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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칼렛 Aug 28. 2022

8. 가족치료

나는 알코올 중독자의 아내였다.

남편은 아이들에게 지극정성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도서관에 태워다 주고 점심시간에 맞춰 아이들에게 간식사 가거나 집에서 내가 싸준 도시락을 갖고 도서관 옆 근린공원에서 먹는 것을 좋아했다.


또 여건이 허락하는 날은 아이들을 칠성통에 있는 승진 반점으로 데려갔다. 어느 날 내가 갔더니 여자 사장님이 말했다.

"아휴. 어떤 여자는 저렇게나 자상한 남편이랑 사나 보나 궁금했어요. 어쩌면 저렇게 자상한 아빠가 있는지. 짜장면 시키면 애들 다 먹이고 아빠 먹어요. 내가 오죽하면 애들 거 먼저 해주고 우리 사장님 꺼 준다니까. 어쩌면 저런 남편 만나 집니까?"

남편은 그렇게 자상한 사람이었다. 주말엔 아이들을 데리고 오름을 가고 사진을 찍어 주었다. 서점에 데리고 가서 책을 사주고 읽어주고..........


요즘이야 남녀가 가사를 분담하는 일상화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남자들은 꼼짝도 안 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남편은 곧잘 요리도 해주고 내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줄 때는 커피도 타 주었다. 내 친구가 오면 커피는 물론 과자  봉지라도 사다 주면서 놀다 가라고 했다. 술에 점령당하기 전까지 남편은 선하고 착하고 똑똑한 사람이었다.

         꽃보다 귀한, 보석보다 소중한 성현 & 수현

장난기 가득하고 마음 따뜻한 신사




그러나 사실 그때도 남편에게서는 늘 술냄새가 났다. 음주운전이 습관화되어 있었다. 음주운전에 걸려 무면허로 차를 끌고 다니고 접촉사고가 나면 옴팍 뒤집어쓰는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내가 괴로움을 잊기 위해 선택한 것은 글을 쓰고 책을 읽고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일에 매진했다. 남편이 사고를 칠 때마다 폭풍 같은 분노가 일었고 그 분노로 나는 먹지 못하고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알코올 중독자 가족의 자조모임인 알아넌을 국내에 도입한 허근 신부님이 제주에 강연차 내려오신 적이 있었다.

허근 신부님은 마르타 수녀님의 대부님이라고 했다. 마르타 수녀님을 응원하기 위해 가죄 캠프가 제주에서 있었다. 지금은 세월이 지나서 다 기억나진 않지만 알코올 중독 부부 6명이 결혼식을 재현하고 혼배성사라는 걸 봤다. 다른 남편들은 모두 말쑥하게 나타났는데 남편만 술에 취해서 나타나지 못했다. 어찌어찌 수녀님이랑 성당분들이 차에 태워왔지만 도저히 행사에 참여할 수 없었다.


다들 쌍쌍인데 나 혼자 걸어가야 했다. 주변의 자매님들이 큰애에게 아빠의 자리에 서라고 아우성이었다. 그때 허 신부님이 제지했다. 혼자서 걸어오라고 했다. 자식에게 남편의 역할을 기대하지 말고 혼자서 당당히 걸어오라고 했다. 나는 혼자서 걸어가는 내내 울었다. 거기에 있는 다른 5쌍의 부부도, 그 행사에 참여한 다른 신도들도 다 울었다. 여기저기서 휘청이며 걸어가는 나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신부님 앞에 섰을 때 눈물이 비 오듯 쏟아지고 흐느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내 나이 마흔이 되던 해였던 것 같다.


혼배성사가 끝나고 가족치유 프로그램으로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는 순서가 있었다. 일종의 미술치료였던 것 같다. 가족을 그려보라고 했던가 그 수업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용하가 그린 그림이 단상에 내걸리고  신부님이 용하에게 그림을 설명해 보라고 했다. 용하는 망설이지도 않고 떨지도 않고 그림을 설명했다.


