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콩 선생이 만난 팔도 역사교사 7
>>장용준(전 함평고 교장, 편집부 객원위원)
☞ 왜 일곱 번째 인터뷰이로 ‘백옥진’을 선정했는가?
전국역사교사모임의 회장을 맡고 있는 백옥진 선생은 잔잔하게 미소를 짓고 있으면 부처님 상호가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하지만 호탕하게 웃을라치면 시골마을에서 아녀자들을 진두지휘하는 후덕한 부녀회장 모습이 판박이처럼 나타난다. 또한 그녀에게서는 캔터키 할아버지로 유명세를 탄 KFC 창업자 커넬 샌더스의 모습이 엿보이기도 하다.
그런 그녀가 회장 임기를 끝냈음에도 불구하고 후임 회장으로 선뜻 나서는 선생님이 없어서 올해 다시 전국역사교사모임호를 이끌어야 한다. ‘도대체 왜?’라는 의아함 속에 인터뷰 청을 넣었다. 대체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모임회원 전부가 한번쯤은 되새겨보며 회의 미래상을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문제이다.
1. 우선 반갑습니다. 올 한 해 전국모임 회장 일을 계속 하셔야 되는데 축하를 드려야 할까요, 위로를 드려야 할까요. 현재 느끼고 있는 소감부터 말씀해 주시죠?
제가 2년 전에 전국모임 회장직을 결단할 때는 회장일이 이렇게 많을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일을 해보니 전국모임 회장 자리가 외부 단체와의 연대를 비롯한 다양한 일이 끊임없이 이어져서 상당히 부담 되었습니다. 또한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전국모임 회장의 위상이 훨씬 높아서 그 또한 부담되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회장 일에 익숙해지면서 시간이 빨리 지나간 것 같고, 또 회장으로서 하고 싶었던 일을 다 마무리 못했는데, 자의반 타의반일 망정 한 번 더 회장으로서 역할을 하게 돼서 위로보다는 축하를 받아야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2. 전국모임 회장 자리가 학교생활을 하면서 병행하기에는 힘든 측면이 있어서 대체적으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2년 단임제로 운영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 힘든 일을 더 하시기로 결단하셨나요?
힘들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생각하시는 것보다는 그리 힘들지 않았습니다. 물론 집행부 선생님들께서 워낙 많은 일을 감당해 주시고 책임져주셔서 제가 모든 걸 책임지지 않았기 때문이지만요. 아무튼 차기 회장을 잘 세우지 못하고 그만두게 되는 상황이 제가 책임졌던 모임이나 선생님들께 죄송스러운 마음이 크고, 모임을 위해서 제가 한 번 더 회장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해서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더 하게 되었습니다.
3. 1년을 더 하고나면, 후임 회장 선임이 원활히 이루어질 것 같은가요? 예상하기는 힘들겠지만, 회원 전체가 함께 고민해 본다는 측면에서 진솔하게 마음 속 이야기를 들려주시죠.
솔직히 말씀드리면 후임 회장을 쉽게 추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개인의 결단을 끌어내는 것이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후임 회장이 없는 상태에서 비상체제로 운영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제가 한 번 더 하면서 집행부 선생님들, 지역회장님들, 선배교사들 등 모두 함께 고민하는 장을 만들어 후임 회장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또 지금 생각으로는 꼭 후임 회장을 잘 세우고 떠나는 게 제가 회장으로서의 마지막 일인 것 같습니다.
4. 2년 동안 모임을 대표하여 회장 일을 하시면서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부분이 있었을 것 같은데, 주로 어느 것들이 힘들던가요?
안 믿으시겠지만 정말이지 힘들지 않았습니다. 모임의 다른 선생님들께서도 제가 2년 회장한 것 같지 않다고 너무 시간이 빨리 지나갔다고 하시던데 제가 느끼는 것도 2년이 순식간에 지나가서 크게 힘들다는 느낌은 그다지 받지 않았습니다.
