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마음에 여유가 없기 때문인지 글을 거의 쓰지 않았다. 최근 마음에 드는 영화를 보아서 그에 대해서 몇 자 적어보려고 한다.
시간여행은 흥미로운 주제이다. <백투더퓨처>, <페르시아의 왕자:시간의 모래> 등 많은 콘텐츠들이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과거에 대한 로망과 환상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길은 할리우드 유명 작가로 현재 소설가로 직업을 바꾸었다. 길은 로맨티스트이며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스콧 피츠제럴드가 살았던 1920년대를 황금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파리의 밤거리를 혼자 산책하다가 1920년대로 시간여행을 하게 된다. 이 영화의 제목 <미드나잇 인 더 파리>에서 말하듯이 자정이 지난 후 파리는 시간을 초월한 공간이 된다.
영화의 배경은 2010년대이므로 사실 길은 1920년대를 살아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남겨진 작품이나 과거의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알게되면서 1920년대 예술가들에 대해서 일종의 환상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환상은 생각외로 꽤 많다. 심지어는 공자마저도 이러한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八佾第三>14 子曰, “周監於二代, 郁郁乎文哉! 吾從周.”공자가 말했다. "주나라는 하와 은 두 대를 본받았으므로 문물제도가 빛난다. 나는 주를 따르겠다."
<泰伯第八>20 舜有臣五人而天下治. 武王曰, “予有亂臣十人.” 孔子曰, “才難, 不其然乎? 唐 虞之際, 於斯爲盛. 有婦人焉, 九人而已. 三分天下有其二, 以服事殷. 周之德, 其可謂至德也已矣.”
순은 신하 다섯 명을 가졌었는데 천하가 잘 다스려졌다. 무왕은 "나에게는 좋은 신하가 열 명 있다."고 말했다. 공자는 이에 대해서 말했다. "인재를 얻기가 어렵다고 했는데, 참 그렇지 않으냐? 당후 이후로는 주나라 때가 가장 흥성했는데 그 중 부인이 있었으니, 나머지는 아홉 명뿐이었다. 주나라는 천하의 2분의 2를 가졌으면서도 여전히 은나라에 복종했으니, 주나라의 덕은 참으로 지극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陽貨第十七>05 公山弗擾以費畔, 召, 子欲往. 子路不說, 曰, “末之也已, 何必公山氏之之也?” 子曰, “夫召我者, 而豈徒哉? 如有用我者, 吾其爲東周乎?”공산불요가 비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공자를 불렀으며, 이에 공자가 가려고 하자, 자로가 불쾌한 듯이 말했다. "가지 마세요. 하필이면 무도한 공산씨에게로 가시려고 하십니까?
공자가 말했다. "나를 부르는 사람이 어찌 헛되게 부르겠느냐? 만약 나를 써주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동쪽에 있는 이 나라, 노를) 주나라처럼 부흥시키겠다.
<述而第七>05 子曰, “甚矣吾衰也! 久矣吾不復夢見周公!”
공자가 말했다. "참으로 심히 노쇠했구나! 이토록 오랫동안 주공을 다시 꿈에 보지 않게 되었으니!"
-명륜당 출판사의 해석을 인용함
위의 인용문은 『논어』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이처럼 공자는 주나라를 이상적인 나라로 생각하였다. 실제로는 만나본 적도 없으면서 무왕과 주공단을 군자의 대명사처럼 생각하였으며, 그들이 다스리던 당시의 주나라를 공자가 생각하는 도덕정치의 이상으로 여겼다.
공자와 길의 알고리즘은 비슷하다. 공자가 무왕과 주공단을 롤모델로 삼아서 그들의 주나라를 이상세계로 생각했듯이, 길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스콧 피츠제럴드 같은 사람들을 덕질하기 때문에 그들이 살았던 1920년대를 이상적 시간으로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진실로 당시의 모습이 이상적이었을까?
