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체 왜 태어났을까?
하나님은 어쩌자고 나를 이런 환경에서 태어나게 하셨을까?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얘기일까?
이런 고민을 수도 없이 했었다.
당시에 나는 내가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다고 생각했다.
한 번도 정상적으로 살아보지 못한 내가 멀쩡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 길고 지겨운 고통 속에서 삶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이 죽거나 말거나 나 살자고 다른 사람을 밀치고 앞서나가서 생존하는 내 모습이 정말 죽여버리고 싶도록 증오스럽고 싫었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이 죽건 말건 모른 척하는 내가 되느니 차라리 죽고 싶었다. 내가 죽어갈 때 모른 척하던 다른 모든 사람들이 너무나 야속하고 원망스러웠기 때문이다.
이기적이고 악한 사람을 볼 때, 나는 가슴 깊이 슬픔을 느끼고 눈물을 흘린다.
내가 그 사람의 입장이라면, 그렇게 살아가는 스스로가 너무나 싫어서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여겨질 정도로 비참할 것이기 때문이다.
악한 사람이 너무나 혐오스럽고 싫다가도, 연민을 느끼는 이유는 그렇게 비참하게 살아가는 그 사람의 악에 받친 영혼을 생각하면, 잔인한 공포 속에 살아가는 그 영혼이 너무나 안쓰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혼의 아픔은 내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감정적 공감과 위로와는 다른 것이다.
영혼의 문제는 어느 정도는 본인이 선택한 부분이 있고(그들은 대개 자신을 고집스럽게 합리화하며, 스스로의 정서에 푹 빠져 있다), 변화는 고통스럽기 때문에 서서히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는 힘을 잃지 않았다면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부끄러움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감정이다.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은 정말로 가망이 적다.).
영적인 것은 어떤 신비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본인이 믿고 있는 어떠한 신념과 명제, 스스로 느끼고 살아가고 있는 세계관과 스스로의 존재 목적과 의미 등 정신적인 면을 말하는 것이다.
영적인 싸움은 결국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이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나는 이 질문에 ‘하나님이 빚어가는 모습대로 빚어지기 위하여’라고 답하겠다.
이 답을 알고 있다면 나에 대해서도 타인에 대해서도 현재의 부족함을 용납하고 미래의 아름다운 모습의 소망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이다.
다만 더 아름답게 빚어지기를 거부하고 스스로가 혼자 생겨난 것처럼 고집스럽게 잘난 척을 하는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소망 없이 비참한 모습으로 최후를 맞게 될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