다만 제가 어려움을 느꼈던 부분은 저 자신이 이전 회장님들처럼 공부하고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논리정연하게 글을 못 쓰고 말도 잘 못해서 이게 저를 조금 힘들게 했습니다. 모임 대표로서 감당해야 할 교육부나 여러 단체들과의 협의회나 방송 인터뷰, 모임 성명서 쓰는 거 이런 것이 너무 약해서 스트레스를 좀 받았습니다. 아마 이 부분이 회장하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5. 제가 느끼는 바로는 회장님 재임 시절에 각종 연수가 활성화되고 집행부들의 활동상도 눈에 띨 정도로 활발해 졌다고 판단되는데, 올 해 1년은 어떤 활동을 계획하고 계신가요? 집행부 구성은 원활하게 되었는가요?
제가 부회장이었던 2017년 여름부터 함께 일하고 싶은 선생님들을 찾아가서 자주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하면서 집행부 구성을 시작했었습니다. 흔쾌히 함께 해주시겠다고 하신 분도 계시고 삼고초려해서 모신 분도 있고, 심지어는 이제는 집행부를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고 스스로 오신 분도 계십니다. 저는 집행부에게 과다하게 주어지는 일을 분산시켜서 집행부로서 일만 하다가 지쳐서 나가떨어지는 걸 막고 싶었고, 학교일과 병행하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해서 이전 집행부보다 인원을 확대하여 구성했습니다. 모임이 어려웠던 시기에 함께 시작하고 그런 과정에서 구성된 집행부들이었기에 집행부 선생님들 간의 팀워크는 아주 좋고, 선생님들 한 분 한 분의 능력도 뛰어나지만 열정과 전문성이 뛰어나서 그 많은 행사와 활동이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집행부 선생님들께서 제가 한 번 더 하겠다는 결단을 하자 모두 함께 가자고 결정해주셔서 너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집행부를 더 하실 수 없는 상황인 선생님들도 계신데도 그런 마음을 내어주신 게 제가 회장을 힘들지 않았다고 말씀드릴 수 있고 또 계속 할 수 있게 된 원동력이 된 것 같습니다.
6. 회장님이 생각하기에 올해 회장 선출이 왜 난항을 겪은 것 같은가요?
제가 해보니 회장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이 너무 무거운 것 같더군요. 실제로 일은 지역모임과 집행부선생님들께서 다 하시는데 회장이 다 하는 것처럼 보여 지는 부분과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모임의 위상이 너무 높아져서 그런 모임의 대표를 한다는 게 무척 부담으로 다가오는 측면이 분명 있습니다. 개인이 그런 무게감을 감당해야하는 것이 선뜻 회장을 할 수 없게 하는 것 같습니다.
7. 2천여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전국역사교사모임이고 한국사교과서 반대투쟁 국면에서 적극 활동하며 모임의 위상이 한껏 부풀려진 측면이 있어서 이 질문을 드리기가 곤란하긴 합니다. 하지만, 어차피 이 인터뷰가 모임 회원들에게 회의 현실을 적확히 알리고 함께 고민해볼 여지를 갖는 측면이 있어서 이 질문을 과감하게 드려봅니다. 지금 현재 우리 땅은 KTX가 정차하는 곳이면 아무리 멀어도 서울에서 3시간 이내 권역인데, 이제 회장단 구성 인력풀을 지방으로까지 확대하는 고민을 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이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들의 머릿속에 회장단은 수도권(특히 서울)에서 해야 한다는 인식이 고정관념처럼 들어있기에 회장 임기가 끝날 때마다 후임 회장 세우는데 어려움을 겪는 듯싶어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네, 저도 그런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후임 회장을 추대하는 과정에서도 사실 수도권에서 찾다보니 말씀하신대로 인력풀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현실적으로 추대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집행부 선생님들과의 끝장토론을 하는 과정에서 나온 결론은 ‘현재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는 집행부들과 지역모임 출신의 선생님들이 회장을 맡아야 하지 않나?’였습니다. 말씀하신대로 KTX 시대이니 물리적인 거리는 해결될 수 있을 것 같고, 단순히 이름이 있는 명망가보다는 지역모임 활동을 하시면서 단련되고 검증되신 선생님, 지역모임이 튼튼해서 든든하게 지원해줄 수 있는 지역모임 출신, 그래서 1~2분의 지역 집행부와 함께 할 수 있는 선생님이라면 심리적인 거리도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8. 집행부에서 활동하지 않은 회원들은 잘 모를 것 같아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현재 집행부 구성 및 하는 일, 회의, 의사결정 등등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나요? 이런 일들을 회원들이 어느 정도 알아야 지방에서도 회장직에 도전하거나 집행부에 참여하는 선생님들이 나올 것 같아서 공개를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집행부는 제 경우를 보면 회장이 직접 선임하거나 스스로 하시겠다고 하신 분들 중에서 각각의 역할에 맞게 부회장, 사무국장, 편집부장, 연수부장, 연구부장, 홍보부장, 답사부장, 연대사업부장 등으로 구성했습니다. 부서장들은 때에 따라서 변화를 주기도 했습니다.
