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인에 중독된 인어공주

인간이 될 것인가, 인어로 남을 것인가?

by 바론

깊고 어두운 바다 밑에 인어의 나라가 있었습니다.

인어의 나라에는 일곱 명의 인어 공주 자매들이 살고 있었어요.

"막내야 생일 축하해!"

"열다섯 번째 생일을 축하해!"

"이제 바다 위 세상을 구경하고 오렴."

인어는 열다섯 살이 되어야 비로소 바다 위 세상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막내 인어공주는 언니들의 축하를 받으며 신나게 바다 위로 헤엄쳐 올라갔어요.

'바다 밑은 너무 심심하고 따분했어.'

'어머나 바다 위는 공기부터가 다르네'

밤의 해변에서는 화려하고 멋진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시커먼 하늘에는 오색 불꽃이 피어오르고 EDM 리듬이 물 흐르듯 춤을 추고 있었어요.

"사장님,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앗, 저 사람도 나와 생일이 똑같네'

가까이서 남자의 얼굴을 본 인어공주는 깜짝 놀랐어요.

'어쩌면 저렇게 잘 생겼을까?'

그 남자는 태양빛에 적당하게 그을린 커피색의 피부, 헤이즐넛 향처럼 진한 이목구비

그리고 카푸치노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죠.

그 남자는 물 좋은 바닷가에서 '불가사리'라는 오션뷰 핫플 카페를 개업한 청년 사장님이었어요.

인어공주는 카페인 같은 그 남자의 매력에 첫눈에 중독되어버렸습니다.


밤은 깊었고 음악도 불꽃도 그치고 바다가 조용해졌어요.

인어공주는 바다 위를 떠나지 않고 남자를 지켜보고 있었어요.

그 남자는 혼자서 주섬주섬 짐을 챙겨 서핑을 하러 나왔어요.

어두운 밤을 더 깜깜하게 만들려는지 선글라스를 쓰고

두 손으로 들어도 무거울 것 같은 서핑보드를 구태여 한 손으로 들면서 말이에요.

서핑보드를 든 남자의 오른쪽 삼두근은 서핑보드 위의 비실비실한 다리처럼

벌써부터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어요.

그의 왼손에는 잠을 깨려는지 밤을 새우려는 것인지 모를 디카페인 아이스커피가 들려있었습니다.


'밤의 바다 물결은 거칠어서 혼자서 파도를 타면 위험할 텐데'

인어의 직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죠.

갑자기 집채만 한 파도가 덮쳐서 남자는 물속으로 빠지고 말았지요.

인어는 입에 거품을 물고 까무러친 그 남자를 무사히 구해주었어요.

인어 공주는 바닷가에 남자를 뉘었어요.

"제발 살아나 주세요, 사장님."

별안간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구급차가 도착했어요.

인어공주는 재빨리 바위 뒤로 몸을 숨겼어요.

남자가 서핑을 나가기 전 SNS에 올린 '#불가사리카페#야간서핑#낭만' 이라는

해시태그를 검색한 어떤 아가씨가 해양 구조대에 신고한 덕분이었어요.

"초보가 혼자서 야간 서핑이라니요? 당신, 이 아가씨 아니면 정말 큰일 날뻔했어요."

"나를 구해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남자는 아가씨에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다음 날 인어공주는 남자를 잊지 못하고 다시 바닷가로 올라갔습니다.

남자는 해변에서 달빛을 받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어요.

'아, 사장님, 사장님을 구해 드린 사람은 바로 저예요.'

인어공주는 슬픔에 잠겨 중얼거렸어요.

그러나 크게 외쳐 소리가 들렸다 해도 남자는 들을 수 없었습니다.

남자의 귀에는 항상 콩나물 대가리 모양의 무선 이어폰이 꼽혀있었기 때문이에요.


인어 공주는 이렇게 남자를 포기할 수는 없었어요.

인어 공주는 마녀를 찾아갔습니다.

"도와주세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바보 같은 소리, 인간이 되면 다시는 인어로 돌아올 수 없다!."

"상관없어요, 저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요."

"인간이 되면 평생 일을 해야만 한다. 바다 밑에서 편하게 사는 게 나을 텐데."

"저는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정 그렇다면, 그럼 너의 목소리를 내놓는다면 인간이 되게 해 주지."

"사람이 된다면 말하지 않고 듣기만 해도 행복할 거예요."

"그리고 넌 두 다리로 걸을 때마다 칼로 배를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될 거야."

"아름다운 세상을 걸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요."

"또 네가 인간이 되어도 카페 사장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넌 거품으로 변할 거야.

그래도 인간이 되고 싶은 게냐?"

"네, 제 결심은 절대로 변하지 않아요."

