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 주말마다 동해안을 걸었다. 태화강이 동해와 만나는 지점, 방어진으로 가는 길은 해파랑길 8코스다. 그 8코스의 초입을 숨가쁘게 오르면 울산대교와 마주한다. 염포산 전망대다. 여기에 서서 울산을 보면 참 오묘하다. 동쪽 무룡산부터 서쪽 문수산까지 한반도의 광활한 산자락이 동해로 뻗어가는 종착지다. 그 산세에 굽이친 다섯 자락의 강이 동해를 향해 내달리는 모습은 가히 비경이다. 그 모습이 아홉마리 용이다.
풍수로 보면 울산은 태백산맥이 남진하는 중에 험한 기를 벗어 버리고 천연의 요새를 만들고 있다. 청도 운문산으로 내려온 태백산맥이 한 줄기는 경주의 금오산을 만들고 남쪽으로 내려와 울산의 주산인 함월산을 만들었다. 무룡산은 울산의 좌청룡으로 천연의 항구인 울산만을 만들었고 운문산에서 정족산을 거쳐 문수산으로 이어진 맥은 울산의 백호가 되어 태화강 남쪽에서 울산을 감싸고 있다. 그 형상이 아홉 마리 용이 동해로 뻗어가는 기세로 구룡반취라는 이름을 얻었다. 아홉 마리 용이 주안상을 받아 들고 있는 모습이다. 해안가 울산공단은 청룡과 백호가 여러 겹으로 감싼 채 금빛 소반에 음식을 가득 차려놓은 모습이고 앞은 시원하게 터져 미래를 향한 기상을 엿볼 수 있는 땅이다.
울산대교를 지나면 화정천내봉수대를 만난다. 고려조부터 울산만의 관문을 지키던 봉수대 가운데 핵심이다. 조선조 정조 때 별장 1인이 봉졸 100명을 배치하여 바다로부터의 침략을 경계한 곳으로 봉수대로는 드물게 유구도 나왔지만 문화재청은 가치가 없다고 문화재 지정을 외면했다. 대부분 이런식이다. 개발 논리가 모든 것은 집어삼킨 울산에서 유적과 유물은 귀찮은 존재다. 드러나면 슬쩍 쳐다보다 뭉개라고 눈을 질끔 감는다. 그런 흔적이 사방에 널려 있다.
봉수(烽燧)는 근대적 통신수단이 발달되기 전까지는 중요한 국가적 통신수단이었다. 해발 120m 봉화산 정상에 위치한 천내봉수대는 울산만의 관문을 지키는 봉수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가리산(加里山)에서 봉수를 받아 남목(南木 : 현재 주전봉수)으로 전해주는 연변봉수다.
봉수대 기웃거리다 등성이를 휘청 내려가면 방어진과 만난다. 울산에서 방어진은 외딴섬 같은 존재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방어진 출장소가 동구로 승격한 이후에도 울산 동구는 늘 방어진으로 통했다. 지금도 여전히 동구는 방어진이고 방어진은 동구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 명칭에서 유추할 수 있지만 방어진은 전형적인 어촌이다. 질펀한 바다 냄새와 고기잡이배, 왁자한 어민들의 육감적인 말투가 어촌 풍경을 그려내는 곳이 방어진이다.
외딴섬 같은 방어진의 본모습은 속살을 들여다보면 완전히 달라진다. 하늘에서 바라본 방어진은 백두대간의 끝자락, 옹골찬 산세가 동해로 달려가는 활짝 펼쳐진 형상이다. 마치 영험한 대륙의 기운이 바다를 향해 위세를 떨치는 장엄한 모습이다. 그래서 방어진 일대는 천하절경이 즐비하다. 대륙의 옹골찬 기운이 동해로 뻗어나가는 끝자락에 대왕암 공원이 있고 살짝 돌아선 곳이 일산진이다. 지금은 세계 최대의 조선소가 들어섰지만 이 일대는 신라 천년의 경승지로 역대 왕들의 여름별장 같은 영험한 땅이었다. 그 끝자락이 슬도다. 가만히 파도소리에 몰입하면 갯바위 스치는 현의 소리가 거문고 한자락으로 되살아나는 해변이다.
방어진의 옛 지명은 '방어진'(防禦津)이었다. 왜구가 많이 출몰했던 동해안이기에 충분히 설득력 있는 지명이다. 실제로 방어진순환도로를 남북 종으로 가르는 길이 바로 봉수로다. 현재도 봉수대가 터를 포함해 두 개나 남아 있는 것만 보더라도 방어진이 국방의 요새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도 방어진이 관방 요해처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월이 흘러 방어가 먹음직스런 방어가 되고 그 방어가 어디서 온 방어인지를 모른채 출처없는 이름표가 소문처럼 떠다닌다.
울산동구향토사연구회에서는 1990년대 말부터 대왕암 일대에서 문무대제라는 제례의식을 하고 있다. 문무대제는 대왕암이 바로 문무대왕의 수중왕릉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동구 향토사연구회는 문무대왕 수중왕릉의 근거로 경주국립박물관에 보관된 문무왕의 비석 문헌을 든다. 비석 뒷면 비문에는 "경진에 수장하라"고 했는데 경진이 바로 고래 '경'자와 나루 '진'자를 쓴 방어진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울산 앞바다는 예로부터 고래바다 경해(鯨海)로 불렀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대왕암 공원에서 동해바다를 바라보면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오래 전부터 방어진 사람들은 대왕암과 그 주변을 그렇게 영험한 땅으로 여겼다.
대왕암공원을 옆으로 끼고 돌면 은빛을 드러내는 일산진이 나온다. 여기서 일산이라는 이름 역시 신라 때 이곳으로 유람 온 왕이 일산(日傘)을 펼쳐놓고 즐겼다는데서 비롯된 것인데, 뒤에 일산(日山)으로 변했다고 한다. 일산진 마을 앞바다에는 작은 바위섬이 있다. 민섬, 혹은 미인섬으로 불리는 이 섬은 신라 때 왕실에서 궁녀들을 거느리고 이곳에서 뱃놀이를 즐겼다는 데서 유래됐다. 그 모습이 마치 꽃놀이 하는 것 같다고 부르게 된 이름이 '화진'이다. 이 꽃놀이 하는 바닷가의 뜻을 가진 '꽃놀이 갯가'가 '고늘개'가 됐고 이것을 한자식으로 표기한 것이 '화진(花津)'이다. 원래 고늘개에는 마을이 있었으나 150여 년 현재 위치로 이주해 왔다. 그리고 이 고늘개 동쪽 바닷가에서 신라왕 일행이 춤추며 놀았던 곳을 '놀이창'이라고 한다.
땅 곳곳에 신라 왕실의 흔적이 남아 여전히 1,000년의 이야기를 실어나르는 곳, 방어진은 그래서 울산의 오래된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