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After pm 6

필름카메라에 대해

by 하나하면둘


1. 제주도

요즘 들어 내가 재미있어 하는 일은 필름 카메라를 찍는 일이다. 처음 중고 카메라를 구매하고 찍은 건 4년 정도 전이었는데, 한창 손에서 놓고 있다가 얼마 전 제주도를 혼자 다녀오면서 사진을 찍은 후로 다시 재미가 붙었다.


이번에는 혼자서 제주 바다를 삥 둘러 있는 트레킹 코스인 올레길의 16코스와 17코스를 이틀에 걸쳐 종일 걸었는데 춥지도 덥지도 않아 걷기에는 그만이었다. 게다가 도심에서는 볼 수 없는 코스모스, 메밀꽃, 억새가 걷는 곳곳마다 보여 캘린더가 아니라 눈과 피부로 가을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 빠듯하게 걸을 요량으로 숙소를 예약해 하루에 거의 7시간 정도씩은 꼬박 걸어야 했지만, 그럼에도 평일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있을 때보다 훨씬 더 쉬고 있는 기분이었다. 산이며 계곡이며 바다며 걸을 때마다 바뀌는 풍경에 집중하고, 카메라를 들고 어떤 곳을 어떻게 찍을지 고민하다 보니 머릿속에 잡념이 자리할 틈이 없었다. (딱히 결과물에는 자신 없지만) 부쩍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진 요사이였는데, 오랜만에 머릿속이 조용해졌다. 자연의 힘인지, 걷기 운동의 효과인지, 둘 다 인지는 모르겠다.


사실 애초에 걸으면서 풍경을 보는 게 첫번째 목표였고, 사진 찍는 것은 나중에 생각한 일이었다. 그저 ‘혼자서 걷기만 하면 좀 심심할 테니 카메라나 가져가볼까’란 가벼운 마음이었는데 막상 걷기 시작하니 잘 가져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전히 목적지까지 걷기만 했다면 조금 지루하기도 했을 텐데, 좋은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그 곁가지의 목적이 혼자 걷는 길에 활력을 불어넣어줬다. 혼자서 일곱 시간을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걷는 데에도 별로 심심하지도 않다니 신기하기도 했다. 사진기를 하나 들고 다니니 뭔가 폼도 난다고 속으로는 생각했던 것 같다. (산길이라 딱히 사람을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다)


문득 삶에서 취미생활이라는 게 이렇게 걸으면서 사진찍는 일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삶에도 각자 가진 목적지야 있겠지만, 그곳까지 도착하기 위해서 걷기만 하는 일은 너무 지루하고 또 그러기엔 인생은 너무 길다. 그러니 우리는 이런 해도 그만이고, 안해도 그만일 소일거리들을 하면서 그 걷는 길을 좀 더 풍성하게 이것저것 채워 넣으려 하는 것이 아닐까. 게다가 생각해보면 산다는 건 꼭 어떤 목적지에 도착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캐논 ae-1p / Kodak colorplus200 / 2025-10-09~10

2. 8월의 크리스마스

필름카메라를 처음 사게 된 계기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1998)’를 보고 난 후에 사진기가 사고 싶어 졌던 것 같다. 왜 굳이 철 지난 필름 카메라였냐고 묻는다면, 필름으로 찍힌 그 영화의 장면들이 너무 예뻤고 필름 카메라 쪽 예전 디자인이 좀 더 내 취향이었다는 것 정도의 이유였던 것 같다.


여튼 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인 8월의 크리스마스의 줄거리는 사실 평범하기 이를 데 없다. 영화는 불치병에 걸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주인공이 한 여자를 만나 사랑하게 되며 삶에 애착을 가지게 된다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멜로영화의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사진이 가진 매력을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는 영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 영화는 움직이는 사진이기도 하니, 그 말은 즉 이 영화는 ‘영화’라는 매체의 매력을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한 것이다.