집행부가 하는 일을 아주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격주로 회의 참석해서 각종 사항 논의 및 결정을 하고, 회에서 주관하는 행사에 특별한 일 없으면 참석하시고, 지역모임과 소통이 필요한 부분이 있거나 필요한 사항이 있을 시 연락도 하는 등 대규모 모임체라면 늘상 있는 일들 위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화시켜 현 집행부의 활동상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ㅇ부회장 : 회장과 함께 회의 진행, 회장 부재시 회의 주관, 모임 기조나 성명서 작성 등
ㅇ사무국장 : 이번에 새로 만든 직책인데, 간사교체기에 모임의 회계나 여러 가지 사업에서 신임 간사를 도와주고 회계감사 담당 하는 등 모임의 살림을 책임지는 역할
ㅇ연수부장 : 초보교사연수, 직무연수, 특강 등 준비와 진행
ㅇ연구부장 : 역사교사의 날, 역사책읽기대회, 교육과정위원회 운영
ㅇ홍보부장 : 홈페이지와 페북 관리, 각종 행사 홍보 및 촬영, 팜플렛 작성 등
ㅇ답사부장 : 자주연수, 하루답사, 해외답사 추진 등
ㅇ연대사업부장 : 외부단체와 협력 강화, 각종 박물관 교육 관련 활동 등
ㅇ편집부장 : 회보 <역사교육> 제작 업무 총괄(4~5명의 편집부원이 함께 작업) 등
9. 어떻습니까? 회장님이 생각하기에 지방에 근무하고 계신 선생님도 서울에 사무실을 둔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직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지역모임의 든든한 후원, 지역모임에서 다져진 활동력, 개인의 열정과 결단, 회장과 함께 활동할 지역 선생님 1~2명 정도가 함께 집행부 활동을 하면 충분히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실 이번 학기부터 차기 회장에 관한 고민을 할 수 있는 지역모임 출신 선생님들과 지속적으로 논의하는 장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고요.
현 집행부 선생님들처럼 능력과 열정이 있는 차기 집행부를 구성해드릴 생각으로 여러 선생님들을 만나고 있고, 집행부에 차장 직급을 만들어 자연스럽게 집행부 활동이 차기로 이어질 수 있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제 개인적인 소망입니다만, 지역에서 회장님이 나오시면 좀 더 편하게 활동하실 수 있도록 모임이름으로 작은 방이라도 마련하고 싶은 욕심도 있습니다. 차기 회장님이 누가 되시든 출발이 힘드시지 않게 최대한 만들어놓고 그만두는 것이 제가 회장으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의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10. 아무리 그래도 거리상으로 가까운 서울이나 수도권 지역에서 전국모임 회장이 배출되어야 방대하게 확장되어 버린 현재 회를 이끄는데 더 효율적이겠지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회의 참석이나 다른 단체와의 협의, 다양한 외부 인사와의 만남이 많으니 수도권에서 회장이 나오는 것이 여러 가지 면에서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까 말씀드린 대로 회장직을 수행할 인적 자원이 수도권에만 한정되면, 이제는 회장 선출 문제가 매번 풀기 어려운 퍼즐이 되고 말겁니다. 이러한 때 지역모임에서 키워지고 지역모임에서 지지하는 선생님들도 전국모임을 이끌 수 있는 능력을 한껏 발휘했으면 합니다. 지역에서 서울까지 오고가기가 힘들겠지만 결단을 하시면 물리적인 거리는 충분히 극복될 겁니다.
