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인사 #버킷리스트 #첫사랑
얼마 전, 독서 모임에서 연극 '아들에게'를 보았다. 1903년 목사 겸 독립운동가 아버지로 인해 미국에서 태어난 현미옥은 미옥과 앨리스라는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살지만,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 나의 이름은 흔하고 흔하다. 그래서 어릴 땐, '희야~날 좀 바라봐.'라고 시작하는 노래가 그렇게 좋았다. 만화책의 '율', '빈'으로 끝나는 이름은 어떤가, 반짝이고 고급스럽다. 그리고 여기, 이름에서 시작해 이름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람우는 엄마와 함께 7번도 넘게 이사를 다닌다. 순하고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 그는 유부남임을 숨긴 재벌의 혼외자로 엄마가 본처의 돈을 받을 때마다 야반도주를 한다. 모자는 서로를 아끼고 애틋하며 돈독하다. 전학 온 학교에서 처음 맞이하는 만우절, 아이들은 학기 초 학생 이름을 잘 모르는 교생선생님을 타깃으로 이름 바꾸기 사다리를 탄다. 그리하여 람우는 희완이 되고, 희완은 람우가 된다.
희완이 람우가 된 그 하루, 명찰을 바꾼 희완에게 멋진 남자 선배가 귀엽다며 관심을 보이고, 영어 시험에서 70점을 맞는다. 한편 희완이 된 람우는 졸지에 생리통으로 양호실에 간 여학생이 되고, 죽여버리기 전에 빨리 나오라는 양아치의 통보를 받는다. 만우절이 끝나고 람우는 이름을 되찾는 듯했지만, 엄마 대신 나간 당근 거래에서 구매자 희완을 만나고, 물건을 확인하라는 그의 말에 희완의 손에 들린 것은 뜻밖에도 야하고 화려한 브래지어다.
희완은 이를 빌미로 람우와 계속 이름을 바꾸자고 제안한다. 가질 '람'에 언덕 '우'는 나무를 상징한다며 나무가 부족한 자기 사주에 도움이 된단다. 그리하여 그 둘은 다시 정희완이라 불리는 김람우가 되고, 김람우라 불리는 정희완이 된다. 람우는 잘 먹고, 잘 뛰고, 잘 노는 밝은 희완이 좋다. 희완은 순둥순둥 호구 같은 람우가 좋지만 서툰 감정은 장난에 희석된다. 그러던 어느 날, 국어 시간에 람우가 황지우의 '일포스티노'를 낭송할 때, 시를 듣던 그녀는 자신의 깊은 감정과 만난다.
네 살 때 엄마가 돌아가신 희완과 한 번도 찾아오지 않는 아빠를 둔 람우는 서로의 허한 마음을 채우며 절친이 된다. 희완, 람우, 형석과 태경은 유성우 축제에 놀러 가고, 희완은 '정희완'으로 당첨된 천문대 별똥별 관측 행사에, 고백 편지를 들려 람우를 보낸다. 그런 그녀에게 람우는 집에 갈 때 같이 앉아서 가자고 화답하며 편지를 꼭 쥐고 돌아선다. 별똥별이 떨어지고 모두가 황홀경에 사로잡혀 있을 때, 소방차와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멀리서 어지럽다. 희완은 그렇게 멈춘 시간 속에서 람우를 혼자 보낸 선택을 원망하며 박제된다.
천문대 폭발 사고를 당한 건 정희완으로 기재된 람우다. 그는 그를 데리러 온 저승사자를 따라가다 이승과 저승을 합법적으로 오갈 수 있다는 말에 혹해 저승사자가 된다. 5년이 지난 어느 날, 람우는 스물세 살 정희완의 명부를 받는다. 아니 본만 못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희완에게 일주일 후의 죽음을 알리지만 그녀는 세상 무덤덤하다. 여고생 희완의 버킷리스트를 기억한 람우는 자신의 버킷리스트 10개를 같이 해달라고 떼를 쓴다. 그는 말라비틀어진 그녀의 소소한 소망을 실현하며, 삶에 대한 미련이 생기기를 바란다.
희완은 죽기 하루 전, 버킷리스트를 작성한다. 세상과 제대로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아빠와 동생 선물을 사고, 엄마가 그리울 람우와 아직 전하지 못한 진실을 전하기 위해 그의 엄마를 찾아간다. <拱圩製>에서 그림을 그리고 전시를 열며 살고 있는 엄마. '껴안을 공, 언덕 우'. 자신을 껴안으며 살고 있는 엄마를 느끼며, 람우는 웃는다. 희완의 고백을 들은 람우 엄마는 그녀의 회한을 안아준다. 시간의 매듭을 풀기 시작한 희완은 마지막 날, 버킷리스트에 '김람우랑 평범하고 뻔한 데이트'를 속성으로 추가한다.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하며 람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희완에게, 죽지 말라며, "보고 있을 게, 듣고 있을 게. 잊어버리지 마. 우리가 함께한 거? 다 없어지지 않아. 다 너한테 있어. 너는 정희완이기도 하고 김람우이기도 하잖아."라고 안심시킨 후 사라진다.
혼자가 되어 돌아온 희완은 또다시 악몽을 꾸고 짧은 유서 한 장을 쓴다. 그녀가 박스를 딛고 옥상 담장 위로 올라선 그때, '김람우'라 부르며 찾아온 람우가 희완의 손을 잡고, 밤하늘에 퍼지는 불꽃놀이를 함께 본다.
