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대한 편견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기획-평화와 통일을 생각하는 역사교육 4

기획-평화와 통일을 생각하는 역사교육 4


북한에 대한 편견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고민경(울산 학성고등학교)





1. ‘적대’의 이미지와 기억으로 본 북한


1) 적대의 잉태, 빨갱이(악마)의 탄생

1940년대 후반 미국에서 진행된 반공주의의 광풍은 한반도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 있던 남한에서는 반공을 가치로 하는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으로 구분되었으며, 이러한 내부와 외부간 구별은 인간성 말살을 통해 죽임마저 용납되도록 하였다.


여순사건과 4·3사건은 대한민국의 국민이 될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폭력적으로 규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순사건을 거치면서 공산주의자는 곧 빨갱이가 되었다. 정치적 이념을 의미하는 공산주의자와 달리 빨갱이는 인간적인 동정조차 필요 없는 살인마, 비인간, 악마로 간주되었다. 여순사건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격이 ‘반공’이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한 사건이었다.



2) 전쟁, 심리전의 이미지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은 심리전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전개되었고, ‘삐라’를 통해 적대적 이미지가 각인되어 갔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3일만에 미군은 1,200만 장의 삐라를 살포하였다. 전쟁 직후 사흘 만에 엄청난 양의 삐라가 뿌려질 수 있었던 것은 제2차 세계대전과 일본, 필리핀 전투에서 심리전을 담당했던 미군 극동사령부에 심리전 부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이 6·25 전쟁 기간 중 뿌린 삐라의 수는 25억~40억 장에 이르렀는데 이는 한반도를 스무 번 뒤덮고 지구를 열 바퀴 돌고도 남는 양이다.


북한이나 중공군 포로들이 항복한 이유의 33.1%가 삐라를 포함한 심리전의 영향으로 나타났다. 삐라는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불안한 인간 심리를 자극하고, 적대감을 직관적으로 보여줬다. 압도적인 공군력과 기계화 장비를 보유한 미군은 포탄을 이용하여 삐라를 대량 살포하였다.

<그림1> 유엔군 측에서 살포한 삐라(안전보장증명서)


3) 적대의 형식 – 비인간화

삐라의 가장 많은 내용은 김일성에 대한 것이었다. 김일성에 대한 이미지는 김일성 개인보다는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소련 삐라의 가장 많은 내용은 김일성에 대한 것이었다. 김일성에 대한 이미지는 김일성 개인보다는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소련의 앞잡이로 묘사되었다. 이와 더불어 민족의 배신자, 인민을 착취하는 독재자, 가짜 3), 마귀, 악당의 이미지와 용어가 동원되었다. 사회주의 혁명을 의미하는 횃불은 인민을 태워죽이는 횃불로 차용되었다. 북한이나 사회주의에서 의미하는 횃불의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사용함으로써 ‘횃불’이 상징하는 사회적인 의미를 거부하는 것이다. 삐라의 이미지에서 특이한 것은 뱀의 이미지를 이용한 것이다. 삐라 속의 뱀 이미지는 서양의 선악인식이 반영된 것이다. ‘뱀’이라는 이미지는 동양보다는 서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악마의 이미지로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뱀은 모든 범죄의 출발이자 원흉이었다. 미국은 소련을 뱀으로 폄훼했고, ‘6·25’를 통해 중공군과 북한군에게 투영된 것이다. (그림3)


적대의 이미지로 뱀을 차용한 것은 공포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이다. 공산치하의 상황은 독사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는 공포의 과정이라는 것을 제시한다. ‘공산주의=독사’로 강력하게 각인된다. 한국에서 ‘뱀’은 악마의 이미지가 아니다. ‘뱀’은 용과 함께 신앙적 숭배의 동물이었다.

