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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닮은 Dec 27. 2021

나는 어떻게 프로모델이 되었나

인맥 없는 평범한 사람이 패션모델이 되려면

잠깐 내가 어떻게 모델이 되었는지 설명해 보려고 한다. 이전 에피소드에서 짧게 설명한 대로 나는 의상학과를 나왔고, 의상학과에서는 졸업할 때 졸업패션쇼를 필수적으로 하기 때문에 옷을 입어줄 모델이 필요하다. 큰 키에 프로포션이 좋은 나는 대학교 1학년 첫 수업에서 담당 교수님께 '뮤즈'로 선택받았고, 그 이후로 선배들의 이목이 내게 쏟아졌다. 학기 초에 수업을 하고 있으면 몰려와서 내가 누구인지 보고 가는 선배들도 있었다. 이후 교내에서 의상학과 졸업패션쇼 모델을 선발하는 대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열렸는데, 그때 나를 뮤즈로 지목했던 교수님이 지원하라며 지원서를 보내주셔서 반강제적으로 지원서를 작성해서 생애 첫 오디션을 봤다.


오디션을 주관한 곳은 과거에 유명 패션모델의 등용문인 '모델라인'이었다. 우리 학교의 패션쇼를 기획하고 총괄하는 김에 모델 오디션도 주최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그날 바로 합격했고, 남자 2 여자 2 중 한 명으로 선발되어 패션쇼에 오르는 모델이 되었다. 패션쇼를 진행하기 전에 룩북이라는 것을 찍는데 처음으로 모델로서 옷을 입고 카메라 앞에 서서 포즈를 취하는 경험을 했다. 이때 나는 이 일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고, 즐겁고 스스로 잘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재능이 있다면 이런 걸까 싶은 마음이 처음으로 들었다.


패션쇼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도수코'에 나온 유명 모델들과 함께 패션쇼를 서는 즐거운 경험을 했다. 이 일로 내 마음속에는 패션모델이라는 꿈이 싹트게 되었다. 이 경험으로 모델 수입이 일반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보다는 수입이 짭짤하다는 걸 알게 되었고, 학교를 다니는 중에 아르바이트로 쇼핑몰 모델을 하기 시작했다. 176cm이라는 큰 키 때문에 일반 온라인 쇼핑몰 모델로는 적합하지 않아서 수차레 떨어졌지만, 한 3군데 정도에서 정기적으로 모델로 일할 수 있었다.


쇼핑몰 모델도 모델이지만, 나는 전문 패션모델로 일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더 커져갔다. 하지만 끼라는 것을 숨겨두고만 살다가 이제 겨우 도움이 되는 쪽으로 사용하고 있는 나에게 프로 패션모델계라는 세계는 두려운 세계였다. 잘은 모르지만, 쉽지 않다고 들어왔던 모델계에서 '적응을 할 수 있을까.''그 문화에 어울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이 나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학교생활에만 전념하면서 지내다가 3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하게 되었고, 1년 동안 나는 진로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열심히 경비 마련을 위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나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보냈다.


1년의 시간을 고민할수록 자신은 없지만, 분명히 하고 싶은 일은 패션모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시 한번 카메라 앞에 서보기로 했다. 친한 언니의 지인이 사진작가로 일하고 있는데, 개인작업으로 모델을 구한다며 소개를 해줬다. 그 언니와 나는 사진에 대한 각자의 열망이 매우 컸는데,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모델과 작가로서 순수하고 날 것의 열정을 열렬히 풀어냈다. 연남동의 작업실이었는데,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카메라 앞에서 자유롭게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그 시간은 내게 생동감 넘쳤고,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줬다. 그리고 분명히 이 일을 해야겠다고 결정한 계기가 되었다. 언니는 그날 많은 셔터를 눌렀고, 지금도 그 모습들은 우리에게 소중한 사진으로 남아있다.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고, 우리의 열정이 녹아있는 멋진 나의 포트폴리오가 되어 주었다.


