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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시마 신혼여행 05_원령공주의 숲

2006.5.31

by 조운

여행기간 : 2006.05.29 - 06.02
작성일 : 2006.07.07
동행 : 같이 살아 주시는 여자분
여행컨셉 : 신혼여행을 빙자한 백패킹 + 렌트카 여행




일찍 일어났다.

히다카상이 8시에 '모노노케히메의 숲'에 가자고 했기 때문이다.
원래는 이날 다시 가고시마로 가기로 계획되어 있었지만 우리는 아저씨의 꼬드김에 못 이겨 야쿠시마에 하루 더 있기로 했다. 아저씨가 수요일에 쉬는데 만일 우리가 야쿠시마에 더 있으면 꼭 모노노케의 숲으로 데려간다고 약조도 했고.... 렌트한 마치는 아저씨가 몰기로 했다.

만약 우리가 그냥 계획대로 이날 야쿠시마를 떠났더라면 어쩔뻔 했을까?
현지인이 소개하는 곳은 계획이고 뭐고 취소하고 꼭 가봐야 한다. 여행은 그렇게 늘 일정이 변경될 수 있는 여지가 있어야 진정한 맛을 볼 수 있는 거 같다.

출처 http://fathomaway.com/guides/asia/japan/itineraries/what-to-do-yakushima-japan/


미야노우라시(市)로 가기 전에 녹차 아이스크림가게로 갔다. 기가막힌 맛이라고 소개했는데, 과연 그랬다. 거기서 관광상품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최고 명작, ‘원령공주’에 나오는 코다마(もりのことだま-숲의 정령) 모양의 핸드폰 고리도 샀다. 삼나무를 손으로 깎아서 팔고 있었다.


아이맥스로 즐기는 다큐, "야쿠시마"


우선 미야노우라항구로 가서 내일 첫 배편부터 예약했다. 미야노우라항은 야쿠시마의 두 관문 중 하나로 북동쪽에 위치해 있다.

가장 일찍 떠나는 배가 안보항에서 출발하는 것이 있어서 그것으로 예약(두 항구 중 원하는 시간에 맞춰 어디서든 예약이 가능하다)을 하고 항구 바로 앞에 있는 ‘야쿠시마환경문화센타’로 갔다.
히다카상은 내가 영상을 하는 사람이라는 얘기를 처음 했을 때부터 계속 여기를 배경으로 영화 한 편 찍고 싶지 않냐고 물었었다. 당연히 그렇게 하고 싶다고 했더니, 벌써 외국의 어떤 감독이 찍어놓은 영상이 있다셨다. 오늘은 온 김에 그것부터 보자고...
이쯤되면 우린 이미 자유여행도 신혼여행도 아니고 히다카상은 누가 시키지도 않은 가이드를...아니 가이드를 넘어, 일행?^^.
신혼여행에서 일정까지 바꾸는 동행이 생긴다면? 사람에 따라서는 불쾌하게 느낄 수 있겠지만, 우린 너무 좋았다.

출처 http://www.yakushima.or.jp/en/village.html


센타는 가고시마현청 소속인데 어울리지 않은 모던한 디자인이 좀 그랬지만, 시설은 아주 좋았다. 아이맥스 영화관이 있고 우리가 들어가니까 막 시작하려고 했다. 급하게 표를 끊고 들어갔다. 아이맥스영화라는 걸 처음봤는데, 헬기로 찍었는지 계곡과 능선을 누비는 카메라 시점은 마치 내가 헬기를 타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름다운 야쿠시마의 사계를 정말 잘 포착해서 담아놓았다. 누가 야쿠시마에 가거들랑 꼭 들어가서 보라고 추천해주고 싶다.
영화를 보는 동안, 그 작가는 이걸 만들면서 얼마나 행복했을까 생각했다. 나는 말라가는 스님과 황폐해지고 있는 생명을 다루고 있는데...


어딘가 브래드 피트가 플라잉 낚시라도 하지 않을까?


없던 일정이 끼어 시간이 많이 지나버렸다.
영화를 보자마자 급하게 '시라타니운수계곡'을 향해 출발했다. 야쿠시마를 소개해 준 사람이 꼭 가보라고 추천해 줬던 곳이라서 가려고 했었는데... 아저씨의 도움으로 우리 끼리만 왔으면 경험하지 못했을 많은 경험도 할 수 있었다.
모노노케의 숲도 그 안에 있다.
안보강을 거슬러 가면 '야쿠스기랜드'가 있고,
미야노우라강을 거슬러 오르면 '시라타니운수계곡'이 있는 꼴이었다.
역시 물과 산이 만나는 곳에 진귀한 볼거리도 있고 수목과 짐승들도 자유롭게 천수를 누리는 것이리라. 인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운수계곡에 대한 기대는 가는 길목에서부터 충족되었다. 산으로 끝없이 굽이를 돌다가 내려다 보는 경관부터 사람을 매료시켰다.