뱀의 이미지를 악(惡)의 화신으로 설정한 것은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다. 북한 문화예술에서 미군은 주로 ‘승냥이’, ‘늑대’로 이미지화되어 있다. (그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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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가짜 김일성을 주제로 한 삐라(좌) / <그림3> 공산당을 뱀에 비유한 삐라(중) /<그림4> 북한 선전화(우)


4) 전쟁의 공포와 이미지

북한과 관련한 이미지는 이후 인간 이하의 동물로 고착되었다. 북한을 상징하는 것은 붉은 돼지, 늑대, 이리 등이었다.


적대의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일차적인 원인은 공포에 있다. 우리 사회에서 대북 인식은 공포와 적대적 이미지로 구체화되었고, 교과서, 대중문화, 박물관 등의 매체를 통해 반복적으로 재생되고 있다.


그 중 특히 반공을 목적으로 제작된 만화영화 <똘이장군>은 북한 사회에 대한 당대의 시선을 보여준다. <똘이장군>에서 김일성은 ‘인간의 가면을 쓴 붉은 돼지’로 구체화되었고, 북한군은 ‘따발총’을 든 늑대와 이리로 그려졌다. 만화영화는 엄청난 인기 속에서 북한군이나 김일성에 대한 이미지를 각인하는 역할을 하였다. <똘이장군> 4)의 이미지는 당시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모았던 <타잔>과 <드라큘라>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만 모아 재조립하였다.



<똘이장군> / 감독 : 김청기 / 각본: 김동현 5) / 1978, 1979

산 속에서 동물들과 어울려 숲속의 장군으로 살던 타잔 소년 똘이가 북한의 핍박으로 고생하던 소녀 숙이를 만나 도움을 주다가, 사람들에게 강제 노역을 시키고 짐승의 모습을 한 북한의 악당들을 쳐부수고 탐욕스런 붉은 수령까지 격파한 후 자유대한으로 넘어간다는 내용의 제3땅굴편과, 남한으로 넘어온 똘이가 요괴 같은 남파 간첩과 다시 맞서게 된다는 내용의 '간첩 잡는 똘이장군'의 총 2편으로 만들어진 반공 애니메이션. '똘이장군 제3땅굴편'은 1978년, '간첩 잡는 똘이장군'은 1979년 제작되었다.




3) <그림2>는 김일성이 가짜라는 것을 주제로 한 만화 형식의 삐라이다.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은 가짜로 김일성의 흉내를 내고 있으며 진짜 김일성은 1885년에 태어나 만주에서 죽었는데, 가짜가 나타나 진짜 흉내를 낸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4) <똘이 장군>은 같은 내용의 김형배의 만화판이 존재한다. 만화판 <똘이 장군>은 반공만화 최고봉으로 탁아소, 세뇌, 배급, 땅굴 등 북한을 연상시키는 코드의 총집합이었다.

5) 똘이장군의 각본을 담당했던 김동현 작가는 중앙정보부 과장 출신으로 방송 작가가 된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었고 <지금 평양에선>, <남십자성> 등의 TV용 반공 드라마를 많이 썼다.




2. 남한영화에 나타난 북한에 대한 이해


영화는 반공주의를 효과적으로 확산시키고 국민 대중에게 내면화시키기 위한 가장 강력한 선전도구로 인식되었다. 영화가 ‘제2의 총탄’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1, 2차 세계대전 시기 영국과 미국의 선전 영화를 통해 잘 알려져 있었다. 영화가 대중문화의 꽃이었던 1950~60년대는 물론이고 텔레비전 전성시대가 시작된 1970~80년대, 영화가 제2의 전성기를 맞은 1990년대 이후에도 영화에 대한 반공주의의 막강한 영향력은 계속되었다. 반공주의를 이데올로기적 기반으로 하는 이른바 ‘반공영화’는 1960~70년대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 속에 만들어졌으며 1987년까지도 대종상에는 반공영화상이 존재했다.


‘반공영화’는 냉전체제의 구축과 와해, 북한에 대한 입장과 태도, 할리우드 장르영화의 영향 등에 따라 그 외형과 내용을 달리했으며, 무엇보다도 반공주의의 시대적 정서를 반영하며 재생산되고 변주되고 도전받아왔다.


