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에는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대게다.
여행객들은 강구항에서 대게를 먹는 것을 목적으로 영덕에 오기도 한다.
"대게가 참 크네" 그들의 말에는 어폐가 있다. 대게는 대(大) 게가 아니라 대(竹) 게이기 때문이다. 게의 다리 마디가 대나무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대게 다리가 대나무 같네"라고 해야 아마도 더 정확한 말일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이 많이 찾는 여름의 계절에는 영덕의 대게는 없다. 오직 러시아산 박달대게가 있을 뿐이다.
영덕에 찾아와서는 러시아산 박달대게를 먹고 돌아가는 것이란 마치 고독한 미식가가 되기로 자처하는 것만 같다.
의외로 여름의 영덕에서 꼭 먹어봐야 하는 특산물은 복숭아다. 향과 맛, 분홍빛 속살, 짧은 솜털, 아삭하고 베어 먹는 소리까지 영덕의 복숭아는 오감을 충실하게 자극한다. 복숭아를 사기 위해 구태여 어딘가로 찾아가야 할 필요도 없다. 영덕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길목마다 노란 현수막이 복숭아를 팔고 있음을 알린다. 그저 먹고 싶다는 의지만 있다면 잠시 길가에 차를 멈추고 살 수 있다.
장사해수욕장의 파도영덕을 찾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뱃속의 아이의 태교를 위해 왔던 3년 전 그리고 지금 나를 아빠라고 부르는 아이와 함께이다.
두 번 모두 일 년 중 가장 기온이 높은 7월 마지막 주, 8월 첫 주 즈음에만 방문하는 것이니 나에게 영덕은 전국에서 가장 뜨거운 지역이라는 인상만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아이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성인들만 가는 것과는 달리 적지 않은 희생이 필요하다.
아이와 함께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혼자서 가는 여행일 때 보다 많은 짐을 져야만 한다.
1+1은 2가 아니다. 짐은 사람 수만큼 늘어나는 수학이 아니라 무게와 부피까지 더해야 하는 기하학이 된다.
다음 날 장거리 운전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인 여행 전날의 밤의 공상을 포기하고 일찍 잠을 청해야 한다.
운전을 할 때도 계기판에 적혀있는 숫자만큼의 속도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어서도 안된다. 가족의 안전을 위해 시속 90킬로미터의 범위에서 안전한 운전을 해야 한다. 다른 차로의 차들에게 추월을 당한다고 하여 자존심 상해서도 안될 일이다.
아이는 바다를 즐거워했다. 파도가 처음이라 두려울 법도 한데 아이는 거친 파도를 향해 성큼성큼 나아가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노련한 서퍼라도 되는 양 아이는 서핑을 즐겼고 나는 파동에 맞추어 저절로 움직이는 스마트 서핑보드가 되어주었다.
그날 밤 아이는 침대 위에서 기절했다. 녹초가 되도록 열심히 노는 것, 아이는 최선을 다했다.
밤바다는 스산하다.아이가 잠들고 나서야 나를 찾기 위한 시간을 갖기 위해 숙소 앞바다로 내려왔다.
밤의 바닷가에서 혼자 걸었다.
밤바다와 낮 바다는 다르고 멀리서 본 바다와 가까이 와서 보는 바다도 달랐다.
앞이 보이지 않는 밤바다는 무서웠다. 어촌의 짠 냄새도 코를 찔렀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숙소로 되돌아왔다.
영덕의 밤하늘에는 별이 많다. 창밖을 올려다보니 비스듬한 달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달과 눈이 마주쳤다. 잠이 오지 않았다.
모두가 내일을 준비하는 오전 12시 34분, 고기잡이배가 굉음을 내며 칠흑 같은 어두운 바다 위로 하얀 거품을 남기며 홀로 출항했다. 달빛 아래 어선은 희생이 아닌 책임이라는 이름의 고기를 낚으러 가는 것만 같았다.
파도가 무서운지 모르는 아이에게 나는 어떤 방파제가 되어줄 수 있을까?
손바닥만큼 열린 창 사이로 소금기를 머금은 해풍이 불어온다. 아이가 감기에라도 걸릴세라 나는 몸을 비스듬히 일으켜 세워 바람을 막아 주었다.
나도 가까스로 잠은 들었지만 아이가 밤새 몸을 뒤척여 침대의 절벽 아래로 낙하하려는 탓에 나는 본능적으로 아이를 지켜주느라 잠을 설쳤다.
창밖에는 '책임'이라는 파도가 끝도 없이 밤새 밀려왔다.
영덕의 일출영덕에도 동이 튼다. 다른 지역보다 해가 조금 일찍 뜨는 것 같기도 하다.
반수면상태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아침은 그것이 일몰인지 일출인지 헷갈린다.
갈매기 소리가 새벽닭 소리처럼 일출임을 짐작게 했다. 희미한 구름을 뚫고 내려 쪼이는 태양광에 눈이 부셨다.
아침임이 확실해졌다.
"희생이 아닌 책임."
영덕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산 박달대게를 팔아야 하는 상인,
차들이 위험하게 내달리는 도로변에서 복숭아를 파는 농부,
매일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위해 숙소를 깨끗이 정리하는 청소부,
오전 12시 34분에 출항하여 밤샘 조업을 하는 어부,
녹초가 되어 여름방학이 정말 즐거웠다고 말하는 아이,
그들은 가장 뜨거웠던 그날 영덕에서 그들 각자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했다.
안녕, 장사해수욕장돌아가는 길은 장사해수욕장의 모래 위를 걷는 것처럼 발걸음이 무겁다.
하얀 표지판에 "당신은 영덕군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새겨진 선명한 검은 글자를 찾아보지만
소설 속과는 달리 존재하지 않는다.
영덕에서 대구로 돌아가는 길은 고도가 높은 구름 끼인 산꼭대기로 올라 36km 직진 도로를 통과해야만 한다.
갑자기 구름이 비로 변하여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진다. 자동차 앞 유리에 떨어지는 빗물이 유리창을 거꾸로 거슬러 오른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운전대를 바로잡아야 한다. 짙은 안개 탓에 앞이 잘 보이지는 않지만 비상 깜빡이를 켜며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가야 한다.
나는 전에 수막현상도 겪어보았다. 이번에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나는 심한 책임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