길은 1920년대에서 아드리아나를 만난다. 아드리아나는 길의 우상인 1920년대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길에 대해서 호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드리아나는 길이 1920년대를 이상향처럼 생각했듯이 그 이전의 시대를 이상향으로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아드리아나는 길의 또다른 모습이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예술적 재능을 펼치지 못하고 주변에 꼬이는 사람은 모두 본인과 맞지 않는 사람들 뿐이다. 답답한 현실속에서 과거의 찬란한 이상적 판타지를 탈출구로 삼는다. 아드리아나가 길의 소설에 끌리고, 서로 매력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둘은 거울에 비친 본인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렇기때문에 아드리아나는 길을 이해할 수 있는 동시에 길이 가지고 있는 한계 역시 가지고 있다. 영화는 아드리아나를 통해서 과거를 이상화하는 길의 생각에 대해 부정적인 답변을 내놓는다. 과거는 갈 수 없는 먼 곳이기 때문에 아름답게 이상화된 판타지일 뿐이다.
사실 길의 행동 이면에는 이해받고 싶고 공감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언뜻 보기에는 굉장히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낭만보다는 찌질함에 가깝다. 길이 1920년대로 건너가게 되는 원인으로는 약혼녀인 이네즈와 같이 파리에 가게 됐다가 만나게 된 폴이라는 이네즈의 지인의 역할이 크다. 폴은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사람으로 본인의 지식을 뽐내길 좋아하는 사람이다. 길 커플과 폴 커플은 같이 파리를 여행하게 되고, 폴은 '내가 이것에 대해서는 좀 알고 있는데, 어쩌고 저쩌고'하면서 잘못된 내용을 포함한 본인의 지식을 뽐내기 바쁘다. 길의 약혼녀인 이네즈는 폴의 지식에 감탄하고 길의 입을 막으면서 폴의 이야기를 들으라고 말하기도 한다.
더 놀고 싶다며 폴을 따라 파티에 간 이네즈와 헤어져서 파리의 밤거리를 헤매다가 낡은 푸조를 타게 되고 1920년대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2010년대 파리에서 길의 옆에 있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다. 그들은 길의 우상이며, 길을 반겨주고 환영하며, 길의 말을 경청하고, 길이 쓰고 있던 소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다. 약혼녀인 이네즈는 소설을 관두고 다시 할리우드로 돌아가 시나리오를 쓰라고 하지만, 아드리아나는 단 몇페이지만 듣고도 길의 소설에 호감을 가진다.
길이 과거를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이면에는 이처럼 본인이 살고 있는 시대와 환경에서 이해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해받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길이 1920년대로 넘어가서 하는 일은 이네즈가 현실에서 하고 있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매일 밤마다 파티를 즐기고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과 만나서 본인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하며, 매력적인 이성과 썸을 탄다. 이네즈가 폴이나 이네즈의 부모에게 본인이 가지고 있는 물질적 욕망에 대해서 공감을 받듯이, 길 역시도 본인이 가지고 있는 문학과 예술에 대한 욕망을 공감받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 속 길은 낭만적인 로맨티스트라기보다는 찌질한 평범한 한 남자에 더 가깝다. 그런 평범하고 찌질한 욕망이기에 더 설득력을 가지고, 길의 욕망에 대해 호감을 가지게 된다.
길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길은 본인의 욕망이 현실적으로 멀리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과거라는 갈 수 없는 저 먼 어딘가에 이상향을 설정하는 것이다. 그곳은 차를 타야지만이 갈 수 있는 지금 이 순간, 이 장소와는 멀리 떨어진 곳이다.
길은 그곳에서만 본인의 욕망이 충족되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본인의 욕망을 가로막고 있는 존재가 길과 가장 가까운 사람인 이네즈이기 때문이다. 길은 이네즈에게서 벗어나서 아드리아나를 만날때에야 본인의 욕망을 자각하고, 가브리엘을 만나서야 본인의 욕망을 달성한다.
위의 두 사진은 이네즈와 가브리엘의 차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네즈는 비가 오면 질색하며 우산부터 꺼내드는 사람이고, 가브리엘은 비맞으면서 걷는 것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길은 이네즈보다는 가브리엘과 더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이네즈와 같이 있을 때는 이네즈는 차를 타고 혼자 비를 맞으며 걷지만 가브리엘과 같이 있으면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빗속을 걷는다.
즉, 길은 이네즈에게 파혼을 선언하고 가브리엘을 만나면서야 이해받고 같이 공감하고자 하는 욕망이 충족된다. 그 순간 차를 타고 먼 곳으로 가야했던 길의 이상적 공간인 1920년대 파리는 2010년 파리와 겹쳐진다. 이제 길은 클래식 푸조를 타고 1920년대 파리에 갈 필요가 없다. 그가 1920년대 파리에 원했던 것이 이제 바로 옆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