1) 한국전쟁 직후 ~ 1970년대


한국전쟁 직후 반공영화는 선전 계몽영화로서의 성격을 바탕에 깔고 있으나 주로 전쟁과 가족, 인간관계 등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전쟁의 비극성 그 자체를 고발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는데 대표적인 영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피아골>(이강천, 1955) : 빨치산들의 세계 → 공산주의자들에게도 휴머니즘이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당초 의도와는 달리 상당한 수정을 거쳐 개봉됨

<운명의 손> : 공작원인 바걸과 방첩첩보대원의 사랑과 비극

<성벽을 뚫고>, 1949, 한형모 : 이념을 달리 하는 처남매부 간의 격돌

<아리랑>, 1955, 이강천 : 나운규의 원작을 6·25 당시로 시대상황을 바꾸어 다시 영화화한 작품, 북한을 소재로 한 영화의 시작, 미군 두 명을 숨겨준 주인공의 가족이 좌익의 박해를 받는 상황 설정

4·19 혁명 직후인 1960년대 초반, 이승만의 반공규율사회에 저항하는 새로운 민족주의가 등장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영화에도 반영된다. 하지만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군부세력은 과거 이승만정권의 독립·식민의 이항대립을 발전·빈곤의 담론으로 대체하였다. 또한 1960년대 영화 제작 편수가 급증하면서 다양한 소재를 담은 남북문제를 다룬 영화가 등장하는데 다음 표는 대표적인 영화를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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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를 대표하는 전쟁영화 <피아골>(이강천,1955)과 <7인의 여포로>(이만희,1965)를 둘러싼 논쟁은 당대 반공의 조건을 재검토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이 두 영화는 모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상영이 금지되고 후자의 경우에는 감독에 대한 구속영장까지 청구되었다.


<피아골>은 전북도경의 공보주임이 빨치산 노획문서를 바탕으로 직접 시나리오 작업을 한 것으로, 제작 단계에서는 군경의 지원과 협조가 컸지만 막상 영화가 완성되자 영화에 깔려 있는 ‘휴머니즘’이라는 주제의식을 바라보는 정부 부처 간의 의견 차이가 컸다. 결국 ‘이 영화를 반공영화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으로까지 확대되면서 상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피아골>이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북한 공산주의를 비인간적·반인륜적인 것으로 위치지워 남한 체제의 휴머니즘적 우월성을 부각시켜야 했던 반공영화가 그 휴머니즘의 대상과 범위를 공산주의에게까지 확대했기 때문이다. 결국 <피아골>은 마지막 장면에 여주인공이 남한으로 귀순한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 태극기를 오버랩시킴으로써 논란을 잠재우고 가까스로 개봉될 수 있었다.


<7인의 여포로> 역시 문제가 된 것은 휴머니즘이었다. 이 영화에서 북한 인민군은 남한의 여포로들을 위해 중공군과 맞서 싸운다. 공산주의자를 인간의 견지에서, 한 민족의 견지에서 바라본 것이다. 북한이 휴머니즘과 자유를 말살하는 곳이라는 사실을 강조했어야 할 반공영화가 북한 공산주의자가 가진 휴머니즘을 내세우는 순간, 이 영화는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근거를 스스로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7인의 여포로>가 문제시된 1960년대 중반 이후 이런 영화들은 ‘반공 휴머니즘 영화’로 불리게 된다. 반공주의에 철두철미하려면 북한 공산주의자에 대해서까지 휴머니즘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정부의 반공주의 논리는 휴머니즘이야말로 반공의 필수적인 요소이며 휴머니즘의 테마를 가진 영화가 진정한 반공영화라는 주장 앞에 기세를 꺾을 수밖에 없었다. 반공주의와 휴머니즘의 문제는 대중문화 속에서 변화하고 정립되는 반공주의의 모습을 보여주며 1960년대 중반 이후 반공영화의 변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반공영화의 핵심을 이루는 양대 축은 전쟁영화와 간첩·첩보영화다. 전쟁영화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을 시시각각 상기시키는 역할과 북한이 언제 다시 전쟁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공포감 조성에 큰 역할을 했다. 한편 남한 사회 내부로부터 분열과 파괴를 꾀하는 간첩의 활약과 이를 저지하려는 공권력의 대리인 간의 대결을 그린 간첩·첩보영화는 한시라도 경각심을 늦출 수 없는 분단 현실을 환기시키는 체제유지의 보루로 기능했다.

