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를 읽고
헤밍웨이의 여섯 단어 소설은 전에도 읽고 충격받은 기억이 있다. 여섯 개의 단어만으로 그 어떤 신파적 설정도 없이 감동을 이끌어 낸 헤밍웨이. 인간적으로 사랑스러운 성격은 아닌 걸로 알지만 글쓰기에 있어서는 놀랍도록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다. 그에게 있어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나는 그의 글들을 떠올리며 평온하게 이 책을 펼쳤다.
‘인지 능력 대부분은 자기 이야기를 되도록 일관적으로 만드는 데 집중한다’는 사실은 글 쓰는 이에게 매우 희망적인 메시지이다. 문득 책에서 언급한 ‘무수한 이야기를 통해 치유와 파괴의 메시지를 전하는’ 성경이 떠올랐다. 원서를 읽지는 못했으나 근 2천 년 동안 사회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친 기독교 발전을 떠올리면 어쩌면 이 말은 ‘무수한 치유와 파괴의 이야기를 통해 일관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책’이라고 바꿔 써야 하지 않을까? 여러 작가들에 의해 쓰였고 결국 하나님의 감동으로 완성되었다는 신화적 결말은 더없이 마법처럼 느껴지지만 이상할 건 없다. 실제로 우리는 유사 이래 수많은 신화적 이야기 속 영웅을 통해 인간을 훈육해오지 않았는가? 성경 역시 내러티브의 특징을 가졌으니 설득력이 있다.
저자는 서두에 이 책을 통해 ‘좋은 이야기만큼 강력한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영웅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일까? 많은 이야기에서는 ‘영웅’ 또는 ‘구원자’가 등장하고 영웅은 늘 성장한다. 정신분석에서는 영웅의 심리상태를 두고 ‘수용될 수 없는 충동과 불안의 억압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가치 있는 것으로 옮겨 실현하는 승화'를 표현한다고 했다. 또한 영웅은 언제나 빌런(악당)으로 인해 더욱 영웅다워진다. 그런데 우리가 영웅 이야기로부터 얻고자 하는 건 승화라 카타르시스뿐일까? ‘가난뱅이에서 백만장자로’의 스토리가 최고 평점을 받고 영화 수익성이 가장 높다는 점은 무엇을 시사할까? 포스트 영웅시대에서 과연 영웅이 필요할까?
몰입 및 쾌락 호르몬으로 알려진 도파민과 코르티솔 (스트레스 호르몬이라고도 한다)은 영웅 스토리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이다. 해피 엔딩과 새드 엔딩 모두 영웅 또는 빌런을 통해 내러티브를 형성한다. 물론 어떤 이야기는 지루하기 그지없어 도파민도 코르티솔도 기대할 수 없지만 이런 경우에도 우리는 ‘인과 관계화’를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 밖에 공감 호르몬 옥시토신 역시 우리가 이야기에 열광하는 이유일테지만 나는 특히 엔도르핀이 분비되는 영화를 좋아한다. 최고의 심리적 방어기제란 ‘유머’라고 하지 않는가? 책에선 언급하지 않았으나 감동 호르몬 다이돌핀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다이돌핀은 엔도르핀의 4000배 정도의 효과가 있다고 알려졌다.
오랜 시간 의문을 가졌던 ‘동화 이야기’도 담겨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어떤 동화에 대해서는 ‘인류의 첫 번째 조언자’라는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헨젤과 그레텔, 신데렐라가 주는 교훈은 지나치게 편협하고 동기가 불순한데 이는 동화작가란 다방면으로 경험이 풍부한 어른이 만들어 낸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에게는 죄의식을 자극하는 이야기가 아닌 오감을 자극하는 이야기 또는 열린 결말로 구성된 동화가 적합하지 않을까? 어른과 아이의 차이 중 하나는 어쩌면 더 많은 경험으로 인한 ‘편견’ 일 수도 있다. 나는 아이들이 불필요한 ‘상상 근육통’을 앓지 않기를 바란다.
그럼 이번엔 늘 상상 근육통을 앓아야 하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해 볼까? 흥미로운 이야기는 흡입력이 있고 내러티브 몰입은 스토리 망을 제공한다. 우리 내면의 이야기꾼은 내러티브의 인과관계를 납득하는 순간 변형을 멈추고 정신적 자원을 절약하기 위해 자신만의 이야기에 정착한다고 한다. 우리는 딱 경험한 만큼의 상상력 안에서 사고를 확장하고 수용할 뿐이다. 그러니 사람들의 편견과 동기를 성찰하는데 탁월한 작가는 결국 좋은 이야기를 잘 만들어 낼 것이고 내러티브 몰입은 인간과 세상을 바꾸는데 큰 몫을 하게 된다. 분명 좋은 이야기처럼 강력한 것은 없다.
