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요르드에 위치한 작은 동화같은 마을, 세이디스피요르드
“이건 꿈이야.”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에일스타디르에서 차로 30분 정도 가면 빙하가 쓸고 간 길고 좁은피오르드에 동화 같이 마을이 나타난다. 세이디스피요로드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큰 항구가 있는, 작은 마을. 700명도 안되는 인구로 알록달록 예쁘게 살아가고 있다. 처음부터 내 상상 속, 아이슬란드 마을은 한결같이 이곳이었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시원하게 스케이드보드를 내리 꽂던 길로 유명하다. 월터의 그 길을 드디어 만났다. 피오르드 협곡이 마주하고, 지리산 노고단처럼 구불구불한 길에 구름이살짝 서려있다. 영화와는 달리, 절경 포인트에서 중국인 예비부부가 웨딩사진을 찍고 있었다. 스튜디오 직원으로 보이는 스텝들도 있었다. 얼마 전에 찍었던 나의 웨딩 사진이 떠올랐다.
나와 남편은 결혼식에돈을 쓰지 않기로 했다. 웨딩 사진은 협찬으로, 빈티지 드레스대여비와 메이크업 비용 정도로 총 16만원 선에서 촬영을 할 수 있었다. 훗날 나의 아이에게 “아가야, 너의엄마와 아빠의 젊은 시절은 이랬단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진을 찍고 싶었다. 가장 우리 답게 말이다. 그래서 6만원짜리 빈티지 드레스에 서울숲에서 벛꽃이 흩날리던 날을 배경으로 우리는 결혼을 약속했다.
한편으로는 피오르드를 배경으로 웨딩사진을 찍고 있는 저 커플이 부럽기도 했다. 시간과 비용에 쫓겨 남편은 아이슬란드에 같이 오지 못했다. 저들처럼 아이슬란드에 웨딩 촬영을 오려면 얼마의 비용이 필요할까. 돈, 돈, 돈! 돈생각만 하면 설렘이 걱정으로 뒤덮였다. 여행은 돈이 문제가 아니라마음 먹는게 중요한 것 같다고 마음을 고쳐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박탈감이 뒤덮어 지금의 행복을 삼켜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남자친구가 남편이 되고, 그남편과 아이를 낳으면 다시 이곳에 돌아와 가족사진이라도 찍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때의 나는 제법 팔에근육이 붙어 한 손으로 아이를 가방처럼 드는 아줌마였으면 좋겠다. 남편은 턱수염이 덥수룩하고 배도 제법나온 아저씨가 됐으면 좋겠다. 기분 좋은 상념에 빠져있을 때쯤 마을이 나왔다.
오래된 목조 건물들이 마을 입구부터 엽서에서 튀어나온 것 같이 맞이하고 있다. 이 집들은 놀랍게도 19세기에 노르웨이에서 수입한 완성품 목조 주택이라고 한다. 이 월터가아이에게 스케이트보드를 빌리던 곳도 이곳. 입구 앞에 있는 마트 주차장에 차를 대고 잠시 동네에 머무르기로했다. 마을이 주는 맑은 기운이 영화의 그것과 같았다.
마을 한 가운데서 제대로북유럽 포스를 뿜고 있는 인테리어 편집샵을 만났다. 메인 컬러부터 범상치 않다. 아이스블루. 북유럽인들의 과감한 컬러선택은 언제나 놀랍다. 이곳에서는 한국에서 볼 수 없는 개성 넘치는 제품들을 팔고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북유럽 시그니쳐 니트 쿠션이 곳곳에 널려있다. 아, 여긴 북유럽. 북유럽이구나!!!! 느꼈던 인테리어 시뮬레이션이었다.
선반, 헤드셋, 블루투스 스피커, 무심하게 찍은듯한 사진을 출력해서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음악을 들으면 고통도 사라진다는 문구가 가슴에 와닿았다.
니트로 돌을 싸는 것 만으로도 인테리어 소품이 되는 걸 알았고, 아이슬란드의돌 모양을 한 휴대용 외장 배터리, 북유럽의 인테리어를 나타내는 아늑한 거실 인테리어 소품들은 ‘내가 북유럽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신 없이 구경하다 보면 호수를 담은 작은 창문이 나온다.
만약 이곳이 한국이라면 저기 저 앞에 보이는 예쁜 교회 옆에 분명 라이브 카페가 있겠지. 그 옆에는 능이백숙집, 그 뒤로는 모텔이 있을 것이고.
편집샵 맞은 편에 카페 L’ara가 있다. 이런충만한 여유로움에는 커피가 필요했다. 게이시르 몰에서 마신 일리 커피 다음으로 만난 두번째 커피. 언니들과 함께 각자의 산책을 마치고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각자의취향껏 커피를 고르고 가장 빛이 잘 드는 구석으로 자리를 잡았다. 잠시 머무르지만, 조금이라도 오래 세이디스피요르드 마을을 바라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카페 L’ara는이 마을에 잘 어울리는 카페다운 카페다. 1층 한 켠에서는 커피, 음료등을 제조하는 키친 바가 있고, 나머지는 테이블과 의자가 있는 평범한 카페 구조로 이뤄져 있다. 그러나 한쪽 벽에 걸려 있는 곰의 털가죽, 오래된 낡은 지도, 창밖으로 보이는 세이디스피요르드 마을 전경은 이 마을만의 정취를 한껏 담아낸다. 손님은 대부분 외국인. 그래서 키친 바에는 취향껏 커피에 첨가할 수 있는 설탕, 소금, 미니 버터 등이 있다. 버터는물론 아이슬란드만 있는 SMOR버터다. 나는 커피에 버터를넣어 마시는 걸 좋아하는데, 버터가 있다는 걸 나오는 길에 알았다. 담백한맛이 일품인 스모어버터를 넣어 커피를 먹으면 꽤 풍부한 맛이 났을 것 같다.
벌써 오후 5시. 언니들과 이 카페에서 무려 2시간이나 수다를 떨어버렸다. 초조해졌따. 서울에서 오후 5시는여유로운시간이지만 아이슬란드 여행자에게 오후 5시는 위협적인 시간이다. 깜빡하면야간운전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겨울 여행자는 ‘당연히’ 야간 운전을 해야하는 시간이다.). 어제 겪었던 끔찍한 야간운전은 절대 하지 않으리라. 구글 지도에 따르면목적지는 3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다. 목적지는 숙소, 그냥 달려서 도착하면 뻗기만 하면 된다. 뻗기만 하면 된다. 뻗기만 하면 된다. 세 번 되뇌이고 이 작고 예쁜 마을을 뒤로 했다. 다시 아이슬란드에 오게 된다면, 이곳에서 커피 한 잔 시키고 멍때리면서 며칠 동안 이 마을을 마음껏 흡수한 채 머물고 싶다.
다시 아이슬란드를 간다면 이 마을에 꼭 하루는 묵을 예정이다. 이곳에서 숨쉬는 것처럼 소모했던 예쁜 시간들이 무척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