1982년 김현동 감독이 제작한 ‘해돌이대모험’이라는 작품의 포스터. <똘이장군> 이후 많은 반공만화물이 제작되었으며, 그나마 이 작품에선 북한사람들도 ‘사람’으로 나온다.


반공영화의 최대 관객은 바로 어린이와 청소년이었다. 반공교육과 도덕교육의 결합을 통해 반공주의를 감성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전쟁과 간접 침략의 위협은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의 기반이 되었다. 학교 단위로 실시하는 단체관람은 반공영화의 주요 소비형태였으며, 이것은 대중성을 상실한 이후에도 반공영화가 상당 기간 온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 1970~1980년대 : 반공과 오락성


1967년 5월 박정희가 제6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면서 남한 사회가 유신이라는 독재체제의 준비기로 들어가고 보수화됨에 따라 북한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변화가 생겼다. 북한의 인민까지 포함한 북한 전체를 비판대상으로 삼는 반북주의가 점차 힘을 얻게 된 것이다. 무장공비와 청와대 침투 미수사건이나 미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비무장지대에서 크고 작은 공격과 침투 등이 벌어진 1968년 이후에는 더욱 그랬다.


1960년대 후반 반공영화의 변화는 두 방면에서 일어났다. 하나는 북한 사회를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영화들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고발>(김수용, 1967)과 같이 현재 북한 사회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그린 영화나 <싸리골의 신화>(이만희, 1967)와 <돌무지>(정창화,1967)처럼 전쟁 중 북한 지역이 배경이 된 영화가 만들어졌다. 북한 사회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북한의 상층 지배권력 뿐 아니라 북한의 인민들도 공산주의에 길들여져 있고, 이미 남한과는 이질적인 사회가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또 하나의 변화는 간첩·첩보영화의 성행이다.


특히 1965년에 수입 개봉된 할리우드 영화 <007 살인번호>(테렌스 영, 1962)가 크게 흥행한 이후 첩보영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1966년부터는 홍콩이나 일본을 배경으로 한 국제 첩보영화가 활발히 제작되었다. 이처럼 북한 권력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 즐겨 등장한 데는 1970년대 남북관계의 변화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7·4남북공동성명 이후 민간에서 통일론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는 것을 경계하면서 박정희 정권은 반공교육을 철저히 시킬 것을 강조했다. 6)


6) 유신체제 하에서 바른생활(도덕)이 필수과목으로 들어오면서 반공 교육이 크게 강화되었다. 도덕 과목은 매 학년 70시간을 배당받았지만, 도덕 교육은 각 교과 활동과 특별 활동, 기타 학교 교육 전반을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했기 때문에 활동반경은 보다 광범위했다. 반공 글짓기, 반공웅변대회, 반공표어, 반공포스터 그리기, 학도호국단, 반공반 조직 등이 그 예였다.