"나 때는 말이야, 바다 밑에서 헤엄치고 소라 껍데기만 주워도 만족했었는데 요즘 인어들이란..

정 그렇다면 이 물약을 마셔라."

마녀는 에스프레소를 10샷 추가한 검은 물약을 인어공주에게 주었어요.

물약을 마시자 갑자기 인어공주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밀물이 빠지고 썰물만 남게 되었을 때 인어공주는 정신이 들었어요.

그때 산책을 하던 남자가 인어공주를 발견했어요.

"저기요, 커피 한잔하실래요?"

사람이 되어 꿈에 그리던 남자와 만나게 되었지만 인어공주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어요.

"저런 말을 못 하시는구나. 요즘은 말보다는 텍스트로 소통하는 시대죠.

저희 카페에 취업시켜 드릴게요. 사장과 직원이라 생각하지 말고 파트너라고 생각하고 함께 일해봐요.

손님들도 비대면 키오스크로 주문하시니까 말은 필요 없어요."

사장님은 인어공주를 카페로 데리고 갔어요.

인어공주는 표준 근로계약서를 작성했지만 아직 어려서 주휴수당이나 휴게시간은 알지 못했어요.

인어공주는 불가사리 카페의 점원이 되어 사장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정말 행복했어요.

"오늘 일 해보니 어땠어요, 힘들지는 않았어요?"

"아니요, 이상하게 커피를 마시니까 없던 힘도 불끈 솟는걸요."

라스트 오더를 받고 영업을 마감하려는데 사장님을 구해주었던 아가씨가 개업 선물을 들고 찾아왔어요.

"사장님, 이거 예쁘죠?, 고흐의 <밤의 카페테라스>라는 그림이에요. 카페에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안 그래도 카페 인테리어로 그림 하나 필요했는데 유럽 느낌 나는 인생샷 포토존 좋아요."

인어공주는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둘을 뒤로하며 고흐의 그림을 바라보았어요.

'카페를 너무 슬퍼 보이게 그린 것 같네. 고흐라는 사람은 커피보다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나 보구나.

나는 커피가 더 좋은데..'

인어공주는 하루 종일 커피를 많이 마셔 쓰린 위를 붙잡으며 혼자 생각했어요.


인어공주의 행복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다음 달에 남자가 결혼을 하게 되었어요.

남자가 바다에 빠졌을 때 남자를 구해준 아가씨는 불가사리 카페 건물 주인의 딸이었어요.

카페 사장이 건물 주인의 사위가 된 거예요.

"이제부터 월세 걱정 없이 카페를 운영하게 될 수 있게 됐어요,

인어 직원도 결혼식에 와서 꼭 축하해 줘요."

그 말을 듣고 인어 공주는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사장님을 구한 사람은 그 아가씨가 아니라 바로 저예요.

사장님의 사랑을 얻지 못하면 저는 거품이 되어 사라지게 될 거라고요.'

인어공주의 외침은 산이 아닌 바다에서는 메아리라도 되어 돌아오지 못했어요.


사장님과 건물 주인 딸의 결혼식 날이 되었어요.

인어의 눈물은 마르고 닳아 한 방울도 남지 않았죠.

'이제 나는 물거품이 되겠구나.'

인어공주의 구슬픈 흐느낌을 듣고 머리카락이 잘린 인어 언니들이 나타났어요.

"막내야! 넌 다시 인어가 될 수 있어."

"이 가위를 받아, 이것으로 계약서를 찢으면 넌 다시 인어가 될 수 있어.

마녀한테 사정해서 우리 머리카락과 바꿨단다."

"뭐 하러 거기서 일하면서 고생이야? 바다 밑에서 노래 부르면서 같이 살자."

바다 위는 파도가 치고 있었지만 바다 밑은 파도도 없었습니다.


인어공주는 몰래 사장실로 들어갔습니다.

'이 가위로 계약서를 찢으면 거품이 되지 않고 다시 인어가 될 수 있어.'

하지만 인어는 결국 계약서를 찢을 수 없었어요.

사장님이 신혼여행을 떠나면 카페를 지켜야 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인어공주는 사장님과 카페를 진심으로 사랑했어요.

'사랑하는 사장님, 행복하게 사세요. 안녕'

인어공주는 정신을 잃고 에스프레소 머신에 머리를 부딪혔습니다.

그 순간 크레마 거품이 인어공주를 감쌌습니다.

인어공주의 얼굴은 점점 황금빛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나를 좀 봐, 사람도 아니고 물고기도 아니잖아.

난 차라리 영원한 거품이 되는 편을 선택할래.'

머그잔 위에는 몽글몽글 커피 거품이 피어올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