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5.29
여행기간 : 2006.05.29 - 06.02
작성일 : 2006.07.04
동행 : 같이 사는 여자분
여행컨셉 : 신혼여행을 빙자한 백패킹 + 렌트카 여행
야쿠시마공항에 도착한 첫 느낌은 ‘애개~’였다.
활주로를 지나 작은 2층의 공항 건물이 보였다. 대합실(?)은 시골 간이역보다 약간 큰 규모...
히다카(日高)아저씨가 공항으로 마중을 나오기로 했는데 아무도 없어서 좀 당황스러웠다. 내가 직접 통화한 적도 없고... 혹시 전혀 예약같은 거 안되었던 것은 아닐까?
여행사에서는 야쿠시마에 대해 거의 모르고 해서, 여기까지 오는 교통편을 마련해 준 것도 무척 고생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한때 일본관광객 가이드를 했던 후배 놈을 찾아가서 인터넷 뒤지고 전화해서 숙소를 미리 예약한 상황이었었다.
부산에서 예약할 때 메모했던 전화번호를 뒤져서 찾았다. 공중전화도 달랑 하나밖에 없었다. 다행히 어떤 여자 분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 다행?
영어를 전혀 못하는 일본 여자분과 사실 "눈치:일어 = 9:1" 정도로 눈빛과 입술 모양보고 대략 의사 소통을 하는 나는 거의 서로의 말을 알아 듣질 못했다. 잘 안되는 말로 겨우겨우 우리가 예약했던 한국 신혼여행객이라는 정도의 의사가 전달되었다.
기다렸다.
잠시후, 패션호가 횡하니 들어오더니 우리를 반겼다. '패션호'는 '히다카상'의 4륜구동 픽업트럭 애칭이다. 그 차에 짐을 싣고 달렸다.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 온 터에 비까지 와서 벌써 사위가 어두워지고 있었다. 아저씨는 사람좋게 생긴 중년으로 흰머리칼이 많고, 제법 긴 머리를 기름으로 뒤로 넘긴 멋쟁이였다. 차차 말하겠지만 알면 알수록 더욱 멋진 사람이었다.
숙소는 공항에서 10분 정도의 거리였다.
‘민숙’이라고 우리의 민박과 비슷한 것이지만 “패션관(거기 발음으로는 ‘화숀깐’)의 수준은 펜션에 가까웠다. 숙소에는 전기압력솥과 쌀을 비롯한 왠만한 취사 설비와 욕실에, 비데가 달린 화장실이 따로 붙어있었다.
가격은 1인당 3700엔 정도지만 일본에서는 저렴한 편에 속했다. 우리는 이틀치 방세를 미리 내고 짐을 풀었다. 원래 숙소와 렌트카만 하고 취사는 해 먹기로 했던 터라 식량(쌀과 햇반, 대부분 그렇게 신혼여행 가지 않나?^^)이 짐의 반이었다. 잠시 나와서 사진도 찍으며 수선을 떠는데, 히다카상이 불렀다.
저녁식사 전에 드라이브를 가자신다.
패션호에 올랐다.
야쿠시마에는 1900미터가 넘는 산을 비롯해서 봉우리들이 많은데 거기서 발원한 꽤 큰 강이 두 개가 있다. 안보강과 미야노우라강이다. 둘 다 포구가 있고 카고시마로 통하는 배편이 시간대를 다르게 해서 두 곳에서 운항중이다.
안보(安保)강 하구로 갔다. 안보시(市)는 야쿠시마에서 가장 번화한 곳인데, 작은 어촌 마을 정도라고 보면 된다. 거기엔 야쿠시마관광협회 사무실이 있었고 히다카상은 거기서 야쿠시마 지도며 정보책자를 무료로 얻어주었다.
안보강 중류로 올라가니 깊은 골짜기를 가로지르는 붉은 색 철교가 있었다. 거기 차를 세우고 아찔한 골짜기 아래를 보니 한가로이 황포를 단 돛배가 지나갔다.
야쿠시마는 예로부터 삼나무 산지로 유명한데 그 돛배가 나무를 실어나르는 뗏목이란다. 가는 곳이 전부 꿈에서 보던 천국같은 풍경이었다.
시시각각 어스름이 짙어지면서 진녹색의 산들은 위엄을 더했다.
패션관으로 다시 돌아와서 히다카상이 저녁 초대를 했다.