공산주의가 민족을 부정하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좌우합작 역시 파탄이 난 것이며, 남북 분단의 책임은 그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산주의는 전술적 차원에서 민족주의와 합작하는 모양새를 취하지만, 나중에는 결국 민족주의자들을 배신하고 타도하려는 것이 그들의 의도다. 따라서 그들과의 통일 논의는 철저한 반공정신으로 무장할 때만 가능하고 남북대화는 이를 필수적인 조건으로 하는 가운데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1970년대 반공영화가 전쟁영화보다는 간첩·첩보영화 쪽에 방점이 찍히게 된 데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라는 요인도 있었다. 텔레비전 수상기의 획기적 보급으로 대중문화의 무게중심이 영화에서 텔레비전으로 옮겨가면서 영화는 관객의 관심을 끌기 위해 더 대중적이고 오락적이며 자극적인 소재와 표현을 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반공영화는 1966년 대종상에 우수반공영화상이 신설되는 등 정부에 의해 대대적으로 장려되었지만 점차 대중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1970년대 이후 반공영화는 점차 사라져가는 대중의 흥미를 붙잡기 위해 더욱 오락적이고 대중적인 면을 강화해야 했다. 1950~60년대 휴머니즘이 반공영화의 발목을 잡았다면, 1970~1980년대에는 오락성이 반공영화에 비수를 겨눈 꼴이었다.


1970~1980년대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영화 중 오락성을 강화한 간첩·첩보 수사물로, MBC에서 방영되었던 <수사반장>(1971~1984)이 대표적이다. 당시 한국 영화가 비록 침체의 길을 걸은 것은 사실이지만, 바로 이런 조건과 배경 속에서 반공영화는 명맥을 유지했다. 반공주의가 안보 논리로 정착된 1980년대에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로서 국제적으로 암약하는 간첩 이야기가 주로 그려졌다. 당시 홍콩 액션영화에 열광하는 관객들은 가끔 한국형 액션영화로서의 첩보영화를 소비할 뿐이었다. 이는 반공주의를 반영한 반공영화의 존립 자체를 어렵게 했으며 반공주의를 강조하면 할수록 영화는 관객 대중으로부터 멀어져갔다.


3) 1990~2000년대 : 민주화와 성찰적 시선


1987년 이후 남한 사회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세계적인 탈냉전 분위기 속에서 반공주의에 의문을 제기하는 영화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의 대표적 전쟁영화인 <남부군>(정지영, 1990), <은마는 오지 않는다>(장길수, 1991), <아름다운 시절>(이광모, 1998)이 그것이다. 전쟁을 배경으로 한 개인의 운명과 공동체 내부의 갈등을 다룬 이들 영화에서 갈등의 중심은 남과 북이 아니다. 오히려 갈등의 원인을 제공하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은 도움을 주러 왔다고 여겼던 미군(외세)이고, 우리 삶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이념이며, 왜 싸우는지 알 수 없는 전쟁 자체다.


<쉬리>와 <간첩 리철진>

1999년에 나온 <쉬리>와 <간첩 리철진>의 공통점 중 하나는 ‘기아선상에 있는 북한’이 중요한 소재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강제규 감독은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북한의 실상을 접하고 <쉬리>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말한다. 영화 <쉬리>에서 북한은 절박한 생존의 문제에 직면해 있는 허약한 체제 속에서 생존을 위한 마지막 돌파구로 테러를 감행할 수밖에 없는 분열된 체제로 보여진다. 이는 탈냉전 시대 새로워진 미국의 대북 이데올로기의 핵심 논리가 반영되어 있다.


<간첩 리철진>(장진, 1999)의 경우 이념의 화신으로 그려졌던 간첩에게 인간의 피와 살을 부여하였다. 영화에서 설정한 북한의 현실은 남한의 관객들에게 이미 상대적 우위에 위치해서 북한을 바라보게 하였다. 간첩이 남파된 이유도 요인 암살이나 국가 주요시설의 파괴가 아니라 식량난을 위해 슈퍼돼지의 유전자 샘플을 구하기 위한 것이며 그는 불쌍한 인간들을 대표해서 내려온 것에 불과한 것이다.


