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5.30
여행기간 : 2006.05.29 - 06.02
작성일 : 2006.07.07
동행 : 같이 살아 주시는 여자분
여행컨셉 : 신혼여행을 빙자한 백패킹 + 렌트카 여행
히다카상은 패션관에 머물렀던 한국인들에 대해서 얘길 해줬다. 일 년에 한 팀 정도가 온다고 말이다. 그런데 한국인이 신혼여행 온 케이스는 자신이 태어나서는 야쿠시마에서 처음 있는 일이란다. 일본인들도 신혼여행은 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어떻게 하면 우리들에게 더 잘해 줄까를 늘 고민하는 것 같았다.
민박집은 사실 사람 만나기 좋아하는 아저씨의 취미 같았고, 분명히 직장이 있다고 했는데, 퇴근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무조건 우리더러 나가자고 하셨다. 스기랜드 등산로를 걸은 것도 등산이라고 조금 피곤해 있었는데, 역시나 오늘도 "똑똑".
우리 신혼여행 온 사람들 아니었나? ^^
온천 가자신다. 온천이라면... 솔깃했다.
8시에 나오라고 하셔서 가져온 햇반과 밑반찬을 꺼내서 저녁을 먹고 나갔다.
마당에는 패션호 앞 벤치에 히다카상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출발할 생각은 앉고 잠시 앉으라는 게 아닌가.
같이 갈 사람이 또 있단다. 다른 객실에도 우리 말고 관광객이 있긴 했다. 한 팀은 일본인 커플인데, 야쿠시마는 그런 식으로 커플들이 와서 하루 이틀 묶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그랬다.
또 한 팀은 아줌마 둘에 꼬맹이 하나가 있는 가족같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 중에 누구겠지 생각했는데, 미야자키상이었다. 이웃의 그 미야자키상.
그 전날하고 차림은 동일했다. 흰 런닝셔츠에 흰 반바지, 그리고 슬리퍼. 손에만 흰 타올을 하나 들고 있는 게 다를 뿐이었다. 건장하고 시커먼 사람이 머리도 좀 짧아서 인상은 좀 야쿠자스런....
히다카상하고 친한 모양인데 바야는 귓속말로,
"좀 무섭다".
실상은 너무 순박한 사람이었고 떠나기 전날 밤 우리가 간다는 말을 들으셨는지, 자신의 카메라를 들고 우리방을 찾아와서는(또 "똑똑". 동네사람들 모두 우리 방에 한 번씩은 다 들르는 듯...) 같이 사진 한 장만 찍자고 그러는 사람이었다.
‘최지우상과 같이 사진 한 장 찍을 수 있을까요?’^^
히다카상이 최근에 보내 온 메일에는 그 사진이 패션관의 식당에 걸려 있다고 했다.
어쨌든 그렇게 네 명이서 패션호를 타고 출발했다. 앞 좌석에 앉은 두 일본 아저씨들은 좀 수다스러웠다. 대부분 못 알아듣는 말이었고, 가끔 우리에게 뭘 물어보면 빌려온 전자사전으로 열심히 찾아서 겨우겨우 대화를 해야만 했다. 이제 히다카상은 나의 일어 실력을 간파하고 되도록 쉽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식당에서 음식을 하고 계신 ‘아리무라’ 아줌마는 우리 때문에 밤낮으로 한국말을 공부했다. 이날 아침에는 전에 사 두었다는 ‘한국어관광회화수첩’을 꺼내들고는,
“안녕하세요. 아침식사는 하셨습니까?”
그런다. 그 말 한마디 하려고 얼마나 연습을 했을까? 미야자키상은 한국에 한 6년 전에 가 본 적도 있단다. 롯데월드 관광을 했다고 그러는데 한국말을 배울 생각은 아예 없었단다.
너무 어려워서.
지도상으로 '유도마리온천‘은 섬의 남단 끝부분이었다. 캄캄한 길을 차로 한 40분 가서 인적도 불빛도 전혀 없는 외딴 곳에서 차를 세웠다. 바야는 아직도 좀 겁내하고 있었다. 가는 중간중간에 수도 없이 튀어나오는 야쿠시카(사슴)들만 보면 헤드라이트를 그 쪽으로 비추는 히다카상 때문에 조금 안심도 했으련만...