무슨 소린지 몰라서 멀뚱한 바야와 미안해서 그렇게 해도 되는 건가 생각하는 내가 좀 망설이자, 돈은 안 받을테니 걱정말라고 하신다. 아마 그래서 망설인 것으로 오해 하신 모양이었다.
별채로 식당이 있는데 거기에는 안주인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인상좋은 아주머니 한 분도 계셨다.
'아리무라상'이라고 소개 받았다. 아까 공항에서 전화 받으셨던 분이다.
나중에 들었는데, 음식도 하고 청소 등의 일을 돕는 분이란다. 인상이 너무 좋았다.
식사는 훌륭했다.
생선이 있었는데 아가미 옆의 지느러미가 꼬리까지 길게 뻗어있고, 크기는 꽁치 정도였다. 뭐냐고 물어보는 나를 향해서 뭐라고들 하는데 도통 모르겠더니, 같이 식사를 하던 이웃인 듯한 아저씨(미야자키상)가 플라잉피쉬라고 해서야 그것이 날치인 줄 알았다. 튀김옷을 살짝 입혀서 구운 녀석은 알밥으로만 먹어봤던 날치의 성채였다. 맛도 괜찮았다. 그 외에도 바닷가 바위에 붙어있는 갑각류 같은 것을 간장에 볶은 것하고 우리가 육장(고추장에 잘게 다져서 볶은 소고기를 넣은 밑반찬)이라 부르는 것과 거의 흡사한 것도 있었다. 다만 고추장 대신에 미소된장에 넣었다는 것만 달랐다. 염치 불구하고 두 그릇을 해치웠다. 일본인들은 밥을 적게 먹는 편인 것 같은데 우리가 한국인들이라서 일부러 많이 주신 거란다. 그래도 양이 살짝 모자란 듯 했지만, 초면인지라...^^
저녁을 먹고 좀 있다가 히다카상이 찾아왔다. 바다거북이 산란하는 해변으로 가자신다.
안그래도 바다거북의 집단 산란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왔는데, 때마침 이때가 아주 많이 올라온다고 한다.
히다카상은 여기 태생으로 이십 여 년 전에 도쿄에서 한 6년을 살다가 다시 돌아와서 여기 계속 계신다고 했는데, 차로 이동하면서도 만나는 차들마다 인사를 나누고 길가는 사람마다 인사를 나누는 것이 거의 ‘어딘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홍반장’ 수준이었다.
“아저씨가 사시는 모습이 너무 좋습니다. 저의 꿈도 아저씨처럼 공동체 마을의 홍반장처럼 되는 것입니다.”
했더니
“제 꿈은 할리데이비슨에 마누라 태우고 로드 관광하는 건데요.”
그러신다. ^^
실지로 자신이 사고 싶은 바이크의 카달로그도 보여주면서
“근데 마누라가 싫어해요.”
하고 웃으셨다.
계속 부인을 "쯔마"라고 칭하셨는데, 나도 그대로 따라서
"히다카상의 '쯔마'도 뵙고 싶다."는 둥, 여러 번 "쯔마"라는 호칭을 섰다.
그때마다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인상를 받았는데, 아뿔사 우리로 치면 정명 '마누라'처럼 본인의 부인을 남들에게 표현할 때나 쓰는 말이었는데... 완전 실례를 했는데도 나중에는 전체적인 내 일어 실력을 미루어 짐작하고 그러려니 하시는 눈치였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죄송한 마음이다.
바다거북이 산란하는 해변은 여러 군데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유명한 곳은 '나가타이나카하마'라는 해변. 우리 숙소와는 섬의 정반대 쪽이었다.
깜깜한 밤 길을 차로 한 시간 정도 달렸다. 밤이 되자 거리에는 가로등도 없고 섬의 일주도로는 폭이 생각보다 좁았다. 거의가 50킬로로 제한된 도로에는 아저씨의 차와 관광버스를 제외하고는 간간히 경차 정도만 보였다.
그렇게 도착한 곳엔 차들이 많이 와 있었다. 나무로 지은 작은 사무실이 있고 사람들이 그 마당에 줄지어 앉아 있었다. 유네스코 자연 유산에 등재된 이 섬에서는 자연을 보호하면서도 트레킹 관광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레인저들이 배치되어 있다. 여기도 그런 사람들이 관광객들에게 주의사항을 지시하고 있었다. 4월부터 10월까지 거의 5000마리 정도의 거북이 산란을 목적으로 이 섬에 방문을 한다는데 하루 저녁에 대략 10여 마리는 올라온다고 했다.