우선, 영화의 내용 전개에서 사진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주인공의 직업은 사진사인데, 그가 여자를 만나게 되는 계기가 바로 사진이다. 주차단속원인 여자가 불법주차된 차량의 사진을 찍으면 인화하러 오는 곳이 바로 그의 사진관이다. 그는 이곳에서 여자를 눈여겨 보고 말을 걸며 두 사람의 만남은 시작된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게 되며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삶에 애착이 생기게 된다. 여기서 사진은 곧 세상에서 사라질 그와 계속해서 존재할 그녀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는 그들의 사랑이 가장 빛이 나는 순간에도 사진을 찍고, 자신이 사라질 준비를 할 때에도 스스로 자신의 영정 사진을 찍는다. 곧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그는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닿아 있기 위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진을 찍어 놓는 것이다. 그의 직업이 사진사이기도 하겠지만, 불치병에 걸린 그에게 남아있는 선택지랄 게 이것 외에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가 스스로 찍은 영정사진과 그녀의 사진

영화의 마지막은 여자가 죽은 남자의 사진관 앞을 지나가며 그 쇼윈도에서, 서로 행복했던 시절 남자가 찍어주었던 자신의 사진을 보고 웃는 모습으로 끝이 난다. 남자가 여자에게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사진은 결국 남자 자신의 영정 사진이 아니라, 여자의 웃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아마 추측컨대(영화에 나오진 않지만) 남자는 끝까지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 그랬을까. 남자가 죽어서까지 그녀에게 자신을 남기고 싶었다면, 여자가 자신의 장례식에 와서 그가 찍어놓은 영정사진을 보도록 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여자가 그들이 좋았을 때에 찍어놓은 그녀의 사진을 보게한 것은, 그가 세상에 남기고 싶었던 것이 자신이 아니라 그들의 행복했던 순간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자신을 남기고 싶은 게 아니라 그 순간을 붙잡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순간을 잠시나마 붙들어매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진의 본령이다.


시간은 계속해서 흐른다. 그 속에서 어떤 것은 사라지고 어떤 것은 새로이 생겨난다. 헤라클레스든 토르든 신화 속에 나오는 역사들이라 해도 단 1초라도 그 순간을 움켜쥐고 정지해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사진만큼은 1000분의 1초, 2000분의 1초일지라도 그 순간을 남기고 보여준다. 이것은 매우 사소하다면 사소한 일이겠으나, 그 물결 같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작은 편린이라도 남기는 것은 그리 작은 일만도 아니다.


3. 나의 필름카메라


여간 그렇게 해서 나는 필름 카메라를 구매하게 되었다. 내 카메라는 캐논의 ae-1 모델인데, 이 모델은 조리개 값과 셔터스피드를 자동으로 조절해주는 기능이 있는 ae-1p(program)모델과 ae-1 모델이 있다. 내가 구매한 것은 자동으로 조절이 가능한 program 모델이었다. 다만 사용하다 보니 자동이긴 해도 그다지 정교하게 조절이 되는 건 아닌 것 같은 게, 찍어놓고 보면 조리개 값이 과도하게 열려 있어서 사진이 날아가버린 경우도 꽤 있고, 많이 흔들린 사진도 많았다. 게다가 이 자동으로 조절해준다는 기능 자체 덕분에 찍는 사람도 은근히 의존적이 되어버려서, 상당 부분 의지하게 된다는 것도 단점이었다. 한번은 사진관에 사진을 현상하러 갔더니, 사장님이 “초반에는 필름을 몇 개 버리더라도 수동으로 찍어보는 게 훨씬 더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라는 조언을 해주시기도 했다. 그러니 여러분은 애초에 수동으로 구동되는 카메라를 사는 것이 좋을 것 같기도 하다. ‘자동 기능이 있는 걸 사서 수동으로 찍으면 되지’하고 생각하겠지만, 간악한 인간이란 존재는 조금이라도 편한 길로 가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늘 명심하도록 하자.