-여기 이 큰 나무는 엄마예요. 그리고 이 딱딱 구리는 아빠예요. 딱따구리가 나무를 파먹어서 구멍이 났고요. 여기 두 마리 새들은 큰누나 작은누나예요. 새들은 나무가 즐거우라고 노래를 하고 있고 저는 코알라예요. 엄마가 쓰러질까 봐 제가 엄마를 꼭 붙잡고 있어요.-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은 감탄하며 눈물을 훔쳤다. 크리스티나 정, 마리아 조, 세실리아 김, 다른 자매님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자매님은 자식들 믿고 살아집니다. 세상에나. 아이고 세상에나.., "

신부님은 용하에게 말했다.

 "엄마는 절대로 쓰러지지 않아. 엄마는 강하단다. 너도 걱정하지 말고 누나들처럼 엄마에게 기쁨이 되도록 하렴."

그때 용하는 겨우 초등학교 1학년쯤이었던 것 같다.


나는 내가 두배, 세배로 노력해서 아이들만큼은 상처 없이 키우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이 아이들도 조금씩 상처를 갖고 자라났다. 초등학교 1학년인 용하는 엄마가 쓰러질까 걱정이었다. 수현이는 어렸을 때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으로 상처를 입기를 거부했다. 성현이는 어릴 때 있는 힘껏 엄마의 동반자가 되어주었지만 정작 성인이 되어서는 녹다운되어 지금은 엄마와 적당한 거리두기를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딱따구리에게 쪼여 구멍이 난 나무로 그려진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남았을까?


찬란한 오월, 큰딸 성현이와 나는 정서적으로 불안한 모녀관계가 진행 중이었다. 내가 남편을 책임질 수 있었던 힘 두 가지를 뽑으라면 하나는 실손보험이었고 하나는 큰딸 성현이의 정서적 지지였다.

그러나 성현이가 9급 공무원이 되어 공무원으로서 적응하는 가운데 내가 난소암 수술을 받았다. 아마 그때 번아웃이 찾아온 것 같다. 암수술을 받은 엄마를 잘 보살피기보다는 오히려 멀리하는 듯한 기분을 받았다. 그리고 직장이 있는 서귀포로 독립을 해나갔다. 엄마를 위해서라면 뭐라도 해줄 것처럼 굴던... 아니 그렇게 해주었던 얘가 정서적 단절은 물론 어떨 땐 전화통화도 잘 연결되지 않았다. 그때의 불안감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래서 콘솔 상담소 원복연 교수님을 찾아가 상담을 받았다.

교수님은 "성현이는 성현 이대로 잘 지내고 엄마는 엄마대로 잘 지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네요."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우린 서로 너무 힘들었다. 성현이는 엄마가 성현이를 위로해주길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성현이에 대해 불안감을 키우기보다는 성현이가 좋아하는 작약꽃을 사다 심었다.

작약꽃은 성현이가 시집을 가게 된다면 부케를 하고 싶다는 꽃이었다.

나는 작약을 가꾸며 성현이에 대한 마음을 가꿔 가기로 했다.

그렇게 5월 6월 7월이 지나고 8월이 되어 미역국이 먹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가을 뭇국을 먹을 때나 오려나 했는데 그래도 8월 한여름 미역국을 먹겠다고 온 아이에게 소금에 절인 가지 볶음도 해 보내고 오징어 전도 부쳐서 싸 보냈다.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얼마 안 되어 마르타 수녀님이 찾아왔다. 수녀님을 그때 가족치료를 권했었다. 워낙 경황이 없었던 때라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가족치료를 받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가족체계가 무너지면 구성원들은 방어적 자세를 취하며 특히 장녀는 부모나 가족의 불화를 완충시키며 무마시키는 평화유지군 역할을 해내려 애쓴다는 것이다.


성현이는 많이 애썼을 것이다.

그리고 힘들었을 것이다.

끊임없이 사고를 쳐대는 아빠의 사고를 수습하느라 죽을힘을 내서 살아내는 엄마를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참 가여운 생각이 든다. 그동안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성현이에게 의존했다. 성현이는 나에게 딸이라기보다는 친구였다. 그러나 딸에게 친구 같은 엄마는 얼마나 버거웠을지 이제야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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