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한열 동산 ]
연세대에는 이한열과 노수석의 죽음을 기리는 시설이 있다.
이한열은 1987년 6월 9일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은폐 규탄과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가했다가 정문 앞에서 최루탄에 맞아 쓰러져 7월 5일 사망했다.
노수석은 1996년 3월 29일 ‘대선자금 공개와 국가교육재정 확보를 위한 서총련 결의대회’에 참가했다가 종로에서 경찰에 의해 사망했다.
연세대학교 학생회관과 백주년 기념관 사이에 작은 동산이 있다. 이곳이 ‘이한열 동산’이다. 이한열 동산은 대학생 이한열의 삶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수업을 받던 상경대 백양관, 동아리 활동을 했던 학생회관, 공부를 했던 도서관, ‘독재타도’를 외쳤던 민주광장, 그가 쓰러졌던 정문, 마지막 한 달 간 누워있던 세브란스 병원의 중환자실까지 모두 볼 수 있는 곳이다.
이한열동산에 이한열추모비가 세워진 1988년부터 지난 28년 동안, 한 해도 빼지 않고 6월 9일 저녁이면 한열동산에서 추모의 밤 행사가 열려왔다. 낮에 학생회에서 주최하는 추모제와 별도로, 이미 사회인이 된 동문들을 중심으로 열리는 행사다. 이 날은 미리 약속을 하지 않아도, 행사를 공지하지 않아도 한열을 기억하는 선배, 동기, 친지들이 때로는 혼자, 때로는 가족의 손을 잡고 한열동산을 찾아온다.
[추모비에서 기념비로]
이한열 동산에는 1988년에 세워진 이한열 추모비가 있었다.
추모비는 건립 10년이 지나면서부터 금이 갔고, 이를 발견하면서 수차례 때우곤 하였다. 훼손이 된 추모비는 연세대학교 박물관으로 가고, 다시 큰 돌비석으로 콘셉트를 달리한 새 기념비가 들어섰다. 2014년 연세대학교 백양로 재창조 공사 중 이 곳이 훼손되었다. 이에 이한열기념사업회는 2015년 이한열동산에 이한열기념비를 다시 세웠다.
이한열 동산에 있는 이한열 추모비
이한열 기념비에 새겨진 숫자들의 의미들
[이한열 기념관]
이한열(1966~1987)은 1987년 6월 9일 6월민주항쟁이 본격화되던 초기에 최루탄에 맞아 27일 만인 7월 5일 사망했다. 이한열의 가족은 1990년 12월 국가배상금으로 마포구 창전동에 가옥을 구입하여 기념관을 개관했다. 기념관은 1996년 6월 마포구 노고산동으로 신축·이전했고 민주주의에 관한 전시와 교육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한열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광주 진흥고를 졸업하고 연세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전문경영인이 되고자 했던 그였지만 대학에서 80년의 광주를 뒤늦게 알고 자신을 책망했다. 그는 “행동하는 양심으로 부끄럽지 않기”위해 거리에 섰다. 그러나 이한열은 87년 6월 9일,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고, 27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 7월 5일 22세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7월 9일,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는 전국에서 160여 만 명의 추모 인파가 모였다. 그는 고향인 광주 망월동 5·18 묘역에 묻혔다. 이한열의 희생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우리나라에 대통령을 국민의 투표로 뽑는 직선제를 비롯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졌다.
이한열기념관은 이한열 열사의 유품을 비롯한 1987년 유월항쟁의 기록을 보존하고, 연구하며, 전시를 통해 민주주의의 역사를 교육하는 박물관이다. 열사의 어머니가 국가로부터 받은 배상금과 시민 성금으로 2004년 6월 9일 사립박물관으로 새롭게 개관하였다.
전시유품
경영학과 티셔츠와 운동화 – 이한열이 경찰의 직격 최루탄에 피격될 당시 입고 있던 옷과 신발이다. 오염과 열화 등으로 훼손이 심해져가던 유물이었으나 2015년 복원, 보존 작업을 마쳤다.
연세대 화학공학과 깃발 – 이한열이 쓰러졌을 때 그를 받치고 있어 혈흔이 남은 깃발이다. 2000년대 초반 존재가 잊혀졌다가 2015년 여름 공과대학 철거과정에서 우연히 발견, 이한열기념관에 기증되었다.