캐논 ae-1 모델

필름 카메라는 분명 불편하다. 일단 무제한으로 찍을 수 있는 휴대폰이나 디지털 카메라와는 달리 필름 1롤 기준 24장~30장 정도 밖에 찍지 못한다. 이제는 필름이 사양산업이 되어 규모의 경제를 누리지 못하는 덕분에, 필름의 가격은 점점 높아져 저렴한 필름도 만원이 넘어가는 처지니 한번 셔터를 누를 때마다 500원 정도는 드는 셈이다. 게다가 촬영의 결과도 바로 확인할 수 없다. 찍어놓고 인화를 해야만 결과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찍자마자 인화를 하러 가도 2~3일 정도는 걸린다. 요즘은 인화를 해주는 곳도 많지 않기 때문에 보통 인터넷으로 보내는데, 필름을 보내고 현상/스캔해서 나에게 오는 시간을 생각하면 일주일은 족히 걸린다.


다만 이런 필름 사진의 단점은 분명 단점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필름카메라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찍을 수 있는 사진의 개수가 제한되어 있어 보다 더 신중하게 한 장, 한 장을 소중히 여기면서 찍게 되고, 바로 결과물을 확인할 수 없는 점은 휴대폰 카메라나 디지털 카메라에서 느낄 수 없었던 설렘을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결과물이 어떻게 나왔을까 궁금해지고, 기다리는 마음은 그때그때 바로 결과를 보고 지울 수 있는 디지털 환경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마음인 것이다. 연인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받는 것과 편지를 받아드는 것 사이에는 당연히 아주 큰 차이가 있지 않은가.


4. 필름 카메라의 매력

우리는 대개 무언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무언가가 너무 넘쳐 흘러 도리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SNS에서, 릴스에서, 유튜브에서 보고 듣는 것들은 너무나 많지만 너무 많기에 기억에 남는 것은 거의 없다. 음악 스트리밍은 편리하게 음악을 즉시 고를 수 있지만 그 덕에 어떤 음악을 소유한다는 cd나 lp시대에 존재했던 감각을 느끼기는 어렵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언제든 몇장이든 찍을 수 있지만 그 덕에 한장 한장의 가치는 절멸한 듯이 느껴진다.


이런 세상에서 필름 사진이 주는 불편은 기꺼이 감수하고 싶은 불편함이다. 신중하게 찍는 덕분에(물론 돈이 아주 많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사진 한장 한장은 보다 더 소중해지고, 기억에 남는 사진의 수만 따지자면 굳이 디지털에 뒤지지도 않는 것처럼 보인다. 현상하는 데에 오래 걸리는 덕분에 사진을 받아 들기 전까지는 어떤 사진이 나올지 기분 좋게 설레어 볼 수 있다.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면서 나는 편리하다는 것이 언제나 우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은 알게된 것 같다. 특히 즉각적인 도파민 보상과 피드백이 존재하는 디지털 세계와는 달리 인간의 마음 속 어떤 감정들은 물리적으로 충분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면 '그리움'을 느끼려면 그 대상을 충분한 시간 동안 볼 수 없어야 할 것이고, '설렘'이라는 감정은 그 자체가 어찌 보면 기다림과 함께 수반되는 것이다. 디지털 기기는 그런 감정을 느낄 시간을 강제로 앗아간다. 편리함 속에서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필름 카메라는 종종 깨닫게 해준다. 어떤 감정은 디지털 기기가 작동하는 속도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가끔 내가 찍어놓은 사진이나, 필름으로 촬영된 멋진 옛날 영화를 보며 감상에 빠지곤 한다. 사진에 자글자글한 노이즈, 색이 약간은 바랜듯한 색감 같은 걸 보고 있자면 내가 경험한 적 없는 과거가 그리워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나이가 들면 팥이 들어간 아이스크림이 좋아지고, 혼잣말에 멜로디를 붙이게 되는 것처럼 인간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연스레 좋아지는 것이 있는 걸까. 여간 현생 인류의 몸은 원시시대 호모 사피엔스와 다를 바가 없다는데, 그 태고의 감각에는 역시 디지털이 새겨져 있지 않은 것이 아닐까.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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