이 작업 이후로 나는 포트폴리오를 점차 쌓아 나갔다. 그리고 모델이 되기 위한 모든 루트를 찾아 지원했다. 첫 스타트는 팔로우하고 있던 유명 모델이 올린 모델을 위한 운동프로그램에 덜컥 신청하는 것이었다. 모델이 되기 위한 몸을 만들어 주고, 프로그램이 종료되는 시점에는 유명 모델 에이전시와 미팅을 하는 기회를 준다는 것이 조건이었다. 나는 1년 동안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모아둔 종잣돈 100만 원을 고민도 없이 그 프로그램에 사용했다. 처음 상담을 받았을 때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돈을 지불하는 내 입장이 을이라는 조금 이상한 계약이었다. 도대체 이런 계약서는 왜 작성하는 건지 의아했지만, 나는 당시에 간절했고, 인맥이라고는 전무했으니 다른 대안은 없었다. 2달 정도의 기간 동안 진행되는 그 운동 프로그램에서 나는 모델 세계는 내가 생각했던 대로 힘들고 어려운 곳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고, 정신은 피폐해졌다.


먼저 모델이 되어 교육을 하고 있는 입장이라는 그 갑의 처세는 막말에 기를 죽이는 일이었다. 24살이면 어디 가서 함부로 대우받을 만큼 적은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나는 먼저 모델이 되어 가르쳐준다는 그 갑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이유 없는 욕을 먹으며 강도 높은 서킷 트레이닝 훈련을 받았다. 운동 강도가 워낙 셌기 때문에 살은 빠졌으나,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다시 먹기를 반복해 나는 결국 마지막 코스를 마치고 "너의 몸이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델 에이전시와 연결을 해줄 수 없다"는 통보만을 받고 끝났다. 그때 그 사람들이 너무 밉고 내가 들인 노력과 선택 그리고 받은 처우가 억울해서 많이 울었다. 공허하다는 생각과 모델이 되는 길이 안개같이 뿌옇다는 이미지가 가득 차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


4학년으로 복학을 하고, 올해까지만 도전해보고 안되면 미련 없이 접자고 생각하고 학업과 모델이 되기 위한 여정을 병행했다. 모델대회란 대회는 다 찾았고, 모델 구인 공고가 올라오면 그동안 찍어두었던 사진을 포트폴리오로 지원했다. 그 해에는 내게 행운이 깃든 해였던 게 분명하다. 그동안도 여러 모델대회에 지원을 하고 최종까지 올라가는 일은 많았지만, 선정이 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2014년에는 모델대회에서도 입상을 하고, 좋은 브랜드의 모델로도 선발이 되어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포트폴리오는 더 쌓여갔고, 나는 돈이 아까워서, 그리고 이미 모델의 스킬적인 부분은 알고 있었기에 지원하지 않으려 했던 모델 아카데미에 등록했다. 처음 모델이 되고 싶었던 때가 21살이니까 이미 4-5년이 지체되었고, 더 이상의 시간이 흐르기 전에 돈으로 시간을 사자는 생각이었다. 250만 원이라는 당시 내게는 거금인 돈을 학자금 생활비 대출로 받아 모델 아카데미에 등록했다.


그때 내 각오는 대단했다. 처음 학원에 가는 길을 사진으로 남겨서 날짜와 함께 인스타그램에 올려두었다. 아카데미가 끝날 때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기록해 두었다. 학교에서는 수업과 졸업작품 준비 그리고 교내 아르바이트를 병행했고, 수업이 끝나면 곧장 아카데미에 가서 3시간씩 모델 훈련을 받았다. 다이어트도 병행해서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정말 타이트한 시간을 보냈다. 25살에 13살~17살 되는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받는 것은 많이 힘들었다. 철없는 친구들과 동일한 선 상에서 학생으로 지내는 일이 생각보다 스트레스였다. 나는 모델이 되고 싶은 마음도 그를 위한 노력과 도전도 수없이 해온 상태에서 수업을 듣는건데 다른 친구들은 그냥 한번 해볼까 싶어서 등록해본 느낌이어서 임하는 자세가 많이 달랐다. 진지함의 정도가 다른 것이 내겐 스트레스였다.