11. 수도권 선생님들에게 전국모임 회장직의 매력에 대해서 이야기 몇 마디 해보시죠? 충분히 어필되어야 회장직에 도전하는 선생님들이 생기지 않을까요?
어떤 말을 해야 충분히 어필될까요? 다른 분들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저는 제 개인적인 능력으로는 절대 전국모임 회장을 할 수 없었습니다. 처음 제안 받았을 때 ‘헉? 엥? 내가? 뭐지? 무슨? 꿈인가? 도대체 왜?’ 이런 생각을 할 정도로 사실 너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냐고 되묻기도 하고, 절대 제가 받을 수 없는 자리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근데, 어찌됐든 그 자리를 받고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는 어렵지 않았고-인터뷰나 글쓰기 이런 건 여전히 어렵지만요ㅠㅠ- 제가 어디서 그런 대접을 받을까 싶은 많은 지지와 격려를 받고 있습니다. 모임의 위상이 저희들 생각보다는 훨씬 커서 그런지 교육부부터 시작해서 여러 학회나 단체들에서 모임 회장이라고 아주 큰 대접(?)을 받을 수 있는 멋진 자리가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직입니다.
12. 그럼 이제부터는 회장님 개인사에 대해서 좀 알아볼까요? 제가 알기로 회장님은 젊은 시절 인생사가 다사다난했는데, 대학시절부터 교직에 들어오기 전까지 활동사 좀 들려주시죠?
대학시절은 제가 87학번이니 그 시대에 학교를 다녔던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생활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외면만 가지고 보면 절대 그렇게 보이진 않지만, 서울 중심가에 살아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80년 서울의 봄과 각종 시위, 김대중 귀국보고회 등 각종 정치적인 사건을 눈으로 직접 보고 자란 세대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대학에 들어가서 자연스럽게 정치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생활했습니다. 역사를 좋아하고 교사가 되고 싶어 했던 소녀(?)가 그걸 잊고 우리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겠다고, 사회 변혁을 위해서 살겠다고 다짐했던 것 같습니다. 맨 날 수업보다는 밖에서 활동했었습니다. 다만 ‘고적연구부’에서 활동하면서 답사를 준비하고 운영했던 거 보면 그래도 역사교육과인 제 정체성을 놓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같습니다. 아무튼 87년부터 91년까지 대학교에서 그 엄혹하지만 치열한 시대 속을 걷는 게 지금의 저를 만든 시기였기에 참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졸업할 때는 애국적 사회진출이라고 해서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사회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자는 분위기가 많았는데, 저는 그 때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제가 살고 싶어 하는 삶을 살겠다고 부모님께 선언하고-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에는 부모님께 참 불효(?)를 저지른 것 같아 죄송한 마음도 있습니다.- 지방으로 내려갔습니다. 사실 친한 사람들 외에는 잘 말씀드리지 않았던 부분인데...... 그 시절이 자랑스럽다, 숨기고 싶다 그런 차원이 아니고 굳이 지금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한테 구구절절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말하는 게 좀 그래서...... 그러나 그 시절이 대학 때 못지않게 저의 삶 중에서 가장 찬란했던 시기였고 지금 제가 살아나가는데 가장 큰 버팀목이 되는 시기라고 생각해서 지금은 담담히 편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구에 내려가서 흔히 현장 활동이라고 부르는 공장생활을 하게 되었고, 함께 내려갔던 친구들과 살다가, 거기서 포항으로 내려갔던 학교 선배인 지금의 남편과 결혼도 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5~6년 살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다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13. 그러다가 무슨 연유로 뒤 늦게 교직에 들어오셨나요?