입장료가 있었다. 700엔. 그 돈은 야쿠시마의 자연보호를 위해서 고생하는 레인저들과 복원, 유지 사업에 쓰인다고 했다. 여기 말고도 이 섬의 관광 자원들에서 받는 입장료는 대부분 물가대비로 봐서 저렴했는데, 사용처는 비슷하다고 했다.
순서를 기다려서 10여 명 씩 짝을 이루어서 레인저의 안내로 백사장으로 갔다. 오로지 레인저가 들고 있는 작은 후레쉬에 의존해서 깜깜한 해변을 걸어야 했다. 우리 차례가 되어서 짠내 가득한 바닷가로 들어섰다. 보이진 않았지만 모래알이 제법 굵었고 백사장은 꽤 넓었다. 한참을 가더니 우리더러 모두 앉으라고 그러더라. 마치 달밤에 훈련하는 양 두 줄로 길게 앉았다. 모두들 잠시 후에 벌어질 경이로운 경험에 대해서 전혀 예상치 못하고 두런두런 목소리를 죽여서 대화도 나누면서 기다렸다. 그때 히다카상이 갑자기 내 어깨를 치면서 따라오라고 했다. 파도소리가 들리는 물가쪽으로 바야랑 둘이서 따라갔다. 다시 우리를 앉아라고 하더니 모래를 손으로 살살 한겹 걷어내었다. 그런데 그 속에서 호타루(ほたる)라는 것들이 잔뜩 있지 않은가. 반딧불이었다. 나도 어릴 때 시골에서 여름날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빛 아래서 수박을 쪼개면서 평상에 앉아 있다가 수도 없이 날아다니는 반딧불을 봤던 경험이 있지만 이렇게 바닷가 모래 속에서 빛나는 놈들은 처음 봤다. 놀라웠다. 그 작고 애처롭게 반작이는 것들의 실체가 뭔지 궁금해하고 있는데 레인저가 우리를 불렀다.
모여든 일행들을 바라보면서 소리죽여서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는데, 형체는 모르겠지만 거무스름한 것이 보였다. 천천히 그 쪽으로 다가가니 다른 레인저가 후레쉬를 비추고 있었다.
후레쉬는 파헤쳐진 모래 속에 거꾸로 세워두었고, 그 위로 검고 둥근 어떤 것이 엎드려 있었다. 바다거북이었다. 벌써 후레쉬가 비추는 구덩이 안에는 하얀 알들이 많이 보였고, 수초를 사이에 두고 계속해서 거북은 알을 낳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가느다랗게 신음소리도 들렸다. 분명 거북이 내는 신음소리였다. 감동이었다. 지금도 회상하면 그 광경이 실제였는지 꿈이었는지 헷갈릴 정도다. 사람들도 모두 핸드폰으로 촬영하면서 ‘스고이네!!’ ‘스바라시이!!’를 연발했다.
히다카상은 붙임성이 좋은 성격이다.
우리가 그러고 있는 사이에도 어느새 도쿄에서 왔다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소녀 둘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대화 내용에는 우리가 한국에서 신혼여행 온 사람이며, 한 명은 독립영화감독이고 한 명은 교사인데, '박'상은 최지우상하고 닮았다는 등, 우리 얘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히다카상한테서 “최지우”라는 말이 나올때마다 사람들이 바야를 쳐다보았다. 바야도 왜 그러는지 눈치를 차리고는 어이없다는 웃음과 함께 쑥스럽다는 말을 해댔다. 어쩌다가 바야가 최지우와 닮아보였는지 몰라도 여행기간 내내 히다카상은 바야 보고 최지우상이라고 불렀다. 심지어 아까 같이 밥을 먹었던 이웃의 미야자키상도 그렇게 불렀다. 사람들이 쳐다봤지만 다행히 거의 서로를 알아볼 수 없는 깊은 어둠을 사이에 두고 있어서 히다카상의 미감이 크게 의심 받지는 않았다.^^
좀 시간이 지나자 산란을 끝낸 거북은 다시 구덩이를 메우기 위해서 버둥거렸다. 지칠대로 지친 몸으로 지느러미를 저을 때마다 거친 숨소리가 마치 한숨을 내쉬는 듯 들렸다. 도와주고 싶을 정도였지만, 바로 코앞에서 그저 힘내라는 소리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다 덮고 몸을 돌리는데도 한참이 걸린다. 다시 바다를 향하는 녀석은 죽을 힘을 다해서 나아갔다. 우리 모두는 끝까지 따라가면서 “간밧데”하며 소리죽여 응원했다. 어떤 것이라도 같이 고생을 경험한 사이가 되면 그 관계는 기존의 개체간의 관계 이상이 되는 것이리라. 거북과 레인저, 그리고 우리 관광객들은 제법 긴 산란의 전과정을 함께한 공동체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우리가 지켜봤던 덩치 큰 거북은 바다로 돌아갔다. 레인저는 우리를 다시 처음의 장소로 데려가려 했다. 그런데 우리가 보던 곳 말고도 여기저기 검은 신음소리가 많이 들렸다. 히다카상은 우리들과 아까 꼬드겼던 소녀들을 달고 다른 거북에게로 향했다. 그 녀석은 조금 작은 듯 했는데, 히다카상은 갑자기 꽁무니 속 구덩이로 팔을 쑥 밀어 넣더니 갓 낳은 알을 두 개 꺼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최지우상”
