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성당

민주주의를 꿈꾸는 사람들의 피난처, 6월 민주항쟁의 성지

6월 민주항쟁을 기록한 영상물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것이 1987년 6월 이곳에서의 농성장면이다. 태극기를 앞세우고 언덕을 노래를 부르며 당당하게 녈오는 학생과 시민들의 모습은 언제보아도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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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빌딩들에서 쏟아져 내리는 두루마리 화장지와 응원 편지 비닐 봉지에 담긴 지폐는 시민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었다. 6월 항쟁 전부터 농성중이던 사람들(명동성당은 이미 6월 항쟁 전부터 이렇듯 약한 이들을 위한 피난처였다. 군부 독재 정권도 종교시설에는 함부로 군홧발을 앞세워 들어올 수 없었다)은 대학생들과 시민들을 위해 밥과 라면을 대접했다. 인근에 있던 학교였던 계성여고의 여고생들은 농성에 참여한 오빠와 언니들을 위해 학교 담장 위로 자신들의 도시락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성당을 둘러싼 넥타이 부대(직장인들)의 박수소리는 민주주의 바로 세우기에 동의한다는 울림이었다. 우리가 지금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는 이 장면들이 바로 6월 민주항쟁을 상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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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이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세운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온 국민이 하나 되어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이뤄낸 바로 그 순간이었던 것이다.


명동성당이 민주화운동의 거점으로 기능했던 것은 김수환 추기경의 영향이 컸다. 1974년 인민혁명당 재건 위원회 사건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으로 지학순 주교가 중앙정보부에 체포되자 이곳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결성되었다. 1976년에는 야당과 재야인사들이 박정희 퇴진을 요구하는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했고,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추기경이 시국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1987년 518민주화운동 7주기를 맞아 열린 추모미사에서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은폐/조작 되었음을 폭로 했다. 이를 계기로 6월 민주항쟁이 촉발되었고 5박 6일에 걸친 농성은 민주화를 향한 전국민의 항쟁을 고양시켰다.


6월 민주항쟁 이후에도 농산물 개방 문제라든지 외국인 노동자 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시민운동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1995년에는 5.18 특별법 제정운동 요구하는 농성이 173일 동안 전개되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민주주의 발전에서 명동성당이 갖는 의미는 실로 지대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나, 지금 이곳에는 그 역사를 나타내는 아무런 시설도 남아있지 않다. 1988년 5월 15일 투신하여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드러낸 서울대생 조성만 열사의 기록도 이곳을 찾는 외부인의 눈에는 아직 보이지 않아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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