그렇게 서울로 올라와서 첫 아이 낳고 잠깐 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쳤었습니다. 수학을 가르치면서 아이들을 만나고 가르치는 게 너무 즐겁더라고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 어릴 적 꿈이 뭐였지?’, ‘내가 역사교육과를 간 이유가 뭐였지?’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렇게 수학을 가르칠 거면 내가 좋아하는 역사를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을 학교 졸업한지 10년 만에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 꿈이 역사교사라는 걸 깨닫게 되기도 했고요.
근데 학교 다닐 때도 안하던 공부를 10년 지난 후에 무슨 공부를 하겠냐며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운명이랄까? 당시 제가 살던 집 근처에 살던 과 선배를 한 번 얼굴보자고 만났는데 임용고시에 합격했다며 생각보다 쉽고, 요즘은 많이 뽑는다며 해보라고 권해 주었습니다. 그 전 해에 합격했던 친구가 공부하던 책과 노트로 공부했다며 그걸 제게 주면서요. 그걸 받고 얼떨결에 시작한 공부가 운이 억세게 좋아 2001년 임용고시에 합격했습니다. 지금 안양에서 근무하는 친구 양혜화 선생님과 선배인 강경화 선생님이 제가 역사교사가 될 수 있게 한 은인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정말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네요.
지금도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공부하던 때가...... 어찌어찌 전세금 날려 눈물을 머금고, 아이를 떼어놓고 밤 12시까지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워드 자격증 따려고 처음으로 컴퓨터를 만지면서 당황했던 그 때가 그립네요^^
14. 현재 교사 생활은 만족하시나요?
네, 만족합니다. 남들보다 뒤늦게 시작해서인지 지금 20년차인데도 여전히 학교 가는 게 즐겁고 아이들도 이쁘고 수업도 그다지 힘들지 않고 제가 교사로서 사는데 정말 다행인 것 같습니다. 요즘은 체력이 예전만 못해 학교에서 일을 많이 하거나 외부 활동이 많으면 이따금 집에서 아무 것도 못하고 퍼져있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교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물어보면 저는 제가 늦바람이 나서 그런 거라고 말을 하고는 합니다. 10년 늦게 교사를 한 게 안타까워서 그런 것 같다고도 말하고요. 사실 제 나이에 이렇게 안정적으로 일하며 보람도 느끼면서 월급도 또박또박 받을 수 있다는 게 참 감사할 뿐입니다.
15. 선생님은 온화하시고 친화감이 있으셔서 학생들과도 잘 지내며 엄마 같은 역할을 하실 것 같은데 어떠세요? 아이들과 함께하는 학교생활 이야기 좀 들려주시죠?
교사의 상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는 교사는 아이들에게 학교에서의 엄마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처음 학교가 워낙 가정환경이 열악하고 돌봄이 필요한 학생들이 많은 학교여서 하나하나 챙기고 케어해야 하는 역할을 많이 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학급에서는 단합대회나 학급야영 등 추억을 많이 쌓을 수 있는 활동과 친구들과의 관계를 신경 써서 이 아이들이 나중에 힘들 때 학창시절을 생각하면서 힘을 얻는 추억을 쌓게 하고, 살면서 꼭 필요한 친구와 선생님을 만들어주려고 합니다.
수업에서는 전국의 다른 역사 선생님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제대로 된 역사의식을 심어주려고 하고 있고, 최소한 제게 배운 학생들에게는 역사시간을 떠올리면 즐거운 시간이었다, 역사를 떠올리면 쉽고 만만한(?) 과목으로 만들기 위해서 다양한 장치들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의도한 만큼 되어왔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도 학교에서 힘든 일은 있지요. 스트레스 관리 어떻게 하시나요?
