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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의 오후 Sep 18. 2019

현혹되지 않을 권리

얼마 전 회사 워크숍으로 브랜딩 이론 수업을 들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브랜딩 이론부터 널리 사용되고 있는 브랜딩 툴, 최근 기업들의 브랜딩 흐름, 성공적으로 불릴만한 브랜딩 사례까지 들을 수 있었다. 


브랜딩이란 고객을 360도 모든 방향에서, 가능한 모든 감각을 통해 일관된 경험을 하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브랜딩이 잘 되면 고객들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기업의 의도대로 경험하게 되고 이는 곧 기업의 신뢰도와 인지도를 높여 매출을 올리며, 더 나아가서는 '빠' 이른바 마니아가 된다. 요즘엔 이런 '마니아'들이 각종 SNS에서 기업의 홍보 역할을 톡톡히 하면서 기업은 더 체계적이고 디테일하게 '마니아'들을 관리하고 소통한다.


나의 주 업무인 시각디자인 분야도 브랜딩의 개념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모든 비즈니스는 브랜딩이다'할 정도로 브랜드 개념이 널리 일반화되어 있어서 기업들 뿐만 아니라 중소 상공인, 개인까지도 브랜드 관리를 하는 '브랜드 시대'다. 특히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기업들은 더욱 고객과 접점이 되는 환경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관리한다.


잘 된 브랜딩의 사례들을 보면 내가 왜 그 상품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내가 왜 그 기업에 대해 호의적으로 느끼게 되었는지 이해된다. '아 그래서 그렇게 된 거구나, 그 브랜드는 그걸 노린 거였군'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되면서 신기하고 재밌기도 하면서 그렇게 브랜드를 설계한 전문가들이 참 대단해 보인다. 세상에는 머리 좋고 똑똑한 사람들이 참 많고 그 똑똑한 사람들이 대단한 일들을 하는구나 싶다. 하지만 한편으론 '나의 정신 줄을 저렇게 관리하고 있었군' 하는 왠지 모를 찝찝함이 올라오면서 브랜드를 고민하던 생산자 입장에서 소비자 입장으로 마음의 추가 살짝 기운다.


'현혹되지 않을 권리는 없는 건가?'

'그들의 의도대로 움직여야 하는가?'

'내 욕망을 강요당해야 하는가?'


브랜딩의 최종 목표는 결국엔 고객의 행복이라고 한다. 기업도 좋고 고객도 좋고 좋은 게 좋은 거니까... 하지만 그들의 지향점은 재화를 소유하고 소비할 능력이 있는 고객을 향해 있겠지. 그래서 소비할 능력이 없는 사람도 욕망하게 되고 결국엔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이 되어버리는 마법이 일어나는 거겠지. 그걸 갖지 못하면 나는 점점 불행한 사람으로 느껴지는 거겠지.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는 게 당연하고, 이윤을 가져다주는 고객을 만족시키는 일이 너무도 당연한데... 난 왜??? 그게 싫으면 속세를 떠나 자연인이나 되던가. 남들 할 만큼 다 누리고 살면서 더군다나 관련 업계에 있는 사람이...


이때쯤 남편이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당신은 돈 많이 버는 건 틀렸어. 일단 사고가 돈을 버는 사고가 아니야'




지금은 너무 익숙하지만 처음 라디오를 들었을 때 노래 두서너 곡마다 반복되는 광고로 당황한 적이 있었다. 프로그램의 엔딩곡은 곡 소개가 무색할 만큼 1분 듣기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주객이 전도된 느낌.


막내 7살 무렵, 막 한글을 읽기 시작하면서 동네 전단지를 한 장 들고 왔다. 동네 마트에서 나눠주는 전단지였는데, '우리 동네 큰 잔치! 오시는 분들께 큰 선물을 드립니다' 하는 광고 문구를 읽고서 잔치에 가자고 졸라댄 적이 있었다. 딱 봐도 낚시질하는 과대광고였는데, 어떻게 아이에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이런 거 다 뻥이거나 거짓말이라고, 이런 거 믿지 말라고 하자니 아이에게 세상과 타인에 대한 불신만 가르치는 것 같아서 찝찝했다. 이제는 이런 광고가 너무나 많아서 우리 아이조차도 믿지 않는다. 


시사주간지나 잡지에는 시선이 먼저 가는 지면마다 광고가 실려있고 기사인 줄 알고 읽은 면이 광고였다거나, 내용과 상관없는 자극적인 제목의 뉴스들에 걸려든 적은 수도 없이 많다. 손을 갔다 대기만 해도 튀어나오는 광고 때문에 인터넷 뉴스를 거의 보지 않게 된다. 광고업계에선 새로운 광고기법이니 뭐니 하겠지만, 난 이런 상황이 불편하다. 이제는 사회가 너무 대놓고 일상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뭐든 누구든 믿지 말라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고...'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왜 이런 비상식적인 상황이 일상화된건지... 이렇게 이야기하고 보니 '우린 왜 작은 것에 분노하는가'라는 말도 떠오르고 시시콜콜 불평만 늘어놓는 꼰대가 된 거 같다. 정말 자연인이 되어야 하나...


처음엔 불편했던 것들이 이제는 당연한 것처럼 느껴진다. 언제부턴가 중요한 것들을 자본과 기업들에게 내어주면서 이제는 그 개념도 모호해진 것 같다. 물론 기업이 우리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나와 가족의 직장이기도 하지만, 성장과 효율이 최상의 가치가 되어버리면서 돈을 벌 수만 있다면 뭐든 다 내줄 수 있는 몸과 영혼을 갖게 되었다. 요즘에서야 조금씩 공공, 공익의 개념이 나오고 있지만, 이미 많은 부분을 내어준 마당에 다시 공공의 것으로 되찾기에는 너무 많은 사회적 비용이 들지 않을까.


시각적, 물리적 그리고 화학적으로 잘못되어 가고 있는 환경 속에서 건축가, 산업 디자이너, 기획자 등이 인류를 위해 취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최선의 행동은 전적으로 그들의 작업을 중단하는 일이다. 어떠한 오염이든 최소한 일부분이라도 디자이너들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나는 좀 더 긍정적인 시각을 취했다. 내가 보기에 우리는 작업을 중단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 디자인은 젊은이들이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참여하는 한 방식이 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빅터 파파넥 < 인간을 위한 디자인> 초판 서문, 1963~1971


디자인 일을 하면서 가끔 이렇게 실존적인 고민에 직면한다. 내가 하는 일이 쓰레기를 만들어 내는 일은 아닐까, 사탕발림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건 아닐까. 정말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일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하지만 대부분 고민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다.


나는 정치와 경제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기계에서 소외된 노인을 위한 은행 창구가 줄어들지 않았으면 좋겠고, 나조차도 모두 헤아릴 수 없는 비밀번호를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고 나의 개인정보가 널리 팔려 다니는 공공정보가 되는 일이 관리 못한 나의 책임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깨알같이 알아볼 수도 없는 약관으로 모두가 속아 넘어가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고 이것만은 모두의 것이니 아무리 돈을 많이 준대도 넘길 수 없다는 공공재들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처럼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존엄성에 칼을 들이대지 않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그러면 돈 많은 기업들의 끼까뻔쩍한 브랜딩에도 별로 삐딱해지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번호 숫자도 화면속 점도 아닙니다.
난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난 굽실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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