이 함께 나누는 질문일 듯 합니다. 이번 가을 호에서는 이러한 시대의 아픔을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소중한 기록들을 준비했습니다.
<특집>으로 꾸민 <현안집담회-2020년 학내 블랙페이스 논란 : 역사교사들이 남긴 성찰이란 알리바이>가 대표적입니다. 한 고등학교에서 최근 벌어진 블랙페이스 논란과 관련한 전문패널과 역사교사들의 대화를 정리했습니다. 이번 호에서 가장 길고 깊은 글이기도 합니다. <특집> 지면의 또 다른 글 ‘교실 속 역사부정’ 시리즈는 가을호와 겨울호에 연이어 연재됩니다. 이번 호에서는 「역사교사의 교실 속 역사부정 접근법」을 주제로 한 강화정 선생님의 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염려와 당황스러움의 대상이었던 교실 속 역사부정을 논리적으로 분석한 글과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더불어 신진균 선생님께서 투고해주신 교과서 분석 글 「형평운동의 새로운 서사를 모색하다」도 일독을 권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나는 옐로에…>에는 저자의 멋지고 싶은 사유가 담긴 문장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 대부분은 아들과 ‘대화’하는 장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문화 가정의 부모이자 한명의 어른인 저자가 아들과 진솔하게 나누는 대화에서 우리는 큰 감동과 영감을 받게 되지요. 이를테면 아래의 대화가 그렇습니다.
“원래 다양성이 있으면 매사 번거롭고, 싸움이나 충돌이 끊이지 않는 법이야. 다양성이 없는 게 편하긴 하지.”
“편하지도 않은데 왜 다양성이 좋다고 하는 거야?”
“편하려고만 하면 무지한 사람이 되니까.”
내 말에 아들이 “또 무지한게 문제인가?”하고 중얼거렸다.
전에 길에서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욕을 들었을 때도 내가 그 사람들이 무지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다양성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어렵고 귀찮지만, 무지를 없애기 때문에 좋은 것라고 엄마는 생각해” -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p.69
다른 이와 대화하고 소통하는 모습에서 우린 그가 삶을 살아내는 방식과 태도를 가장 직관적으로 짐작합니다. 책 속에서 브래디 미카코는 너무나도 진솔하고 통찰어린 대화를 에세이를 통해 선보입니다(심지어 그 통찰이 ‘아들’과의 대화에서 나왔다는 점이 놀랍죠). 가을 호에서도 역사 및 세상과 멋지게 대화하는 좋은 원고들이 많습니다.
연수 후기 「세계 분쟁 속 가려진 이야기들 어떻게 가르칠까요」에서는 세계평화와 분쟁문제에 천착하고 있는 경향신문 구정은 기자의 고민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전국모임 집행부 차원에서 준비한 특강을 듣고 정선영 선생님이 정리해주신 후기이니 뜻깊게 읽어주십시오. 믿고 읽는 인터뷰 전문에디터 ‘장콩 선생님’은 대구의 차경호 선생님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유쾌한 역사전문가 차경호 샘의 매력을 지면으로나마 엿보시길 바랍니다. 또한 「안민영의 소소한 미술사 이야기」에서는 ‘전쟁 포로가 된 화가, 이쾌대’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주셨고 「똥굴레 교사의 작은이야기」에서는 생태주의와 관련된 한민혁 선생님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아주셨습니다. 두 분 모두 진정한 우리 회보의 지면스틸러가 아닐까요? 미술 작품, 세상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두 이야기를 꼭 엿보시길 바랍니다.
이번 ‘편집자의 글’이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의 서평으로 읽히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만큼 이 책이 담은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나누고 싶었나 봅니다. 그렇다면 이런 훌륭한 책을 저는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한 선배 역사교사가 깜짝 선물로 보내준 책이었음을 감히 고백합니다. 지혜가 부족해 넋두리만 늘어놓는 저와 제 동료 선생님에게 보내주신 ‘한 권의 연대’였죠.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참 그 선배교사를 닮았습니다. 이 책의 알게 된 과정 자체가 저에겐 희망과 위로였을지도 모르겠네요.
마치 예제가 없는 시대 같습니다. 코로나19와 더불어 살아가는 요즘 말입니다. 앞으로 내년, 내후년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이 일상과 마주하며 희망을 키워나가시는 모든 역사 선생님들을 응원하고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린 모두 ‘가능주의자’가 아닐까요? 아이들과 미래세대에 희망을 걸었던 브래드 미카코가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에 담은 한 구절을 전하면서 가을호 소개를 마칩니다. 이번 회보의 한 귀절이라도 역사 선생님들께 이와 같은 희망의 영감을 드릴 수 있기를 바라면서요.
이미 식상할 대로 식상한 말일지 모르지만, 미래는 저 아이들의 손에 달려 있다. 세상이 퇴행한다든가 세계가 끔찍한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이들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닐까.
-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p.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