다들 그냥 어제 처음 만난 사람들이긴 했다.
히다카상의 핸드폰 불빛에 의존해서 파도소리가 나는 해안 돌 틈으로 따라 걸었다. 갑자기 물 끼얹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사람이 달도 없는 밤에 벌써 온천을 즐기고 있음이었다.
“오호(히다카상이 잘 쓰는 감탄사). 좀 더 내려가야 겠습니다.”
자신들은 거기서 할테니 우리더러는 더 내려가자고 안내를 해 주었다. 거의 바닷가 바로 코앞까지 가서는 여기서 옷을 갈아입으라셨다.
좀 웃겼다. 그 상황만 두고 보면 코메디가 따로 없다. 만난지 하루 밖에 안 된 사람이 외지인 둘을 망망대해가 펼쳐진 외딴 해안 끝에 데려와서는 옷을 벗으라니... 더구나 그러마 하고 엉거주춤 서 있는 남녀.
유도마리 온천
이제 좀 어둠에 익숙해져서 사방을 둘러보니 바닷물이 1미터 앞에까지 있었고 두 평 정도의 웅덩이를 돌로 둘러 친 온천탕이 있었다. 그렇게 우리만 남겨두고 자신은 다시 더 위쪽의 탕으로 가버렸다.
“두 시간 후에 봅시다.”
무슨 온천을 두 시간이나 한다는 말인가?
밤 기온은 조금 쌀쌀했다. 이제 부부라지만 그래도 가릴 것 하나 없는 그런 곳에서 옷을 다 벗고 들어가라고 하니 좀 뭐했다. 망설임도 잠시 탕으로 들어가니 그렇게 뜨겁지도 않고 딱 좋았다. 유황냄새가 살짝 나는 것이 감촉도 미끌했다.
나중에 설명해 주길 우리가 들어간 탕은 밀물 때는 없어지고 썰물 때만 생기는 곳이란다. 탕의 밑바닥은 일본식 주점같은데 보면 다다미방 중간에 발을 넣는 넓은 홈이 있는 것처럼 생겼는데, 거기서 따뜻한 물이 계속 솟구쳤다. 그렇게 넘치는 물은 바로 바닷물 속으로 들어갔다. 팔만 뻗으면 차가운 바닷물이 닿았다. 이렇게 신기한 경험이라니. 더구나 파도가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비스듬한 갯가 바닥은 바다거북 산란지에서 본 모래 속의 그 호타루들이 파도가 자극할 때마다 작은 빛을 발해서 처음엔 보석이 박힌 바위인줄 알았다.
오로지 파도가 조용하게 오가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멀리 등대 불빛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그렇게 하고 있으니 얼마나 분위기가 좋았겠는가? 바야 손을 한 번 잡아봤다. 찌릿했다.
허허. 우린 이제 부부니까.
대충 한 시간 반이 지나서 옷 입고 위로 올라가서 히다카상과 미야자키상을 불렀다. 벌써 마쳤냐고 그러는 두 분에게 좀 민망했다.
온천으로 몸이 녹아내리는데 역시나 히다카상은 그냥 집으로 향하지 않았다. 우리가 오늘 낮에 봤던 풍경들을 이야기 하던 중에 ‘타키’라는 말을 듣고는 숙소로 가던 길을 멈추고 차를 왔던 길로 급회전시켰다. ‘타키’는 폭포다. 우리가 낮에 본 작은 폭포말고 진짜 거대한 것을 보여주시겠단다.
