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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ulton Feb 02. 2017

악필로서 살기

더 이상은 페이퍼는 자필로 쓰여지지 않는다.

본인은 원래 굉장히 심각한 악필이다. 그래서 솔직히 학창시절에는 꽤나 한소리들을 많이 들었다. 그렇게 글씨를 쓰게 되면 어른이 되서 평판이 안좋다느니 하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교정에 꽤나 시간을 많이 투자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필기 교정은 실패했다. 오히려 스트레스를 더 받고 이렇게 필기 가지고 고생할 바에는 타이핑에 더 시간을 쓰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그 때의 판단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물론 이 선택’만’이 옳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선택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도 맞았다. 대학생이 된 이후로 자필로 낸 과업은 역사상 하나밖에 없었다. 대부분 다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을 비롯한 기타 오피스 프로그램, 조금 더 복잡하면 통계 패키지나 데이터베이스 관리 프로그램으로 이뤄졌다. 손글씨로 해야만 하는 일은 더 이상 내 업무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결과론적으로 필기교정에 신경을 쓰는 것보다 차라리 타이핑과 여러 프로그램을 익혀둔 것이 오히려 더 실질적으로 더 도움이 되었다.


그럼에도 나의 필기에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쨌든 공부는 많은 부분 손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페이퍼가 되었든, 뭐가 되었든 더이상 결과물로서 필기물을 남기는 것은 이제 사실상 결재 이외에는 없지만, 많은 경우 리딩을 하는 과정에서 리딩을 할 때의 ‘밑줄긋기’와 ‘단상메모’, 그리고 ‘크로키 정리’는 자필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또한 살면서 회의는 많고 회의에 이은 메모도 적지 않기 때문에 나중에 내 글씨를 볼 때 썩 맘에 안들 때가 많다는 것도 그런 문제로서 자리잡고 있다. 좋은 만년필과 예쁜 색의 잉크를 사면 뭘 하는가? 그 글씨가 기능적인 면에서도, 심미안적인 면에서도 문제가 될 것이 많으니 더더욱 그렇다.


만년필이 특이한 점은 계속 사용하다보면 사용자의 ‘필압’에 펜이 길들여진다는 것에 있다. 내가 쓰는 만년필을 다른 사람들이 빌려 사용하면 다들 못쓰겠다고 한다. 그 이유를 보면 다름이 아니라 내 필압이 너무 높다는 것이다. 만약 내 악필의 원인을 찾고자 한다면 다른 사람들보다 지나치게 필압이 높게 익숙해져 있어서 다른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적절한 필압으로 필기를 못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본다. 악필에 대한 원인을 찾는 중에 든 가장 유력하고 설명력이 높은 가설은 바로 저것이었다. 높은 필압에서 최적화된 획 긋기가 이른바 악필을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이제 와서 필압을 낮춘다고 글씨를 잘 쓰지는 아마도 그렇게는 못할것 같다.


이른바 ‘정보화시대’가 도래하여 자필 없이 살아가는 게 불가능해진 시대가 아니라는 점은 무척 다행인 일이다. 공부를 하고, 일을 함에 있어서 자필에 대한 의존이 없이도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다는 현실을 내 앞 세대와 그들이 살았던 과거에 비춰볼 때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바라보고 연구하는 주제들이 바뀐 세상을 반영하듯, 나의 페이퍼 작성 역시 변화한 세상 위에서 쓰여지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설령 내가 쓰는 페이퍼가 과거의 주제를 다룬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순히 과거를 설명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함의가 현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결국 그 페이퍼를 작성하는 방법 역시 현대를 반영할 수 밖에 없으며, 또한 거기에 순응하는 것이 어느정도 맞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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