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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오 May 13. 2022

이 땅의 ‘나까무라 스미스’씨들에게



신구 권력의 교체기는 여러가지 소회를 남기기 마련이다. 양산사저에 입주한 문재인 전대통령이 KTX 울산역 앞에서 귀향신고를 했다. 그의 곁에는 얼마전 “문 대통령을 걸고 넘어지면 물어 버리겠다”고 막말을 뱉은 탁현민도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탁현민을 보면 스타일이 다른 장세동이 연상된다. 5공 청산으로 온나라가 서슬이 퍼럴 때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앞장서 나섰고, 용팔이 사건의 몸통으로 전두환이 지목되자 스스로 내 책임이라며 감옥행을 자처한 인물이 장세동이다. 그런 장세동은 출소한 뒤 연희동 전두환 자택을 찾아 “각하 휴가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두구두고 화제가 됐다. 권력의 정점에서 서성거리던 자들이 쉽게 태도를 돌변하는 요즘 세태와는 확연히 다른 인물들이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요 며칠 사이에 현대사와 획을 같이한 여러 인물들이 명운을 달리했다. 새로운 대통령이 용산시대를 열었고 지나간 대통령은 양산시대를 열었다. 용산은 용산대로 양산은 양산대로 붐비고 들썩였지만 오고 간 건 시대만이 아닌 듯 싶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라는 말로 후배들의 등짝을 두들기던 배우 강수연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고 을사오적보다 더 비굴한 유신시대의 ‘나까무라 스미스’들에게 오적의 싸늘한 붓끝으로 뒷통수를 후려친 김지하도 영면의 길을 떠났다. 오고 가는 시대의 모서리에서 스쳐 지나는 한 시대의 인물들을 떠올려 보노라니 참으로 우리네 삶은 조그맣고 또 조그맣기만 하다.




배우 강수연의 어록으로 기록된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는 논객 진중권이 동양대 교수직을 던지고 나오면서 뱉은 말로 유명세를 탔지만 세간에 회자된건 영화 때문이다. 한참 전이지만 희대의 흥행성적을 기록한 영화 ‘베테랑’의 명대사가 바로 이 문장이다. 형사 서도철(황정민 분)이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 분) 편에 선 동료 형사를 노려보며 툭 던진 대사는 이렇다. “너 돈 먹었지? 같은 식구라고 보자보자 하니까. 야,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어? 수갑차고 다니면서 가오 떨어질 짓 하지 말자.” ‘가오’는 일본말로 얼굴이라는 뜻이지만, 쉽게 풀면 자존심이다. 영화가 흥행하자 많은 이들이 이 말을 따라했지만 곧 잊혀졌고 한 시대의 획을 그은 배우의 죽음으로 부활했다.






정권이 바뀌면 가오가 없는 자들이 설치기 마련이다. 탁현민과 장세동과 달리 처세의 달인들이 유독 눈에 띠는 시기가 바로 정권 교체기다. 이런 부류를 두고 ‘나까무라 스미스’라는 삐뚤한 단어가 생겨났다. 바로 검수완박 분탕질 속에 재등장한 혼란의 시대에 떠돌던 어휘다. 이 단어를 소환한 이는 민주당의 검수완박 밀어붙이기에 첫 번째로 사표를 던진 이복현 서울북부지검 부장검사다. 그는 정권교체기 김오수의 갈지자 행보에 정면으로 침을 뱉었다. 그는 검찰 지휘부를 향해 ‘나까무라 스미스씨’라는 표현을 썼다. 일제강점기 일부 조선인이 ‘나까무라’로 창씨개명을 했다가 해방 이후 미 군정 시대엔 ‘스미스’로 이름을 바꾸며 기회주의적 행태를 보인 것을 빗댄 표현이다. 잠깐 그의 발언을 보자. <‘나까무라 스미스’씨도 우리의 직장동료이니 잘 지낼 수 있으면 원만히 지내고 싶습니다. 하지만, 과거 창씨개명 시절 행적에 대한 진솔한 반성과 사과 정도는 있어야 같은 구성원들에 대한 예의 아니겠습니까. ‘친절한 금자씨’는 좋아합니다만, ‘철면피 스미스씨’는 사절입니다.>





나까무라 스미스를 이야기 하다보니 현대소설 중 풍자의 백미였던 전광용의 꺼삐단리가 생각난다. 꺼비단리는 일제강점기부터 광복을 지나 1950년대에 이르는 한 사내의 삶을 그린 이야기다. 외과의사인 주인공 이인국은 일제강점기 제국대학에서 수재 이름을 날리다 평양에서 개업했다. 식민사회의 갑인 일본인과의 교제를 넓혀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았던 친일파다. 그런 그가 광복이 되자 친일파는 족쇄가 돼 감방에 갇힌다. 그때부터 나까무라는 변신술을 선보인다. 일제강점기 고등계 형사로부터 주워들은 수완으로 철저하게 묵비권을 행사하고 출소한 학생이 내던지고 간 노어회화 책을 밤을 새우며 독파해 러시아말을 익힌다. 새로운 갑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언어를 익히는 게 지름길 아닌가. 노어와 의술로 소련군 장교의 혹 수술을 미끼로 풀려난 나까무라 이인국은 출세가도를 달린다. 아뿔싸, 한국전쟁으로 우여곡절 끝에 서울에 남게되자 이번에는 미국 관리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고려청자를 선물상자에 포장한다. 그런 삶이 우리 현대사에 수없이 숨어 있는 나까무라 스미스씨들이다.





석열 정부가 출범했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한 문장으로 대통령에 오른 윤석열 대통령의 첫 공약 이행은 청와대 완전개방이었다. 새 대통령이 취임한 날 태극기를 손에 든 대한민국 국민들은 청와대 정문을 열어젖히고 본관부터 상춘재 영빈관과 인수문을 넘어가는 관저까지 구석구석을 누볐다. 어제까지 머물던 대통령이 떠나자마자 문을 열어젖히고 안방의 내실까지 기웃거리게 한 것을 치욕으로 느낀 이들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청와대 개방과 용산시대 출범에 삿대질을 했다. 나까무라 스미스보다 장세동 복제품 같은 충성맨들이 즐비한 구정권의 울타리는 튼튼해 보인다. 





정권이 바뀌자 각 지역에서도 권력 교체기의 영향으로 여기저기서 나까무라 스미스씨들이 기웃거린다는 풍문이 들린다. 권력이 바뀌면 으레 잡놈들이 판을 치기 마련이지만 생계형이 아니라 습관성 변절자들은 이번 기회에 일괄소탕할 특별법이라도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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