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반짝반짝 Nov 28. 2024

집이 오랜만에 집같이 느껴진다

밤늦게 퇴근하는 길에 눈보라가 몰아쳤다. 타이어에 기스가 나 있었기 때문에 정신을 집중해 조심조심 운전하는 것은 힘들었지만 이렇게 첫눈이 오는 오늘 빨간 잔꽃무늬 원피스와 하얗고 보송보송한 예쁜 퍼 반코트를 입고는 기분이 좋아서 어딘가 조용한 카페나 펍 같은 곳에 가서 음악을 들으며 눈 오는 밤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우리 동네는 상가가 많지 않은 조용한 곳이기 때문에 마땅한 곳이 없었다. 어쨌든 밤산책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으로 일단 집에 올라왔는데 집에 들어와 거실을 둘러보고 갑자기 우리 집이 너무 예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위기 좋은 어딘가를 따로 갈 필요가 없었다. 예쁜 부엌 조명과 거실 스탠드를 켜자 세상에서 가장 상냥하고 귀여운 고양이 두 마리가 있는 따뜻하고 아늑한 분위기의 우리 집이 나를 맞이했다. 새삼 나의 미적 감각에 감탄을 했다. 이혼소송을 당하고 급히 이사를 하며 들어온 이 집에서 그간 집에서 밥도 편히 못 먹고 월경이 몇 달간 멈출 정도로 심적으로 괴로웠던 와중에 내가 집을 이렇게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니. 마치 각 잡고 인테리어 한듯한 커튼과 조명과 가구들의 조화로운 모습과 당근에서 장만한 예쁜 벽난로 스타일 고양이 숨숨집 TV받침대, 현관의 콘솔테이블, 초록색 나뭇잎무늬 랙 선반 가림용 커튼, 드러눕기 너무 편안한 아이보리색 넓은 소파와 회색 리클라이너 소파, 거실에 놓아진 피아노와 첼로, 액자에 꽂힌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그림들, 심지어 나는 그림 대여 사이트에서 동화 속 구름 위 집이 그려져 있는 커다란 그림을 정기구독하여 집에 설치해 놓기도 했다. 고양이가 쓰는 투명 화장실과 자동 급식대와 선인장 모양 자동 급수대마저 하나같이 예쁘다. 이렇게 정신없고 돈도 없는 와중에 예쁘지 않은 것은 용서하지 못하는 나의 공주 취향 집을 완벽히 완성해 놓다니. 여태까지도 정말 힘든 와중에 놀라울 정도로 잘 해내었다고는 생각했지만 다시 새삼스럽게 나 자신이 뭘 해도 해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를 위해 준비해 놓은 우리 집이 너무 내 취향 저격이라 충격적이었다. 하나하나 맘에 들지 않는 구석이 없을 정도로 믿을 수 없이 너무 좋았다. 오늘에서야 우리 집이 내가 편히 밥을 해 먹고 쉴 수 있는 우리 집처럼 느껴진다. 차이코프스키 음악을 들으며, 호가든 로제 무알콜 맥주 한 캔을 마시며, 창밖에는 눈보라와 놀이터가 보이고, 따뜻한 조명 아래 소파에 앉아 고양이들이 장난치는 모습을 바라보니 우리 집이 천국처럼 아름다워 눈물이 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