"넌 선택할 수도 없었는데. 난 한 번도 너를 못 구했네. 미안해 람우야, 내가 너무 미안해. 정희완."이라며 용서를 비는 희완. 람우는 '너를 구하는 게, 나를 구하는 거'라며, 이 세상에 희완을, 희완에게 이 세상을 맡긴다.
"김람우, 김람우, 김람우."
이름을 세 번 부르고 자신과 작별 인사를 하는 람우. 그의 목소리엔 어떤 회한도 미련도 없다. 그런 람우에게 안녕을 고하는 희완. 그들은 비로소 본인의 이름을 온전히 되찾는다.
시각디자인 졸업 전시회, 희완 작품은 람우체다. 악필 람우가 쓰는 이응은 납작 복숭아처럼 생겼다. 람우의 말과 목소리는 람우체가 되어 희완의 마음에 뿌리내린다.
"꽃들도 초록색 잎사귀들도 돌아오지 않아. 새로운 꽃, 새로운 초록색 잎사귀들이 있는 거지. 또 다른 포근한 날들이 오는 거지.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고 아무것도 반복되지 않아. 모든 것이 진짜니까."
람우체를 마주하는 희완,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결국 람우를 사랑하는 것임을 알고, 그를 기억하며 자신의 이름으로 살 것을 약속한다.
내가 나의 이름으로 산다는 것, 그것은 나의 이름으로 죽는 것과 한 몸이다. 희완이 언젠가 온전하게 정희완으로 삶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희완으로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람우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람우와 살고 있는 희완에게서 자기를 데려간다. 살다 살다 저승사자가 자신의 이름을 세 번 부르고, 소멸하는 장면은 처음 본다. 그래서 그 장면을 생각할 때마다, 그 담백한 '김람우' 호명을 세 번 떠올릴 때마다, 그가 세상에 두고 가야만 하는 것들이 사무친다. 이제는 없는 그의 이름이 가득하다.
안녕이란 말은 많은 것을 담고 있다. 그 안에는 시작과 끝이 있고, 만남과 헤어짐, 호기심과 단절, 반가움과 외면이 들어 있다. 참새 같은 재잘거림과 첼로 같은 묵직함이, 아침과 밤이, 웃음과 눈물이 담겨 있다. 저승사자 람우의 지인 찬스 덕분에 희완은 또 다른 자아 김람우를 저승에 벗어두고, 죽음의 경계를 넘어 두 발로 이승을 딛는다. 희완의 버킷리스트엔 '일단 살아보기'가 추가되고, 날 선 비난으로 끊겼던 친구 태경, 형석과 잘린 시간을 잇는다. 주변 사람들의 안부를 묻기 시작한 희완. 그녀의 눈길이 아빠의 흰 머리칼에 와닿는다.
안부를 묻는다는 것, 그건 그가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라고 했다. 다행이다. 희완이 주변 사람들의 안부를 물을 수 있게 돼서. 지독한 자기 불행과 끝도 없는 죄책감에서 벗어난 자만이,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볼 수 있으니. 봄, 희완은 그녀의 마음속 구멍을 알아본 선배와 분분히 꽃잎이 날리는 벚꽃나무 아래에 있다. 남겨진다는 것은 몇 번의 봄을 다시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고, 마음에 뚫린 선명한 구멍이 주는 신산함을 견디는 것이다. 남겨진다는 것은 그가 부르는 내 이름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까마득하게 잊었다고 생각한 순간으로 던져질 때가 있다. 여러 겹의 색채가 덧입혀져 오히려 또렷하고 선명하다. 그 낯설어진 기억 앞에서 여전히 마음이 오그라들고, 모질어질 때 '몬스터 콜스'의 몬스터가 한 말을 떠올린다. "그게 진실의 다는 아냐." 주변을 챙기고, 그림을 그리며 바쁘게 살던 희완도, 어느 날, 잊고 싶은 그날의 기억 속으로 다시 돌아가기도 할 것이다. 별이 밝게 뜨는 밤이나 황지우의 시를 만나는 순간, 놓아주었던 그 이름이 생각나는 날도 있겠지. 그런 날, 희완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의 시간 속으로 흘러가, 희완. 그래도 괜찮아."
일 포스티노
- 황지우
자전거 밀고 바깥 소식 가져와서는 이마를 닦는 너.
이런 허름한 헤르메스 봤나
이 섬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해보라니까는
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으로 답한 너.
내가 그 섬을 떠나 너를 까마득하게 잊어먹었을 때
너는 밤하늘에 마이크를 대고
별을 녹음했지
태동하는 너의 사랑을 별에게 전하고 싶었던가.
네가 그 섬을 아예 떠나버린 것은
그대가 번호 매긴 이 섬의 아름다운 것들 맨 끝번호에
그대 아버지의 슬픈 바다가 롱 숏, 롱 테이크되고;
캐스팅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나는 머리를 박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떤 회한에 대해 나도 가해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 땜에
영화관을 나와서도 갈 데 없는 길을 한참 걸었다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휘파람 불며
신촌역을 떠난 기차는 문산으로 가고
나도 한 바닷가에 오래오래 서 있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