공포와 두려움의 화신으로부터 북한에 대한 무관심 혹은 그 속에 녹아 있는 경멸적 태도가 동전의 양면인 것처럼 북한주민을 촌스럽게 때로는 동정의 대상 혹은 우리와 다른 타자로서 바라보는 시각이 담겨 있다. 영화는 북한이 과연 우리와 같은가, 다른가의 문제를 북한체제 담당자와 북한주민의 구분을 통해 해결한다. 이는 북한정권은 인정할 수 없지만 북한주민은 동포로 껴안아야 한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예전에 살벌한 반공구호를 통해 한국이 발전해야할 이유를 구성해낸 것처럼 이제는 굶주림에 지친 동정의 대상으로 재현된 북한을 상정하고 그것을 방치할 수 없는 남한의 처지를 경제라는 고리로 설명하고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 한국 영화시장의 폭발적 성장과 함께 <태극기 휘날리며>(강제규, 2004, 이하 <태극기>로 줄임)와 같이 전투를 중심으로 한 본격 전쟁영화가 개봉되었다. 147억 원이라는 역대 최고의 제작비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던 <태극기>의 제작진들은 국방부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국방부에서는 이 영화가 ‘매우 위험한 영화’가 될 소지가 있다며 결국 지원을 거부한 것이다. 그 이유는 주인공들이 전쟁에 임하는 자세에 어떤 군인의식도 없으며 단지 동생을 구하기 위해 인민군이 된다는 설정에도 문제가 있어 젊은이들이 군대를 기피하고 전쟁을 혐오할 소지가 다분하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영화 소재로는 처음으로 보도연맹사건이나 부역자 처벌 문제, 민간인 학살 등 민감한 사안들을 다룸으로써 전쟁 당시 남한 국가의 부도덕성에 문제를 제기했다.


전쟁 전 한반도가 아무런 갈등도 없었던 것처럼 묘사된 <태극기>의 경우와 유사하게 <웰컴 투 동막골>(박광현, 2005, 이하 <동막골>로 줄임)역시 어떤 갈등이나 대립도 없는 곳으로 그려진다. 결국 피해자는 남북한의 민중이며 이때 ‘순박한’ 공동체를 파괴하는 가해자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미군을 필두로 한 외세라는 것은 <은마는 오지 않는다>나 <아름다운 시절>에 이어 <동막골>과 <작은 연못>(이상우, 2009)에서도 드러나는 주제의식이다. 특히 ‘노근리 민간인 학살사건’을 그려낸 <작은 연못>은 피해자의 관점에 서서 반전과 반미의 정서를 강하게 드러낸다. <동막골>과 <작은 연못>에는 그야말로 민족주의적 이상이 표현되어 있는데 이와 같은 민족주의적 감성은 과거의 반공주의에 대한 비판의 시각이 담겨있다.


또한 <동막골>과 <작은연못>은 <태극기>에서와 마찬가지로 남한 국가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고 있다. <동막골>에서는 ‘한강다리 폭파 사건’을 보여 주었고 <작은 연못>에서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전시작전권을 미국에 넘겨준 채 국민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허약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관점은 <고지전>에서도 잘 나타나 있는데, 미국에 밀려 정전협상 테이블에서 제대로 주도권을 가질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하고 무능한 존재로 남한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1990~2000년의 전쟁영화에는 북한을 ‘반공’이라는 배제의 관점이 아닌 ‘민족’이라는 통합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으며, 남한 국가에 대한 성찰적 시선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도전적이다. 특히 정권교체를 이루어낸 김대중 정부 이후의 영화들은 전쟁기의 남한 국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과거 생각할 수 없던 남한 국가에 대한 정통성과 정당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가능하게 했다.