그래서 도착한 곳은 유도마리온천도 한참 지나서 섬의 서쪽에 있는 ‘오코(大川)폭포’였다. 차를 주차하고 걸어가야 했는데 워낙 어두워서 패션호 지붕에 달린 네 개의 조명을 다 켜두고 들어갔다. 폭포소리는 대단했는데, 도착하기 전까지 나무에 가려서 잘 보이진 않았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고 나서는 아찔할 정도의 폭포 규모에 넋을 잃을 뻔했다. 무려 88미터 높이란다. 더구나 아저씨가 켜 둔 조명이 폭포를 바로 때리고 있어서 폭포가 부서져서 만드는 물안개 사이로 길게 빛기둥이 횡으로 그려진 모습이 극광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 보다는... 영화 ‘시네마천국’ 클라이막스에서 담배연기 자욱한 극장안, 영사기로 나온 빛이 스크린에서 흑백영화를 만들어 내듯이 패션호의 라이터가 내는 불빛이 절벽면의 스크린에 닿아서 폭포의 입체영상을 만들어 내는 것 같았다. 그 주위로 호타루들이 마치 금가루처럼, 빛 기둥의 잔해처럼 떠다니는 것까지... 대단한 연출이었다.
나도 처음 해 보는 건데... 오호(특유의 감탄사)... 생각보다 좋군요.
아저씨의 말에 고마움과 감탄으로 우리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왜 이럴 때는 카메라가 없는 걸까? 오로지 온천만 생각하고 타올만 두 개 들고 온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돌아오는 길에서는 시카 부부가 새끼들을 데리고 마실 나왔다가 차 불빛에 놀라서 꼼짝도 못하고 있는 새끼를 데리고 가던 길을 황급히 지나는 모습도 볼 수 있었고, 용천수가 나오는 약수터에서 정말 맛난 물맛도 봤다. ‘물이 어떻게 이렇게 달지?’하고 의아했을 정도이다.
지금 가물가물한 기억을 따라 용천수에 다시 가 보고 싶지만, 도대체 캄캄한 도로만 달려서 어디인지는 모른다. 실제인지 꿈인지도...
매 순간 놀라운 경험들이 넘쳤으나 피로에 장사없는지라 바야, 미야자키상에 이어 나도 잠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차가 비포장길로 들어서는 느낌에 설핏 잠을 깨니 어느새 차가 멈춰있었다.
다들 차에서 내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패션관은 아니었다.
임파첸스(한국에서도 가로에 많이 심는데 보통 어른든은 '하와이 물봉선화'라 부르는 꽃)가 만발한 동산이었다. 작물로 기르는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 어디 농장에라도 왔나보다 했더니, 아저씨가 잠시 어디 갔다오더니 잠바 앞섶에 잔뜩 과일을 따 오셨다. 생긴 것은 탱자 같은데 크기는 귤 정도이고 맛은 오렌지에 가까웠다. 밀감이냐고 물었더니 비슷한 건데, ‘단깡’이라고 했다. 야쿠시마의 특산물이라고. 말하자면 서리를 해 오신 것이다.
피곤한지 미야자키상은 돌아오자마자 집으로 돌아가셨다. 덩치만 컸지, 순박하기 이를 데가 없는...
다 정리되지 않은 벅찬 마음에 술이라도 한 잔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지쳐서 쓰러지는 바야를 보면서 저녁에 사 온 바나나와 망고, 그리고 서리한 단깡을 먹고 나도 자리에 누웠다.
누워서 그런 생각을 했다. 여기가 바로 낙원이라고.
우리 시대는 사람이 자신의 향기를 가지고 다른 향기와 어울릴 수 있는 곳이 거의 없는데, 그런 게 가능한 이곳이 바로 낙원이라고. 더구나 태어나자마자 자본주의적 인간형으로 강제로 사회화 되었고 또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 내가 보기에는...
국제 금융이나 외환이 시간의 구애없이 24시간 매 초마다 전세계를 무대로 종횡무진 하면서 생명 위에 군림하는 듯한 바깥 세상과 동떨어져서, 7시만 되면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고(9시까지 하는 몇 안되는 곳도 있긴 하다) 자본의 이동이 거의 멈춰 버리는 이곳은, 우리 시대에 몇 안되는 낙원임에 분명하다고.
낙원의 어느 귀퉁이에 사랑하는 사람 옆에 누워서 잠이 들려는 이 순간 낙원을 오롯히 체험하고 있구나... 뭐 이런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