성적표 – 1987년 월간지 기자가 광주 집에서 빌려갔다가 지난 2015년 반환한 초·중학교 성적표, 우수한 학업성적과 담임선생님의 평가, 특별활동 내용 등 이한열의 다양한 면모를 볼 수 있는 유품이다.
압수·수색 검증 영장 – 이한열이 숨을 거둔 7월 5일 새벽, 병원으로 들이닥친 경찰이 내민 압수·수색 검증 영장. ‘압수할 물건: 이한열의 사체 1구’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기념비랍니다’
배은심(이한열의 어머니)
이한열 기념비 제막식 2015년 6월 9일 어머니 말씀 중에서
우리 한열이가 아파서 왔다갔다 하는 것이 보여 갖고 제가 이야기를 할 수가 없네요.
추모비가 기념비로 바뀌었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한열이를 죽인 작자들은 지금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 어미 가슴에서는, 이 어미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저는 추모비가 그립습니다.
우리 한열이를 생각하면서 그 앞에서 한열이를 불러보고 후배들이 이한열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랬던 것이 그리울 것 같습니다.
살인마들은 지금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우리 애기는 기념비가 되었습니다.
우리 한열이는 대학생이었지만 나에게는 애기였습니다. 내 아들을 죽인 살인마들은 연희동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 아들은 기념비입니다.
이걸 어떻게 소화해야 될지 어떻게 생각해야 될지... 저는 한이 많습니다.
우리 애기를 망월동에 갖다가 묻어놓고 저는 밤이나 낮이나 내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살고 지금도 울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념비랍니다.
어쨌든지 상황은 여기까지 왔습니다.
기념비가 되었든 추모비가 되었든 이한열이에 대한 얼굴이 또 하나 생긴 것 같습니다.
군홧발이 이 동산에까지 올라와서 짓밟고 다닐 때 저는 저 삼층 총학생회실에서 내다보고 저 사람들이 우리 한열이를 발로 차지나 않을까, 수시로 걱정을 했습니다.
그때는 경찰들이 이 동산에 진을 치고 있었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돌입니다. 돌.
돌을 내 아들이라고, 우리 애기라고, 우리 애기 차면 어쩌지 발을 동동 구르면서 저는 동산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기념비라고 하니까 생소한 것도 같고
기념비라고 하니까 마음이 두근두근 하기도 하고.
어쩌면 저는 그걸 원하고 이 동산에 이한열이를 심으려고 했다고 이 자리에서 고백합니다.
많은 연세인들이 이한열이하고 같이 살 수 있는 동산을 만들어야 된다고,
이한열이하고 같이 살 수 있는 작은 집을 만들어야 한다고,
저는 이 교문을 떠나면서 다짐을 했습니다.
나는 굶어 죽어도 좋으니까 나는 허름한 집에서 살아도 좋으니까 우리 이한열이는 많은 사람들과 세상에서 살아가야 된다고 다짐을 했기에 저는 그것을 제 신조로 삼고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우리 한열이가 86학번인데, 우리 86학번 친구들이 다 중년이 되었네요.
내 아들이 큰 것 만큼 86학번들이 크고 있구나. 내가 그걸로 보람을 삼아야겠구나. 이 자리에서 그게 떠올랐습니다. 우리 한열이를 본 것처럼 86학번 그 사람들 쳐다보면 되겠네.
학교 당국에도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되겠습니다.
민주열사의 기념물을 아무 곳에나 내다버리고 포크레인으로 떠다 버린 학교도 있어요.
지금까지 추모비를 어떤 눈으로 바라 봤던지 간에, 옆으로 봤던지 앞으로 봤던지 상관 없이 이 자리에 묵묵히 서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 우리 연세대학교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연세대학교가 없어지지 않는 한 이한열이가 이 자리에서 떠나지 않도록 길이 길이 돌봐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마른 잎 다시 살아나( 노래 : 안치환)
서럽다 뉘 말하는가 흐르는 강물을 꿈이라 뉘 말하는가
되살아오는 세월을 가슴에 맺힌 한들이 일어나 하늘을 보네
빛나는 그 눈속에 순결한 눈물 흐르네
가네 가네 서러운 넋들이 가네
가네 가네 한 많은 세월이 가네
마른 잎 다시 살아나 푸르른 하늘을 보네
마른잎 다시 살아나 이 강산은 푸르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