아예 목 좋은 난간은 차량이 주차해서 경관을 구경할 수 있도록 도로확장과 난간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세상에 히다카상은 그 작업 인부들과도 전부 알고 지내는 사이인지 차를 세워서 인사를 하고 예의 그 '최지우'라는 단어를 섞어서 우리를 소개했다. 그럴때마다 바야는 차창 밖에서 얼굴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살짝 자세를 낮추곤 했다. 듣는 사람 표정도 읽으시면서 말씀을 좀 하시지...ㅜㅜ

길도 아름다웠지만 갑자기 비포장길로 들어서서는 보여주는 계곡 하류의 잔잔하고 이국적인 강변의 모습은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본 계곡과 흡사했다. 플라잉낚시를 즐기는 브래드피트라도 만나거나, 갑자기 물 표면에서 연어라도 한 마리 툭 튀어 오를 것 같았다.


시라타니 운수 계곡


그렇게 연신 카메라를 들이대는 우리들을 배려한다고 차를 천천히 몰아가던 아저씨는 한참을 가서 주차장 같은 곳에 차를 대었다. 매표소 직원과 인사를 하고 자신은 표가 필요없다면서 우리 꺼만 끊으면 된다고 했다. 바다거북 산란지에서도 그러시더니...
지금 생각해 보면 아저씨의 직업은 공무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모르는 사람도 없고 가는 곳마다 입장료 없이 출입이 자유로운 것도 그렇고...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
시라타니운수계곡은 야쿠스기랜드보다 더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오래된 이끼들이 마치 파란 융단처럼 지천에 깔려 있고 거대한 삼나무들과 아기자기한 꽃들이 굽이굽이 계곡을 따라 지 편한대로 돋아 있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으로 돌아다녔다.

히다카상의 그 사교성은 여기서도 백분 발휘.
아저씨를 따라 걸으면서 후쿠오카의 사가현에서 왔다는 유카상(방송작가)과 유키코상(대학강사)을 만났다. (실은 두 분 다 약사였다. 내 짧은 일어 실력으로 잘못 알았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는...)

두 사람은 상기된 얼굴로 우리처럼 눈으로 들어오는 감동적인 정보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눈을 바쁘게 움직이랴, 반듯하지 않은 길을 비틀거리며 걸으랴 정신이 없어 보였다. 둘이 똑같은 등산화를 신고 있길래 물었더니 역시나 첫 산행이란다. 등산화도 산행 입구에서 빌린 거고.
그분들은 오히려 신혼여행 온 우리들이 등산화를 가지고 왔다는 것과 왠만하면 한국인들은 등산화 한 켤레 씩은 가지고 있다는 말에 신기해했다.
일본에는 산도 드물거니와 산을 우리처럼 즐겨 찾지 않는단다. 특히 젊은 사람은 매니아가 아니고서는 산을 오르는 사람이 없단다. 아주 힘들어 보였음에도 참 밝은 사람들이었다.

우린 자연스럽게 동행이 되었다. 물론 친화력 짱인 히다카상이 아교 역할을 했고...
이제 산에서 불쑥 만나는 시카들도 신기하다기 보다는 그냥 친숙해져버렸다.




지리산의 고목들처럼 바람에 한쪽으로만 가지를 뻗다가 죽어버린 고목들이 삐죽하게 여기저기 나와있는 큰 바위의 정상에서 갑자기 그 분들이 도시락을 꺼냈다. 히다카상도...
우린 아무것도 준비 안했는데... 아마 히다카상이 준비하라고 했던 말을 내가 이해 못했던 모양이거니...

