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고 만든 두 여자의 이야기.
우리의 꿈은 크리에이터(Creator)였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나와 내 동업자. 우리는 광고동아리에서 만났다. 광고인을 꿈꾸는 모든 대학생들이 그러하듯, 여러 공모전을 하면서 밤샘 작업을 하고 연애도 하고 울고 웃다가 졸업시즌이 되어 '꿈의 직장'이라고 꼽히는 굴지의 홍보대행사에 취업도 했다. 홍보, 광고, 온라인 마케팅, 컨설팅, 캠페인 등을 기획/운영 하다가 나와서 새로운 회사를 차렸다.
왜 그랬냐고?
이유는 단순하다. 무료하고 발전이 없었다. 이직도 생각 안 했던 건 아니다. 그당시 나는 3년차. 대행사 직원들은 통상 3년차부터 몸값에 프리미엄이 붙기 시작한다. 구인공고를 올리지 않아도 주변에서 이직 제의가 꽤 들어왔던 상태. 그런데 이직은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었다. 이직을 해도 무료하고, 따분한 일상은 금방 돌아올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직을 해도 지금과 달라지진 않을 것 같았다. 칼퇴근 시간에 맞추어 어학학원을 등록하고, 주말에 캘리그라피를 배우며 자기계발을 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발전'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본질에 맞추어 조금씩 생각을 발전시켰다.
나는 왜 만족하지 못했는가
일과 중, 회의 시간이 70% 이상이었다. 실제로 내가 업무에 집중하는 시간은 30%도 안 될 것이다. 회의를 하면 좋은 아이디어도 나왔지만, 대부분 처음 말한 아이디어가 채택됐다. 시간을 단축하고자 팀원들끼리 먼저 모여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상사를 부르기도 했는데, 상사를 설득하는 과정이 추가되어 회의 시간은 더 늘어난 결과를 초래했다.
그렇게 회의를 하고 나면, 상사는 자신의 선택을 마치고 퇴근을 한다. 그럼 남아있는 직원은 회의 시간동안 하지 못했던 업무를 그때부터 시작한다. 대행사 다니는 직원이 야근이 많은 이유기도 하달까.
"일이 많아?"
"아뇨. 제가 다 하지 못해서요"
상사는 이 상황을 직원의 역량부족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있다. 그치만, 대개 이런 경우는 상사가 시간 조율을 잘 못했거나, 직급과 역할에 따른 R&R(Role and Responsibility)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팀원의 업무량을 제대로 파악하고 정확한 시간을 할당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이다. 야근을 하지 않아도 됐는데 불필요한 커뮤니케이션 때문에 항상 24시간이 모자랐다.
조직의 규모가 커지면 자율성이 사라지게 된다. 절차도 많아진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 하고싶은 일을 선택할 자유가 없었다. 작은 대행사에서는 자율성이 있는 편이다. (그래서 일에 대한 욕심이 있는 사람에게 작은 대행사를 추천한다. 반대로 체계와 절차를 배우고 싶다면 큰 대행사를 추천한다.) 그러다보니 클라이언트를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구조가 된다.
나는 2년, 1년 두 클라이언트를 고정적으로 맡았었다. 다른 클라이언트의 업무도 경험하고 싶었지만, 회사는 익숙해진 AE를 포기하고 굳이 다른 사람을 넣을 이유를 찾지 못했다. 최대한 회사 내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노력하고 임원, 선배들과 많은 이야기도 나누어봤지만, 사원급인 AE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순간부터 아무리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나와도 스스로 필터링하게 됐다. 클라이언트의 특성에 맞게 자체 검열하게 되고 상사를 설득 하는 것이 지치기 시작했다. 1년차 때에는 들판에서 뛰던 개구리였다면, 3년차 때에는 서서히 끓는 냄비 솥에 있는 개구리처럼 살았다.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
그래도 여전히, 홍보 / 광고일은 싫지 않았다.
불만족스러운 부분을 정리하니 원하는 부분이 명확해졌다. 효율적인 시간, 야근 없는 삶, 보장된 자율성, 도전정신을 발휘 할 수 있는 곳, 그리고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까지. 이런 조건이면 기쁘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나와 동업자는 밤마다 우리가 원하는 회사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고, 새로운 회사를 차리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