아카데미에 다니는 도중에 내가 다닌 모델 아카데미 에이전시에서 w매거진과 주최하는 모델대회가 열렸다. 나는 언제나 모델대회를 서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리 알고 가지고 있던 포트폴리오로 지원을 해둔 상태였다. 아카데미에서는 수업시간에 이런 대회가 있으니 다들 지원을 하라고 이야기해줬다. 당시에 내가 올린 포트폴리오는 유명 브랜드의 모델로 선발되어 찍은 사진들이었는데, 그 사진들의 반응이 좋았다. 5000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렸는데 나는 그 가운데 100명 안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실물심사 오디션을 봤다. 다이어트를 계속해서 하고 있는 중이었지만, 수영복 심사에서는 자신이 없었다. 나는 모태 마름이지만 복부비만인 선천적 체형이 콤플렉스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지원자들은 비키니를 입었지만, 나는 집에 있던 아레나 원피스 수영복을 오디션 복으로 정했다. 너무 떨려서 준비해 간 장기자랑에 부른 뮤지컬 노래는 염소가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다른 참가자들에게는 이런저런 질문도 많이 하는 것 같던데 나에게는 별 질문을 하지 않아서 나는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예상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오디션에 나는 8명 안에 들었고, 심지어 그 실물심사에서 1위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꾸준히 준비해 온 것들이 빛을 발했던 것 같다. 나는 결과에 연연하는 마음보다는 최선을 다해 후회가 없는 것이 더 중요한 상태였다. 그만큼 후회 없이 준비하고 도전했던 것 같다.


막상 8 안에 들어가니까 거기서는  욕심이 났다. 1등이 하고 싶었다. 1등이 되면 w매거진의 표지모델, yg케이플러스와의 전속계약, 디올의 모델이 되는 엄청난 혜택이 주어졌다.  대회는 sns 기반으로 투표를 진행하는 서바이벌 오디션으로  4번의 미션을   동안 하는 대회였다. 잘하고 싶었고, 이기고 싶은 마음이 강해서 대회가 진행되는 동안은 스트레스를 정말 많이 받았던  같다. 다행히 나는 sns 투표에서 유력한 후보여서  투표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8  정도의 차이로 높은 표수를 얻어 1등을 했다. 이때 진행했던 화보 촬영은 꿈에 그리던 무대였다. 긴장되고 스트레스는 받았지만, 정말 즐겁고 설레었다. 결국 나는 최종 결과로 1등은 하지 못했지만, 높은 대중 투표 덕에 '인기상' 받았고, 모델 아카데미 졸업 오디션에서 선발되어 전속계약을 맺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마지막 패션 화보는  인생 화보라고 생각한다. 촬영 당시에는 컨디션 난조와 난감한 키워드에 당황하고 힘들었지만, 결과가 좋아서 너무 뿌듯했다.


모든 과정을 마쳤을 때 내 몸무게는 47kg까지 빠져있었다. 내 키가 176cm인데 47kg이면 정말 뼈다귀로 걸어 다니는 수준이다. 해외 패션위크에 서는 모델들의 몸무게가 이 정도이긴 한데, 당시 사진을 보면 정말 뼈밖에 없다. 뼈가 시리다는 느낌이 뭔지 알 정도로 살이 빠졌다. 다이어트와 스트레스 덕에 내 인생 최저 몸무게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길을 가다 쓰러지기도 했고, 정말 체력적으로도 심적으로도 모든 걸 쏟아부었던 1년의 시간이었다. 오래도록 고민하고 준비했던 것들과 더불어 1년의 시간 동안 후회를 남기지 말자는 일념으로 도전했던 나의 '프로 모델되기 프로젝트'는 그렇게 마침표를 찍고, 나는 프로 패션모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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