하면서 바야한테 건넨다. 탁구공 만한, 둥글고 끈적한 점액이 묻은 알을 받아들고는 바야는 한마디 했다. 감동에 젖은 눈을 살짝 돌려서 나를 보면서,
따뜻해, 아직.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따뜻하게 남아있는 그 감촉을 잊지 못하고 계속 얘기꽃을 피웠다. 히다카상은 그러는 우리에게 선물을 하나 더 주었다. 갑자기 '호타루(반딧불이)'의 계곡으로 가자고 그러더니 차를 집쪽으로 몰지 않고 샛길로 들어갔다. 주위는 어둠 뿐이고 산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한참을 갔다.
근데 이 상황이 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의 친절이 여기서 끝이고, 이제 우리를 어디 팔아 넘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경이로운 경험들로 하루 저녁을 채워준 이 남자는 실은 만난 지 겨우 몇 시간도 되지 않은 사람인 것을... 숙소에 돌아와서 바야도 똑같은 맘이 들었다고 먼저 말을 했다. 그러나 쓸데없는 잡념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웃긴다.
차가 멈춘 곳은 숲으로 둘어싸인 고요한 공터였다. 바닥은 새로 다듬은 돌들이 있는 것으로 봐서 그냥 숲이 아니라 조성해 놓은 공원으로 짐작되었다. 나중에 지도를 보니 그곳은 '야쿠시마 종합자연공원'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었다.
그렇게 좀 걸어 들어갔는데 별도 없이 흐린 하늘에 반짝이는 것들이 잔뜩 날아다녔다. 예전에 시골에서 경험한 바로 그 반딧불이.
공원 중간에 거대한 나무에 마치 크리스마스 장식처럼 잎마다 달려있는, 그리고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이 놈들... 마치 나무의 정령들 같았다. "원령공주"의 미야자키 하야오도 분명 그렇게 느꼈으리라.
바야는 반딧불이를 처음 봤다는데, 어느새 걔네들 중 한 녀석이 바야의 어깨에 앉았다. 어두워서 후레쉬가 없는 니콘 D-50으로는 찍을 수가 없는 것이 한이 되었다. 하긴 후레쉬가 있다손 쳐도 이런 걸 어떻게 찍을 수 있단 말인가. 그건 그냥 눈과 가슴에 담는 것이거늘.
차로 돌아와서도 어깨의 그 놈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실내등을 켜고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 컷 촬영을 했는데도 그 놈은 날아갈 생각을 하지 않더라. 숲에서 조금 나와 순환도로로 나오기 바로 직전에 창 밖으로 다시 보내주었다.
돌아오는 길에서는 '야쿠시카'라고 불리는 야쿠시마의 사슴들을 수도 없이 볼 수 있었다. 여기는 야쿠시카외에도 '야쿠사루'라고 원숭이도 유명한데 아저씨의 설명으로는 야쿠사루는 낮에 햇볕을 쬐러 나오고 야쿠시카는 밤에 주로 나온단다. 그래서 야쿠시마에 오면 꼭 밤에 숲으로 난 길을 따라 다녀봐야 한단다.
패션관으로 돌아오니 시간이 밤 12시. ㅜㅜ
숙소만 빌리기로 해 놓고 졸지에 관광가이드까지 해 주신 것에 미안해서라도 원래 계획대로 내일은 렌트를 하겠다고 말씀을 드리니까 싸고 좋은 렌트회사도 소개해 주시겠단다.
그러고 보니, 우린 오늘 아침까지도 부산에 있었다니... 부산항을 출발해서 보낸 하루가 마치 꿈 속 같으다. 그렇게 다다미방 위에서 야쿠시마의 첫 밤을 보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