하지만 그렇게 여유를 부릴 처지가 아니었다. 여긴 뭘 파는 산장같은 건 없었다. 땀도 많이 쏟았고, 당이 떨어져서 지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얻어먹었다. 얻어먹으면서 한국와 일본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뭐, 길게 얘길 했지만,,, 대부분 못 알아들었고... 기억나는 것은 최근에 일본에서 욘사마의 인기는 좀 식었다는 것 정도.^^

점심에 대해 생각도 못하다가 얻어만 먹게 되어서 뭔가 좀 해줄 것이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그들이 가져온 작은 카메라를 보고 여기저기 좋은 배경으로 몇 컷 사진을 찍어주었다. 내가 가지고 간 게 아주 좋은 건 아니었지만, 그나마 제일 괜찮은 것이어서...
그렇게 다섯 명이 일행이 되어 이후는 같이 움직였다. 아니다 여섯 명이다. 실은 우리가 그 바위에 오르기 직전에 그 바위에는 핸드폰으로 곳곳을 찍고 있던 총각이 한 명 있었다. 그리고 바로 헤어졌는데 모노노케노모리에서 다시 만나서 거기서 사진을 한 장 찍어 주었다. 핸드폰으로 찍길래 안되어 보여 한 장 찍어 준 것인데, 자신의 카메라 밧데리가 다 되어서 안그래도 아쉬워 하던 차에 고맙다고 하면서 메일주소를 적어주었다. 이름이 도로키상이었다. 도쿄에서 왔댔다.


모노노케노 모리(もり,숲)


그렇게 일행이 꾸려져서 드디어 모노노케노모리에 도착을 했다. ‘もののけのもり(모노노케노모리)’라는 작은 푯말까지 붙어있었다. 과연 그 일대는 하늘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숲인데다가 습기도 많아서 온통 이끼로 덮여있다.
그냥 사방이 파랬다. 사슴신이라도 곧 튀어 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신비한 마력까지 품어댔다.


유카상, 유키코상


모두가 자연의 수많은 생명들이 만들어낸 예술 작품에 넋이 빠져 있었다. 여기서 감흥을 받은 어떤 예술가라도 약간의 상상력만 추가해서 작품을 만든다면 그것은 명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미야자키하야오는 야쿠시마 수탈의 역사를 들었을 거고, 자신이 견지하는 인간성 회복에 대한 신뢰를 투영하려 했을 것이다.
원령공주를 비롯, 매력적인 인물들과 사슴신, 멧돼지 신을 상상한... "원령공주"는 명작이 될 필요조건을 다 갖추고 탄생한 셈이다.



사슴이 앉아 있는 듯한 나무며, 오랜 세월의 풍파로 부서진 사다리며, 이끼반 물반인 작은 웅덩이들은 작가의 상상력을 강하게 자극했을 테고 인간과 자연을 대립항으로 봐서는 안된다는 견해를 시종일관 담지해 온 그가 이곳을 모티브로 원령공주를 만들어 내었다는 거... 인류의 일원으로 고마움을 표한다.

원령공주... 정말 만나고 싶다. 자꾸 두리번거려 보았다. 혹시나 들개를 타고 노려보고 있는 꼬마소녀가 있지나 않을까하고...

그러다가 저멀리 가는 일행의 끝에 바야가 있었다. 불러 세웠다. 돌아본다. 모노노케히메처럼...

얼추 산을 다 내려와서 사가현의 여인들과는 작별 했다. 메일주소만 받고.
며칠 전 내가 보낸 메일과 사진에 대한 답이 왔는데 다시 야쿠시마에 가고 싶고 부산에도 한 번 오고 싶단다. 우리더러 후쿠오카에도 함 오라고 그러면서 먼저 우리들 최근 사진부터 보내 달라더라. 우리가 신혼여행을 왔다고 하자 어떻게 알고 왔는지, 알아도 어떻게 여길 올 생각을 했는지 몹시 궁금해 했고, 그런 우리를 자기가 본 ‘가장 아름다운 신혼부부’라고 임명해 준 사람들이었는데, 우리의 신혼 생활 모습이 보고 싶다고 했다.
히다카상과 우리는 바로 나가지 않고 산책로를 따라 조금 더 걸었다. 이 곳도 야쿠스기랜드처럼 비교적 짧은 산책로 구간을 만들어서 연령에 관계없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 두었다. 어느덧 매표소가 다시 보이는데 아저씨가 갑자기 신발을 벗으셨다. 우리더러도 벗으라고. 우리를 계속 벗기시는 아저씨...^^

매표소는 계곡에 임해 있는데 거기 들어가서 발을 담그자는 뜻이었다. 종아리 정도까지 오는 곳으로 들어갔는데, 물은 정말 찼다. 그리고 내 발을 담그기가 미안할 정도로 맑았다.
신기한 것은 물고기라고는 없다는 거. 너무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않는다고 하더니 사실인가 보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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