다시 영웅 이야기를 해야겠다. 우리는 이야기 속의 영웅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내러티브는 이야기를 넘어 우리 정체성의 핵심까지 파고든다. 이쯤에서 정신분석학자 라캉의 ‘거울 이론’과 ‘상상계’가 떠올랐다. 라캉은 어린아이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이에 동일시하면서 자아가 구성되며 이는 인간의 욕망을 타자의 욕망에 기초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고 하였다. 상상계는 주체의 욕망을 타자의 인정에 종속시키는데 즉 책에서 말하는 서사적 자아가 탄생되는 과정이다. 사실 영웅은 타인이 아닌 ‘나’인 것이다.
그러나 영웅 역시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진화해 왔다. 중세 봉건제가 무너지고 왕은 왕관을 내려놓았다. 이상적인 ‘자아 모델’은 다른 시대와 문화권에서 각각 다른 양상을 보였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웅은 몰락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야기에서 점차 ‘평범한 영웅’들이 등장했고 이러한 영웅의 이미지는 우리 모두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늘 새로운 영웅을 소환하지만 21세기 영웅이 되는 길은 꽤나 험난해 보인다.
내러티브는 이렇게 정체성을 가지고 이야기의 토대를 형성한다. 영웅이 모험하는 이야기든 그 영웅이 결국 ‘나’이든 이제 더 중요한 건 이야기의 수단이 되는 단어와 문장, 표현 형식이다. 저자에 의하면 화자는 ‘허구 이론’을 통해 청자가 주장하는 언어유희에 빠져들고 ‘믿는 척하기’를 시작한다. 앞서 말했듯 청자는 자신의 경험치에 따른 안전한 스토리 망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청자(독자)가 다다르는 메시지는 화자의 강력한 카리스마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스토리의 힘이다.
이야기는 더 이상 단어와 문장으로 표현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다양한 형태의 이미지와 더 나아가서는 인터넷 SNS, 소셜 플랫폼, 게임 등으로 옮겨져 더 많이 더 빠른 속도로 전파되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알고리즘의 진화는 거의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이러한 이야기 전달의 가장 효과적인 도구인 스마트폰은 그야말로 디지털 영웅임과 동시에 빌런이다. “스마트폰으로 말미암아 호모 나랜스는 그 어느 때보다 무수한 자신의 이야기를 생산할 수 있는 초강력 이야기꾼이 되었다.” 하지만 스마트폰에 담긴 불일치된 자아는 나를 비추는 또 다른 ‘거울’이 아닐까? 이번 장에서는 드디어 라캉이 등장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나 역시 디지털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 물론 저자의 말처럼 현실의 나와 일관성을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서 나는 수익 창출이 주 목적인 플랫폼과 글쓰기 플랫폼을 따로 운영 중이다. 불특정 다수에게 나의 사생활이 공개되지 않으니 나는 그 어떤 허구적 서사를 쓸 필요도 없고 ‘애씀의 아름다움’을 체험할 필요도 없다. 물론 과거 나 역시 나를 이야기하고 싶은 내적 욕구에 의해 소셜 네트워크에서 활발한 활동을 한 적이 있지만 말이다. 인플루언서로 살아간다는 건 불필요한 자신 소모감을 견뎌야 하는 일이다. 나는 그저 충분히 나답게 살면서 인간 사이에 아름다운 거리를 유지하고 싶다.
책에서도 말했듯 집단 소속감으로 인한 다른 집단에 대한 경계심은 이기주의를 능가하기도 한다. 공동체 문화의 장단점이 있겠으나 인간은 집단일 때 평균 아이큐가 현저히 낮아진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나는 공동체 생활이 조심스럽고 누구나 그 안에서 나다워지기를 포기하지 않길 바란다. 하물며 현실 세계의 공동체가 이러한데 소셜 네트워크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하는 원숭이’로 태어난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그저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책에서는 이러한 소셜 네트워크의 집단적 정체성에 대해서 심도 있게 다루고 있고 인류는 이미 ‘문제점’을 인식했으니 어쩌면 좋은 해결책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매체는 어느새 이야기를 대체했다. 매체의 사전적 의미는 ‘인간이 의사소통을 위해 발명한 모든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 시대의 이야기는 매체에 영향을 받으며 진화했고 매체는 이제 정치적으로 이용가치를 발휘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야기는 정치적 영웅 또는 빌런을 만들어내기에 최적화된 속성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사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흔들리는 임계점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마피아 게임을 좋아한다면 몰라도 일상이 대체로 정치적이라면 견디기 힘들지 않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야기꾼 원숭이는 사기꾼, 호모 이코노미쿠스로 전락했다. 이야기는 갈수록 흥미로워진다. 성장하는 영웅을 내러티브로 삼았던 시대는 끝나고 비용-편익 원칙에 따라 자산을 증대시키는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등장했다. 그리고 저자의 말처럼 당분간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대체할 모델은 없을 것도 같다.