학생들이 저를 힘들게 하는 건 없는 것 같아요. 순간순간 화나거나 이해가 안 될 때는 있지만, 아이들이니까 그렇다고 생각하면서 조금 기다려주면서 해결하면 되니까 아이들로부터의 스트레스는 없거나 그 때 그 때 풀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저를 힘들게 하는 것은 불합리한 구조를 그냥 내버려두려고 하거나 상식적이지 않은 걸 강요하거나, 좋은 게 좋은 거다 그냥 넘어가자고 얘기하거나, 교사들이 모든 문제를 아이들이 문제라고 얘기하거나, 자기 이익에만 신경 쓰거나, 학생들에게 폭력적인 언어를 구사하거나 등 관리자나 교사들에게서 가끔 나타나는 학교문화인 것 같습니다. 그럴 때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지만 안 될 때는 스트레스를 받곤 합니다. 다만 그것 또한 제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은 해결하고,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살기에 그 또한 그다지 큰 스트레스는 아닙니다.
스트레스 관리는 사람들과 만나서 맛있는 거 먹고, 얘기하면서 해결합니다. 오히려 스트레스는 제 개인적인 성격 때문에 받는 편입니다. 사실 운동을 하면서 살도 빼고 건강관리를 해야 하는데 그걸 못하는 저를 보면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17. 경기도에서 근무하신 이후에 주로 휴전선 근처 학교에서 주로 근무하시는 것 같은데, 그러다 보면 아무래도 통일 교육에 더 힘쓰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통일 교육 어떻게 하고 계시나요?
파주 적성종고를 시작으로 문산중, 금촌고, 해솔중, 지금의 교하중까지 파주에서만 20년째 근무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일산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첫 학교에서의 경험이 나라도 이 열악한- 지금은 신도시도 세워지고 해서 그렇지 않은 학교도 많지만- 파주에서 저 아이들의 좋은 선생님이 되어야겠다, 고양시에는 제 기준으로 좋은 선생님들이 많이 계시기에 파주에서 조금만 열심히 해도 좋은 선생님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계속 파주에 근무했던 것 같습니다. 또한 제가 대학 때 부터 이 땅의 가장 큰 모순은 분단 모순이라고 생각하면서 통일운동을 중요하게 생각했었는데 말씀하신대로 파주는 통일교육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지역이었기에 더더욱 파주에서의 근무를 좋아했습니다. 통일체험반이라는 동아리를 만들고, 지역의 민통선 지역이나 통일관련 지역을 답사하고, 역사수업이나 창체수업에서도 통일관련 수업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파주혁신교육지구의 중점 사업인 ‘DMZ를 활용한 평화 통일 교육’을 학교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18. 교단에서 아이들을 대하며 늘 되새기는 문구 같은 것은 있나요? 또한 어떤 교사로 자리매김하고 싶은가요?
저는 초임 교사 시절에는 공동체성을 가장 많이 아이들에게 강조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니 뭐든지 모두 함께 해야 한다고 주로 강조했던 것 같습니다. 그 자체가 틀린 건 아니지만 요즘은 공동체도 중요하지만 아이들 그 자체로서 하나하나의 인생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엔 숲 전체를 봤다면 요즘은 날씨 맑은 날 숲을 보면 보이듯이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가 모여서 만들어진 숲을 보려고 하는 편입니다.
아이들 개개인의 특성을 이해하고 그 아이를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으면서, 아이들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면서 앞으로의 인생을 안내해주는 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배추를 끈으로 묶어주지만 최대한 느슨하게 묶어서 크게 키우는 농부처럼, 양들이 울타리를 넘어가지 않게 지켜보지만 최대한 울타리를 넓게 쳐서 양들이 마음껏 뛰어놀게 해주는 목동처럼 그런 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19. 인터뷰를 하다 보니, 꽤나 시간이 흘렀네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지금까지 인터뷰를 하시는 선생님들께는 주로 마지막 질문을 ‘현재 계획하고 있는 일이나 소망이 무엇인가?’로 묻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회장님께는 좀 색다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으로서 회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나 당부가 있을까요?
