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승부'
세계 최고 바둑 대회에서 중국의 고수 섭위평을 꺾고 국내 최초 우승자가 된 조훈현. 전 국민적 영웅으로 대접받던 그는 우연히 이제 겨우 초등학생에 불과한 바둑 신동 이창호를 만나고, 제자로 거두게 된다.
제자와 한 지붕 아래에서 먹고 자며 가르친 지 수년이 흘렀지만, 창호는 여전히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처음 등장했을 때 한국기원의 기사들을 깜짝 놀라게 하던 재능은 갈수록 빛이 발해가는 듯 보인다.
어렸을 때 보였던 기발함과 함께 서서히 자신만의 바둑에 눈을 떠 가는 창호지만, 계속 기본기를 강조하는 스승 앞에서 점점 위축되고 급기야 바둑을 포기해야 할까 고민하는 상황까지 몰린다. 하지만 창호가 보고 있는 세계를 확인한 훈현은 결국 그가 자신의 세계를 펼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고 마침내 결승에서 마주한 훈현과 창호. 모두가 스승의 뻔한 승리를 예상했던 첫 사제 대결에서 창호는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예상을 뒤엎고 훈현에게서 승리를 거둔다.
이후로도 창호에게 연패하며 큰 충격을 받는 훈현, 그리고 그런 스승을 지켜보며 다시 번뇌에 빠지는 창호. 이들의 대결은, 그리고 바둑의 길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펼쳐질까.
올해 개봉한 바둑 영화 ‘승부’의 줄거리다.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 바둑사에서도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잔혹하고도 강렬했던 사제 대결 스토리를 담은 이 영화는 5월초 현재 2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고,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본래 2023년 넷플릭스 공개 예정이었으나 유아인의 마약 투약 사건으로 개봉이 연기된 후 뒤늦게 극장 개봉을 마치고 5월 8일 넷플릭스를 필두로 OTT와 IPTV 공개를 앞두고 있다.
황제의 좌절, 그리고 성장
승부는 국수로 불렸던 바둑의 황제 조훈현이 정상의 자리에서 좌절을 맛보며 다시 한 번 성장하는 ‘중년’의 성장 스토리다.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하지만, 여러 상황을 영화에 맞게 재창조해 재미를 더했다. 그리고 그 설정들은 조훈현이 제자 이창호에게 패한 뒤 다시 정상에 오르는 과정에 집중된다.
이창호를 내제자로 거둔 조훈현은 이창호의 고집에 때로는 분노하고 답답해한다. 하지만 끝내 그가 펼친 새로운 바둑의 세계를 발견하고 그만의 길을 인정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뿌듯한 스승의 마음이었지만, 정작 이창호가 자신의 바둑은 완성하며 자신을 꺾었을 때는 깊은 혼란에 빠진다.
이것은 단순한 패배,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영화에서 조훈현의 바둑은 기세로 몰아붙이는 전투적이고 공격적인 ‘창’의 성향으로, 이창호의 바둑은 압도적으로 전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반집을 지켜낼 수 있도록 판을 몰아가는 ‘방패’의 성향으로 묘사된다.
또한 조훈현은 이창호에게 바둑의 기본인 전투, 기세, 그리고 이를 완성하기 위한 기본기를 강조하지만, 이창호는 자신이 발견하고 확신한 새로운 길을 고집한다.
단순히 기풍이 다른 것을 넘어 이들의 충돌은 세계관의 충돌이며, 제자를 상대로 한 패배는 조훈현에게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과 같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계속되는 연패로 그 충격과 스트레스는 심화되고 마침내 그의 시대는 가고 이창호의 시대가 왔다는 평가에 놓인 조훈현. 이에 그는 초심으로 돌아가 이창호와의 승부가 아닌, 자신과의 승부를 시작한다. 자신의 스승이 남긴, 묵혀뒀던 바둑판을 꺼내고, 결승에서 기다리는 것에 익숙했던 그가 예선을 거치며 한 단계씩 다시 올라온다.
스승의 가르침처럼, 라이벌이었던 남기철의 말처럼 정답은 없지만 답을 찾아가는 바둑의 기본을 상기하며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을 피하지 않고 당당히 답을 찾기 위해 나아간다. 그리고 다시 제자를 꺾고 왕좌를 되찾으며 비로소 이창호와 서로를 자극하는 애정 어린 라이벌로 새로운 관계를 정립한다.
