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이 끝없이 펼쳐진 광야에서 열두명의 청춘이 넷째 손가락을 잘랐다. 단지동맹이다. 대한국 의군 참모중장 안중근과 동지들이다. 3년 안에 이토 히로부미의 목을 따지 못하면 결연히 목숨을 끊겠노라며 잘라낸 손가락에서 쏟아진 피로 무명천에 대한독립을 새겼다. 1909년 10월 23일. 거사 사흘전, 안중근과 우덕순, 유동하는 이발소에서 머리를 다듬고, 하얼빈 공원을 돌며 원흉의 심장을 쏠 역사의 순간을 점검했다. 공원 인근 사진관에 들러 기념사진도 찍었다.
거사의 가장 큰 문제는 아무도 이토를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신문에 나온 흐릿한 이토의 얼굴과 하얼빈역 역무원 등에게서 전해들은 이토 일행의 열차 정보가 전부였다. 이토를 실은 증기기관차는 26일 오전 6시 하얼빈역 아래 채가구역을 통과해 9시쯤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확인한 안중근은 거사의 계획을 바꿨다. 행여 벌어질지 모르는 실패에 대비한 두 번째 계획이 필요했다. 결국 암살조를 2개조로 나눴다.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우덕순과 조도선은 채가구역에서 이토를 기다리기로 했다. 영화 '영웅’에서처럼 배우 김고은이 이토의 정부가 돼 만주순방 일정을 모스 무전으로 알려주는 일은 없었다. 영화에 나오는 김고은과 만둣집 점원 박진주는 윤제균 감독이 만든 픽션이다. 흐릿한 사진에 의지한채 거사에 나선 당일, 하얼빈역에서 이토의 도착을 기다리던 안중근은 누군가 부른 이토의 이름에 고개를 돌린 원흉을 향해 브라우닝 M1900으로 세발의 총탄을 명중시켰다.
계묘의 새날 심야의 시간에 영웅을 만났다. 평일 늦은 밤, 퇴근한 직장인들이 극장을 메웠고 14년째 안중근으로 살고 있는 배우 정성화의 광활한 고음이 새날 심야의 하늘에서 우레처럼 퍼졌다. 늦은밤 영화 영웅을 보러 간 것은 아침신문에 난 기사 때문이었다. 안중근 의사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 영화 '영웅’이 200만 관객 돌파를 목전에 둔 가운데, 일본 사회 SNS 상에서는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몰아가는 여론몰이가 한창이라는 내용이었다. 혐한이나 반한운동을 주도하는 일인들은 '안중근은 영웅이 아니라 테러리스트다’, '테러리스트를 영화화 한 한국’, '이 영화를 근거로 한국과의 국교단절해야 한다’라는 식의 선동적인 내용이 SNS에 도배되는 중이라고 기사는 전했다.
안중근 의사가 저격한 이토 히로부미는 누구인가. 인물사전에 이토는 '근대 일본 건설과 한국 병탄의 기초를 구축한 정치가’로 기록돼 있다. 일본의 근대 여명기인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에 활동한 이토는 무사 지위도 얻지 못한 하급 신분이었지만 출세를 위해 무슨 짓이든 마다하지 않은 처세술로 일본의 초대 수상까지 올랐다. 말 그대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45세에 초대 총리가 돼 일왕 아래 최고의 자리를 차지했고 왜곡된 역사의식과 국수주의로 선진 일본이 미개한 아시아를 흔들어 동양평화를 주도해야 한다고 목젖을 세운 장본인이었다. 구한말 기울어가던 나라의 운명이 이토의 손아귀에서 어떻게 구겨졌는지는 새삼 떠올리지 않아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바로 그 침략의 원흉 이토를 저격한 것을 두고 테러 운운하고 있는 일부 일본인은 안중근을 모른다. 그들이 테러리스트라고 지목한 안중근은 뼈 속까지 평화주의자였다. 동양평화를 위해 한중일이 동양평화회의를 구성하고 국제 분쟁지인 뤼순을 중립화해 동양평화회의 본부를 설치할 것을 구체적으로 제안한 장본인이 안중근이다. 지금의 유럽공동체(EU)와 같은 지역경제 공동체를 100년 전에 구상한 선각자였다. 실제로 안중근 의사를 존경한다는 일본 전 수상 하토야마는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을 발전시켜 ‘동아시아공동체’를 제안하기도 했다.
문제는 자신들의 역사를 조작하고 원죄의 뿌리를 덮어씌우려는 정치집단과 무도한 세력이다. 그 뿌리는 어쩌면 임진왜란 시기부터 조작된 일본의 역사서가 근거다. 혐한론자들의 교본과 같은 일본서기는 일본인들이 과거사 치매에 면죄부 역할을 담당해 왔다. 이토 히로부미 등 3류 사무라이들은 구한말 약육강식의 국제질서를 꿰뚫고 일본이 아시아 ‘살육의 시대’를 주도해야 한다고 믿었다. 일왕의 목숨을 끊은 메이지 쿠데타의 탄생이다. 이 시기야말로 일본에 있어 근대화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섬나라 일본의 ‘광기의 역사’가 시작된 세계사의 불행이기도 했다. 왜곡하고 도발하고 막말을 해도 한국의 반발쯤은 뭉개고 가면 그만이라는 식의 왜곡된 역사의식은 정한론의 뿌리이자 이토로 대표되는 국수주의자들의 골수이념이었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 이토를 심판한 안중근 의사가 마지막으로 보낸 5개월 간의 감옥 생활은 일인은 물론 러시아와 중국인, 그리고 서양의 언론인들에게 조선, 즉 대한제국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을 갖게 했다. 일본은 안 의사를 개인적 원한을 풀어내는 살인범으로 몰아갔지만 안 의사는 뤼순 법정에서 자신의 이토 저격이 한 개인의 범죄가 아니라 대한이 벌이고 있는 독립전쟁의 일환임을 강조하며 이토의 죄명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그 첫째가 미우라 등 3류 사무라이를 동원해 대한의 황후(명성황후)를 시해한 죄였고 둘째가 광무(고종)황제를 위협해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한 죄였다. 무고한 대한의 백성을 학살한 죄가 아홉번째고 대한의 백성들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만방에 거짓을 퍼뜨린 죄가 열한번째였다. 그리고 마지막 바로 이토와 그 패거리가 일본을 제국주의로 둔갑시키기 위해 1867년 일본 명치왕의 아비 효명 일왕을 살해한 죄까지 직시했다.
이토 저격의 이유를 열거한 안중근은 외쳤다. 열다섯의 죄명을 정면으로 바라보고도 나를 테러리스트라 말할 수 있는가. 이제 100년 세월을 넘어 우리가 일본에게 묻는다. 누가 죄인인가. 누가 죄인이란 말인가. 뤼순 재판정에서 사형이 언도된 날, 법정에 몰려온 조선인들이 떼창으로 전율하는 함성도 같은 물음이다. 누가 죄인인가. 누가 죄인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