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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ulton Apr 01. 2017

역사문제에서의 화해의 모호함

더 이상 화해로 안 되는 이유

전두환과 이순자의 회고록에 대한 논란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하나 있는데, 가해자의 용서 없는 화해는 사실 방관보다도 피해자에게 상처를 더 준다는 것이다. 주 전공이 이러한 국가 간의 역사와 기억의 문제를 한때 했었는데, 그때도 느꼈던 것 중 하나가 이른바 ‘화해’라는 개념이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모호하다는 것이다. 그림으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국제정치적 차원에서의 역사문제에서의 ‘화해’를 이야기해왔다. 그러나 화해에 대해서 생각보다 많은 부분 나이브하게 개념이 사용되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다. ‘반성과 책임 인정’, ‘방기’, ‘합의’와 달리 화해는 너무 넓은 영역에서 사용될 수 있다. 역사문제에서의 화해를 논하는 행위자를 보게 되면 실제로 서로 다른 ‘화해’를 말하는 행위자가 너무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식민지 범죄에서의 일본이 말하는 화해는 일부의 진보적인 시민 집단을 제외하면 대부분 방기에 가까운 화해를 말한다. 그러나 이를 지적하는 한국에서의 입장은 반성과 책임 인정에 가까운 화해를 말한다. 그리고 Sherman의 발언 같은 경우에서 언급되는 화해는 ‘합의’에 가까운 ‘화해’를 말한다. 

이렇게 다양한 화해는 화해라는 말로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특히 이를 현실적인 정책으로 수립하는 데 있어서는 더욱 그 의미가 퇴색할 수밖에 없다. 무엇도 ‘화해’가 된다면, 그 무엇도 ‘화해’ 가아니라는 말도 성립 가능하지 않는가? 한동안 역사문제에서의 화해를 말하는 사람은 적지 않았다. 실제로 이러한 화해가 기존의 지지부진한 국가 간의 역사문제에서 돌파구를 제시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역사문제에서의 화해는 더 이상 어떤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굳이 가치를 찾자면 자국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레토릭이자, 동시에 자국의 주장을 우회할 수 있는 하나의 레버리지로 기능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레토릭과 레버리지가 외교의 층위와 국가 간 관계의 층위에서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어렵다.


역사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수많은 사례가 입증한다. “액트 오브 킬링”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역사문제의 기저에 깔려 있는 행위자와 당사자들 아래에 깔려 있는 심리적 문제는 한없이 복잡하며 이러한 행위자와 당사자들 사이에얽혀 있는 상호작용의 문제는 역사문제의 사실관계를 복잡하게 하지는 않지만, 역사문제의 해결을 복잡하게 만들기에는 지나치게 충분하다.

무정부적인 상태가 전제가 되는 국제정치에서는 양 국의 신호가 분명할 때 오인의 문제가 줄어들고, 이를 해결하는 비용 역시 감소한다. 문제는 ‘화해’라는 개념은 이 문제를 모호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기에는 화해라는 개념이 지나치게 확대되어 버렸다. 이런 차원에서 필자는 확대라는 개념을 더 이상 역사문제에 사용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재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역시나, 한국 국내 정치의 과거에서의 역사문제의 ‘화해’ 역시 양측의 행위자가 납득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이뤄지지 않은 화해이고, 그것은 ‘화해’라는 말을 뒤집어쓴 그 무언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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