멘탈 스포츠인 바둑을 매개로 인생의 절정에 선 중년의 나이에서 새로운 인생의 가치와 깨달음을 얻고 한 단계 더 성장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모두가 이제 자리를 지키거나 내려와야 하는 시기라 여기는 중년의 나이를 배경으로 우리 인생사의 변함없는 가치와 의미를 전달한다.
성장, 혹은 성숙. 이것은 이 힘든 인생을 끊임없이 가치 있고 아름답게 완성해가기 위한 모두의 키워드가 아닐까.
바둑을 몰라도 즐기게 만드는 훌륭한 연출과 설정
이 영화에 대해 호평만 있는 것은 아니다. 조훈현이 좌절을 극복해가는 과정이 제대로 묘사되지 않았다거나, 실제 기원의 문화나 대국 방식 등과는 다른 불편한 설정 등을 이유로 실망한 이들도 꽤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부족함을 이 영화만의 미덕으로 상당히 조화롭게 메꾼 영화로 생각된다.
일단 전자는 두 주연 이병헌과 유아인의 연기로 상당 부분 커버 된다.
실존 인물과의 높은 싱크로율로 또 하나의 인생 연기를 펼쳤다고 평가받는 이병헌은 조훈현이 느끼는 좌절감과 깨달음, 그리고 조금씩 진전되는 성숙과 치유를 각 장면 장면에서 나타나는 표정과 감정 연기만으로 훌륭하게 표현해낸다.
유아인의 연기도 놀랍다. 원래 그 역시 연기 잘하는 배우로 정평이 나 있지만, 바둑판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실제 당시 영상에서 보았던 이창호의 그것과 매우 흡사해 보일 정도다.
스승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후로도 마음이 편하지 않은 이창호의 내면을 그려내는 그의 연기는 조훈현의 집을 떠나 바둑 대결 외에는 마주할 일이 거의 없음에도 이병헌의 연기와 놀라운 앙상블을 이룬다. 마약 사건으로 나락에 떨어진 그의 연기력, 그리고 제때 대중들을 만나지 못한 그의 출연작들이 더욱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또한 이 작품은 사람들에게 익숙지 않은 소재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꽤 훌륭한 답안 중 하나로 평가할만 하다.
이와 유사한 소재로 도박, 범죄 등이 있는데 보통 이런 영화들은 그들의 계획, 그리고 상황을 읽는 말, 내면의 대사로 관객들의 이해를 돕는다. 이런 경우 잘 짜이면 명작이 되지만, 자칫하면 지루해지거나 창작자의 오만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승부에서 바둑 대결 장면은 두 사람의 내면을 대사로 설명하는 대신 중계라는 형식으로 접근한다.
이때 각 상황들을 바둑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해석하기 보다는 그 시점의 긴장감, 전세의 변화를 표현하는 데 집중한다. 그래서 그 중계 과정은 관찰자들의 입을 통해서든, 방송 해설자의 입을 통해서든 상당히 시끄럽다. 실제 바둑 중계의 모습과는 다른 마치 박진감 넘치는 스포츠 중계처럼 느껴진다.
이런 부분이 이질적이고 과하고 유치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중계 방식을 보조 수단으로 배치하고, 각 상황에서 충돌하는 두 배우의 연기적 긴장감을 중심으로 극을 이끌어 간다. 긴장감은 두 배우가 담당하고, 중계라는 설정을 통해 긴장감의 밀도와 속도를 조율하는 방식이다.
이는 배우들의 연기력이 담보되어야 하며, 시나리오는 물론, 연출과 편집까지 상당한 공력과 철저한 계산이 필요한 영역이다. 쉽지 않은 작업이기 때문에 완벽하기는 더욱 어렵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대중 영화로서는 충분히 훌륭한 결과물이 아닐까 여겨진다. 그 시도 자체가 여러 고민을 담고 있으며, 영화를 본 이들에게는 확실히 몇 개의 대국 장면이 하이라이트로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
쉽지 않은 소재를 대중성 있게, 그리고 일관된 정서와 서사의 흐름으로 이끌어간 제법 잘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