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였다. 지역에서 활동을 이어오며 만났던 청소년진로지원센터 선생님에게 전화가 왔고, 선생님은 내게 글쓰기 수업을 부탁했다. 작은 단위의 글쓰기 특강은 종종 진행했던 터라 흔쾌히 알겠다고 수락했지만, 교육의 세부 내용이 '시각 장애 학생과의 글쓰기 수업'이라고는 한참 지난 후에야 말씀해주셨다.
함께 찾아오는 기대와 두려움. 아직 글쓰기 코칭이 그리 익숙하지 않은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는 내게 진로지원센터는 글쓰기 방식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안내하는 선생님보다는, 글에 대한 흥미와 맛을 알아갈 수 있도록 아이의 입장에서 천천히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교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아마도 나의 첫 번째 책이었던 <오늘도 만나는 중입니다>에 담긴 청각 장애 친구와의 협업 프로젝트를 보고 날 적임자로 날 떠올리신 듯했다. 오랜 시간 고민했다. 선한 의지만으로도 수업을 잘 이어갈 수 있을지.
내가 배운 제2언어는 영어, 그리고 내가 배운 제2소통방법은 수화였다. 이제 어쩌면 점자를 통한 대화가 나의 세 번째 소통 방법이 되는 걸까.
--
2021년 9월 3일
떨리는 마음으로 15주 차 수업을 준비한 나는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한 어느 늦은 오후, 진로지원센터에서 솔이를 만났다.
첫 시간은 무언가를 교육하고, 안내하기보단 낯선 서로를 최대한 많이 마주하고 꺼내 보이는 것에 집중했다. 솔이와 나는 마치 스무고개처럼 서로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솔이님은 오늘 아침에 어땠어요?
아침에 학교 갈 때 일어나면 입맛이 없어요. 바나나 하나 먹고 학교로 직행하고요.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녹내장이라 눈부셔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잠 깨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잠 깨려면 아침에 샤워하는 날 말고는 보통 아무것도 안 해요. 7시 30분쯤 되어서 일어나고 늦었다고 바쁘게 움직이는데 매일 그 일상에 반복이라서 이젠 늦었다고도 안 해요.
솔이님은 어떤 음식을 좋아해요?
선생님! 그렇게 물으면 약간 어려운데....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요? 저는 갈비! 갈비를 좋아해요. 맛있으니까요. 갈비가 제 스타일인 거 같아요. 그리고 저는 과자라면 다 좋아해요.
우리 앞엔 센터에서 준비한 다과가 놓여있었고, 솔이는 과자 위를 손으로 가볍게 훑더니 내게 물었다.
선생님은 여기서 어떤 과자 좋아해요?
저요? 저는.. 음.. 빈츠요. 빈츠 좋아해요.
왜요?
음.. 일단 초콜릿과 비스킷의 퍽퍽함이 뒤섞여서 좋아해요. 너무 뻔하지 않은 맛이랄까요..?
솔이님은 어떤 과자 좋아해요?
저도 그렇다면 빈츠가 좋아요. 에이스는 밋밋해서 안 좋아해요. 저는 잼이 들어가는 과자가 좋고, 초콜릿도 좋아하요. 초콜릿이 사르르 녹는 느낌과 과자가 섞이면 좋아요.
솔이님은 어떤 책을 좋아해요?
집에 ai스피커라고 있어요. 이름을 말하면 틀어주는 기계가 있거든요. 위인동화 틀어달라고 하면 틀어주니까. 위인동화 읽는 걸 좋아해요. 대단하다고 생각해서요. 빈센트 반 고흐 좋아해요. 약간... 저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데. 화가라는 말만 들어도 좋아요.
솔이님은 꿈이 뭐예요?
장래희망이요? 장래희망이 여러 가지인데. 과학자가 되고 싶어요.
왜 과학자가 되고 싶었던 걸까요?
학교에서 과학이라는 과목이 있는데. 실험할 때도 재밌고 나중에 어른이 되면... 과학자가 되어서 더 많은 연구를 해서 많은 걸 알아내면 여러 학생들이 많은 걸 알려줄 수 있어요. 우리 세상을 더 발전시키고 싶어요.
그럼 솔이님은 어떤 글을 쓰고 싶어요?
저는 학교에 있는 친구들에 대해서 글을 쓰고 싶어요. 학교에 있는 언니 오빠들. 친구들. 이렇게 해서. 모든 학교에 언니 오빠, 친구들에 대해서 글을 쓰고 싶어요. 많이 만나진 않지만. 그래도. 복도에서 만나고 하면. 다 볼 수 있으니까.
제일 친한 친구가 누구예요?
김규린이라고. 여자애 있거든요.
선생님은 승희라고. 요즘은 서로 바빠서 자주 보지 못하지만, 늘 고마움만 남는 친구가 있어요.
선생님 저는 영어를 좋아해요. 학원에서 <행복한 왕자>라는 책을 배워요. 동화책을 영어로 배우는 데 가끔은 어렵다고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끝까지 영어학원 다닐 거예요.
솔이는 신나서 대답하다 중간중간 갑자기 말을 그쳤다. 불편한 게 있냐고 물어보니, 선생님이 노트북에 기록하는 거 같아서 기다려주는 것이라 했다. 솔이를 처음 만났지만, 모든 대화에서 이 아이의 섬세한 마음이 느껴진다.
솔이님은 오늘 올 때 어땠어요?
오늘 올 때 차에서 음악을 들으면서 왔는데 내비게이션에서 경로를 갔다고 했어요. 광안대교로 온 것 같았는데, 돌아온 것 같아요. 그리고 저 사실 여기 처음 와봐요.
솔이님은 어떤 음악 좋아해요?
저는 맨날맨날 바뀌긴 하는데. <사랑이 지나가면> 좋아해요.
와- 이문세! 선생님도 이문세 좋아해요.
아니요. 저는 아이유 <사랑이 지나가면> 말한 거였어요.
잔잔한 사운드의 음악을 좋아한다고 하니, 15주 차의 교육이 끝나는 날 기타를 들고 와 솔이와 함께 책거리로 '사랑이 지나가면'을 불러야겠다 생각했다. 솔이는 '점자 디스플레이'를 통해 타자를 치고, 글자마다 달라지는 점자판의 돋음을 보며 글을 읽었다.
저는 사실 손으로 느끼면서 글을 쓰거든요. 글자를 쓰면 여기 점자로 찍혀요. '한소네'라는 기계예요.
구슬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솔이, 요맘때를 좋아하는 솔이, 폴라포 포도맛을 좋아하는 솔이. 우린 서로의 취향과 선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어떤 일상을 보내는지 손의 감각으로, 오가는 단어의 틈새로 아주 조금씩 짐작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