왕을 만들고 백인, 흑인, 유대인이라는 ‘인종’을 만들어낸 역사적 배경에도 역시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인종이라는 단어는 차별이라는 단어와 분리되기 어려워 보인다. 저자를 통해 ‘인종’에 대한 내러티브를 이해하고 잠시나마 잔혹한 어른 동화에 대한 반성을 해 본다. 파시즘과 나치즘 또한 희대의 잔혹한 어른 동화를 만들어냈고 영웅보다는 빌런에 가까운 주인공을 만들어냈다. 이 역시 이야기의 힘일 것이다. 극단적 젠더 관계에 대한 해결책으로 대안적 내러티브를 든 것 역시 깊이 공감한다. 기후 위기 문제를 포함해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인류가 어떻게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이야기에 담긴 메시지는 어떻게 전달되어 영향을 미쳤는지 종교, 철학, 민족, 역사, 사회, 심리, 언어, 정치, 경제, 예술 등 다양한 접근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내용은 그야말로 방대하다. 저자는 분명 영화광일 것이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중간중간 언급한 영화들을 다 보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아쉽다.
저자의 말 중 “기후위기를 다룬 영화들이 결국 온난화를 해결해야 할 문제로 다루지 않고 그저 영화의 배경으로 사용하여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관점에서는 뜨끔하기도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역시 저자의 말처럼 기후 위기 이야기는 허구의 시나리오를 들을 때보다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결국 이야기의 메시지는 개인의 경험과 수용정도를 바탕으로 완성되는 걸까? 기후 문제는 대체 얼마나 강력한 내러티브 구조를 가져야 설득력이 있는 걸까? 생태가 없으면 경제도 없다는 점을 간과한 그 둘의 경쟁에서는 누가 승리할까? 부끄러운 일이다.
이야기를 잘 만들기 위해서는 ‘무중력을 경험해보지 않고도 중력을 떠올릴 수 있는 성찰’이 필요하다는 말은 매우 깊고 인상적이었다. 나 역시 나만의 스토리 망이 편협해지지 않도록 상상력을 단련하고 더 많은 경험과 좋은 이야기를 쌓아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좋은 이야기만큼 강력한 것은 없다’고 했던가. 양날의 검처럼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가지고 책은 우리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모호함에 대한 관용’은 최근 읽은 장자 이야기(为善为无近名, 为恶无近刑)와도 의미가 상통한다. 생존과 의미 발견이 우리를 서사적으로 연결한다는 말에도 크게 공감했다. 마지막 챕터에서는 절묘하게도 트롤리 문제가 등장했다. 과연 인간은 어떻게 세상을 구할 것인가? 쉽지 않은 여정이지만 저자의 말처럼 이야기(문제)를 만들어 낸 것도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낸 것도 인류이니 결국 인류가 세상을 구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아쉬웠던 점을 몇 가지 나열해 본다. 먼저, 이야기가 매우 흥미로웠던 것과는 별개로 이 책의 번역은 난해했다. 물론 번역이 난해했기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던 장점도 있었다. 이야기는 어디든 존재했기에 이 책은 읽을수록 두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맙소사 점성술까지 등장했다. 심지어 ‘지칠 대로 지친 원숭이’라는 챕터의 제목은 마치 나를 두고 하는 말처럼 느껴져 웃음이 났다. 이야기 과잉 공급으로 초래할 피로감과 단순화 욕구에 대해 언급할 땐 다시 한번 뜨끔했다. 하지만 이제 책을 내려놓아야겠다. 끝없이 깊고 무거워진 저자의 이야기에 나는 더 이상 감상문을 덧붙일 자신이 없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었다면 좋을 책을 너무 급히 읽은 탓이다. 모든 챕터를 한 권의 책으로 엮어도 좋을뻔 했다. 이 책은 매우 밀도 있게 쓰였고 끊임없이 좋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개인적으로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는 2024년 나의 베스트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더 많은 경험과 이야기를 쌓은 후에 꼭 다시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