전국역사교사모임 선생님들~ 감사합니다. 모임이 이렇게 크고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회비 내주시고, 많은 행사에 참여해주시고, 묵묵히 지지해주시고 지켜봐주셔서 고맙습니다. 특히 능력이 일천한 저를 매번 잘한다고 격려해주셔서 정말 너무 감사드립니다.
선생님들의 관심과 참여가 앞으로도 우리 전국역사교사모임이 튼튼하고 명실상부한 교과모임의 모범으로, 우리나라 역사교육계의 최대 영향력이 있는 조직으로 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모임이 있는 곳에 선생님들이 계시리라 믿으며 굳건히 앞날을 헤쳐 나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절친 교사 조정아가 본 ‘백옥진’
‘만인의 연인’, ‘팜므파탈’, ‘슈퍼우먼 회장님’... 그녀에게는 늘 많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최근에 모 교사는 그녀를 ‘몽양 백옥진’이라 불렀다. 한 번만 만나도 넋 놓고 바라보게 만드는 유쾌한 입담의 소유자인 옥진 샘과 함께 있으면 항상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인간 자석’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사람을 끌어당기는 이 분은 도대체 뭐하는 분이지? 2004년 인천 여름 자주연수 뒷풀이 자리에서 옥진 샘을 처음 만난 나의 첫 인상이었다.
그렇게 고양파주 지역 교사라는 끈으로 시작된 인연이 어느덧 17년이 되었다. 옥진 샘과 함께 2006년부터 고양파주 역사교사모임을 만들고 2012년 여름 자주연수를 준비했던 시간은 함께 만들어가는 즐거움을 알게 해준 가슴 벅찬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시절 생긴 끈끈한 동지애 때문에 2018년 전국회장을 결의하셨을 때에도 올해 유임을 하시기로 하셨을 때도 망설임 없이 집행부로 함께 하기로 하였다. 비사범계 출신으로 비빌 곳 없이 출발하였던 나에게 누구보다 옥진 샘과 함께 할 수 있었던 시간이 많았던 것은 교직생활과 인생에 있어 큰 행운이었다. 이제는 전국 회장이라는 너무 큰 짐을 지고 있는 그녀지만 내게 옥진 샘은 항상 ‘닮고 싶은 역사교사’이자 ‘인생 선배’이다. 학생들과 즐거운 수업을 하고자 끊임없이 고민하는 모습, 학생들을 대하는 변하지 않는 열정을 보며 나도 저런 역사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었던 사람, 내가 무언가 상의하고 싶을 때, 투덜거리고 싶을 때, 자신이 없을 때 항상 처음 떠올리고 찾게 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되돌아보니 내가 어떤 상황이든 무슨 말을 하든 항상 지지해주고 내가 가진 능력 보다 나를 더 격려해주었던 사람이 옥진 샘이었기 때문에 교직생활이 항상 든든했고 고마웠다. 이런 고마움은 옥진 샘을 만났던 사람이라면 공통적으로 갖게 되는 생각이 아닐까? 옥진 샘의 사람에 대한 편견 없는 애정과 믿음으로 따뜻함과 든든함을 느꼈던 사람들, 그녀가 가진 역사교육 공동체에 대한 헌신과 고민에 대한 화답하는 사람들이 전국역사교사모임 내에 가득하다. 전국역사교사모임의 일이라면 도대체 NO!를 몰라 어쩔 땐 무모하고 바보 같은 사람, 아마 지금도 자신을 돌보는 것보다 전화로 몸으로 전국을 누비며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있는 살신성인의 조직가, 회장 유임이라는 마음의 빚을 져 너무도 미안한 사람, 그래서 나를, 우리를 또 다시 일으켜 세우는 사람. 그녀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대체불가능한 사람’.
제발 그 놈의 책임감 좀 내려놓아요... 샘 건강 좀 챙기셔야죠... 미안해서 샘 가족을 볼 수가 없어요.. 오늘은 좀 쉬셔야 할 텐데요.. 잠은 좀 주무셨어요? 못한다고 하세요... 잔소리처럼 늘 얘기하지만 마음의 소리는 ‘짐을 덜어주고 픈 사람’입니다. 샘! 미안하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