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어린 시절엔 세상 모든 일들이 그저 재미있기만 했던 것 같다. 아이가 좋아하는 일들이 무릇 그렇듯이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걸 왜 좋아했을까 싶다. 개미가 지나가는 걸 하루 종일 지켜보다가 가끔씩 죽인다든가, 기차가 지나가는 육교에 앉아 몇 시간이고 기차가 지나가는 걸 구경하기도 했다. 술래잡기 같이 뛰어다녀야 할 일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뒷산으로 도룡뇽을 잡으러 가는 건 좋아했다. 이상해보이지만, 아이들이란 무릇 그런 것이리라.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그 시절에 내게 원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아이들은 딱 한 가지 원칙에 따라 행동한다. 이건 말하자면 아이들 마음 속에 존재하는 헌법이다. 프랑스 혁명 선언문의 첫째 조항에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문장이 있는 것처럼, 추측컨대 아이들의 마음 헌법 첫째 줄에는 이런 내용이 써져있다. ‘재미있으면 하고, 재미없는 일은 하지 않는다.’ 소문에 의하면 이 유일무이한 규칙을 조금씩 어기는 친구들에게는 아이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하는 형벌이 주어진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 형벌을 피한 사람은 여태, 어느 누구도 없었다고 한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형벌에 처해진 것은 아마 13~4세 무렵이었던 것 같다. 여기에는 물증이 있다. 그 무렵부터 재미있는 일을 하는 데에 늘상 따라붙었던 죄책감이 바로 그 증거였다. 우리가 재미있어 하는 일들은 늘 선생님이나 부모님이 금지, 혹은 통제하고자 하는 대상이었다. 그 때문일까,천성이 본래부터 착하디 착한 나는 그런 일들을 하는 데에 당연히 죄책감을 느꼈다. 그건 내가 아이에서 조금씩 자라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하자면 슈퍼이고가 커가는 것이다. 하지만 ‘Guilty pleasure’란 말처럼, 누군가가 금지하면 할수록 재미있는 일들은 더 재미있어지기 마련이었다. 스타크래프트에서부터 에반게리온 같은 만화, 수업시간에 늘 읽었던 판타지소설들, 힙합까지. 심지어는 당시 유행하던 메신저에서 부모님 몰래 친구들에게 라디오 방송을 송출하기도 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를 나로 만들어준 것은 이처럼 재미있는 것들에 심취해 있었던 시간이었다. 재미있는 일을 하며 내게는 무엇은 좋다 무엇은 싫다와 같은 취향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 취향은 점차 ‘나는 어떤 사람이다’라는 자의식을 만들어 주기 시작했다. 수업시간엔 다 같은 중학생이었지만, 음악을 들을 때 나는 발라드 따위는 듣지 않는 힙합 전사였고 게임 속에선 골수 프로토스 유저였으며 해리포터의 마지막 시리즈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아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이야말로 분명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시간이었다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현재의 나에 대한 밑그림을 나는 아마도 그 시절에 그런 식으로 그려나갔던 것 같다.
하지만 악명 높은 한국의 고등학교 시스템을 관통해 대학에 왔을 때, 나는 다시 중학교 이전의 어린아이로 돌아가 있었다. 공부를 해야 하는 시기에 해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을 너무도 잘 들었던 나는, 3년 내내 재미있었던 일들을 애써 지우려고 노력했다. “고등학교 3년이 인생을 좌우한다”는 격언이 왜 그때는 꼭 공부만을 해야 한다는 말처럼 들렸을까. 그리하여 나의 대학시절은 마치 토탈리콜의 아놀드 슈워제네거 같았다. 지워진 기억을 찾아 헤매며,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다시금 떠올려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단 한가지 행운이 있었다면 그건 고등학교 시절 아무런 생각 없이 선택했던 영문학과였다. 만약 경제학과를 갔더라면 나는 그저 정해진 것처럼 은행원이 되었을 수도 있고, 경영학과를 갔더라면 그냥 회사에 갔을 것 같다. 하지만 영문과에서 마주친 소설들은 결코 내게 길을 제시해주거나, 정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나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매리 쉘리의 프랑켄슈타인은 내게 인간이란 무엇인가 물었고, 멜빌의 바틀비는 내게 어떤 삶을 살 것인가 물었다. 학과공부는 그저 질문의 연속이었으나, 사실은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행운이었다. PC방과 당구장에서 하루를 보낼 정도로 수업과 성적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어쩔 수없이 생각이란 걸 해봐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는 그때 그 중학교 시절처럼 내가 어떤 사람인지, 뭘 하고 싶은지를 조금씩 떠올릴 수 있었다. 진로를 무작정 결정하기 전에 마주친 그 질문들이 있었기에, 좀 더 선명해진 '나'로서 무엇이든 결심할 수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어린 시절 그렸던 밑그림에 색을 조금 칠하게 된 것이다.
그 후의 지난한 과정을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년 후’로 처리하고서(언젠가 따로 정리할 기회가 있겠지), 현재는 일단 어쨌든 좋아하고 재미있어 하는 일을 하며 살고있다. 이 일로 먹고산다는 것이 뿌듯하기도 하고, 아직 뿌듯하기는 먼 것 같기도 하다. 어찌됐든 중요한 건 내가 가장 재미있어 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기로 결정했다는 것에 있다. 물론 현재로써는 최선의 결론이지만, 이것이 무조건 옳다는 확신까지는 없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싫어지게 된다는 격언이 맞는 말 같기도 하고, 선배들은 오히려 드라마를 예전보다 더 못 보게 된다고 씁쓸하게 얘기한다. 요즘에는 먼 길을 돌고 돌아서 “재미있으면 하고, 재미없으면 하지 않는다.”는 어린 시절의 결론으로 돌아온 내가 남들에 비해 전혀 성장하지 못한 것 같아 부끄러울 때도 있다. 누군들 일이 꼭 좋기만 해서 하겠는가. 하지만 먼 길을 떠나 돌아온 곳이 결국 출발점이었다고 해도, 그 여정 역시 의미 없는 일이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법이다.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도, 센과 치히로의 치히로도 결국 집으로 돌아오지만 그들은 분명 성장한다. 그리고 나 역시도 그 여정을 통해 내 자신을 그려오면서, 작지만 부지런히 성장해왔다고 믿는다.
딱 하나 아쉬운 점이라면 누군가 오늘처럼 “What do you do for fun?”이라 물었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보고 읽는 일을 이제 취미라고 하기엔 민망하기 때문이다. 일이 이렇게 되어서, 나는 이제 평생 딱 하나 있던 취미를 잃어버린 꼴이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실 아직까지는 이 삶은 이것대로, 그리 아쉬울 건 없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