4) 최근 경향: 반북과 우월자의 시선


<포화속으로>

<포화 속으로>(이재한, 2010)는 개봉 당시 평론가들로부터 ‘시대착오적’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보수적 색채를 지니고 있었지만, 300만 명 이상의 흥행 성적을 거둠으로써 현실에서나 관객들의 심성에서나 여전히 냉전이 지속되고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이 영화의 갈등은 정확하게 남과 북이며, 좀 더 정확하게는 남한의 학도병들과 북한 인민군 대장과의 대결이다. 과거의 인민군 대장들은 야비하고 비인간적이며 공산주의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존재였지만,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민군 대장은 특유의 카리스마를 지녔을 뿐 아니라 인간적이기까지 하다. 학도병이 군인이 아니라 학생이라는 이유로 항복할 시간을 주기 때문이다.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는 수령의 명령에 따라 포항으로 향했던 그는 학도병을 얕잡아본 자신의 오판과 오만으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 연합군이 합류할 시간을 벌어줌으로써 전투에서 승리할 기회를 놓치고 만다.


그런데 김일성이 권력투쟁에서 완전히 승리하는 것은 전쟁 이후이고 정치 체제로서의 수령제가 확립되는 것은 1970년대 초반이다. 이를 통해 볼 때, 한국전쟁 당시 당과 수령을 분리해 당의 명령보다 수령의 직접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근거로 반대파를 제압하는 인민군 대장의 모습은 역사적으로 맞지 않다. 이는 2008년 보수정권의 재집권으로 목소리를 얻은 보수적인 남한 사람들의 관념 속에서 추상화된 ‘적’의 모습에 가깝다. 공산주의 이념을 실천하는 주체가 당이 아니라 수령이라고 주장하는 ‘적’을 상정한다는 의미에서 이 영화는 반공적이라기보다 ‘반북적’인 영화이다. 혈서를 쓰는 학도병들의 비장함이나 아들을 전쟁터로 내보내는 어머니의 담담함은 일제 말기 전쟁을 선전하는 영화의 이미지와도 겹치며 공산주의로부터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결의로 충만한 학도병의 이미지는 전쟁기 우익 청년단체들의 극우청년들의 존재와도 겹친다. 2010년 이 영화 개봉 무렵, 한국 현대사 인식과 역사 교과서 문제를 둘러싼 좌우대립 속에서 우파 학자들이 내세운 ‘대한민국’의 정통성이나 애국심의 강조와 같은 맥락의 정서를 발견할 수 있다. 2002년의 서해교전,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 2010년의 천안함 침몰사건, 세 차례에 걸친 북한의 핵실험 등 일련의 사건을 북한이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임을 입증하는 증거로 내세우고 있는 남한의 보수주의자들은 북한의 대립항으로서 ‘대한민국’의 건국과 애국을 강조하고 있다.


2000년대 제작된 간첩·첩보영화의 특징

<간첩>(우민호, 2012), <베를린>(류승완, 2012), <은밀하게 위대하게>(장철수, 2013), <동창생>(박흥수, 2013)과 같은 영화 속 전·현직 간첩은 이데올로기로 무장된 과거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진 반면, 북한의 최고권력층은 자신의 인민에게 배신의 칼날을 들이대며 권력투쟁에 빠져있는 부도덕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칭한 이래 할리우드 영화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북한의 이미지는 야만적인 국제 테러조직의 수장, 부패한 세습정권 그리고 인민의 안위 따위는 우습게 여기는 부도덕한 권력 등으로 묘사되고 있다. 남한의 가장 오락적·대중적이고 가장 휴머니즘 지향적인 영화들에서 그 어느 반공영화들에서보다도 더욱 강고한 반북주의가 재생산되고 있다.





<참고 자료>

∙변재란, 남한영화에 나타난 북한에 대한 이해, 『영화연구』, 6, 2001.2.

∙서성희, 영화가 그려낸 우리들의 일그러진 북한, 『씨네포럼』 7, 2006.8.

∙이하나, 한국 대중문화에서의 반공주의, 『반공의 시대』, 돌베개, 2015

∙전영선, ‘적대’의 이미지와 기억으로 본 북한, 『문화와 정치』 5, 2018.9.

∙정진아, 유신체제 국가주의, 반공주의 교육의 내면, 『통일인문학』 73, 20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