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라-비젼 소사이어티
테토, 에겐이라는 단어가 유행이다. 남성적, 여성적이라는 수식어를 쉽사리 입 밖에 꺼내지 않게 된 시대에, 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로겐이라는 호르몬에 빗대어 성 역할적 이미지를 표현하는 새로운 키워드들이다. 섬세함은 에겐적인 것, 공격성은 테토적인 것이라는 느낌이다. 본래 성별을 결정짓는 생물학적 요소가, 이제는 한 개인의 성향이나 행동 방식을 설명하는 언어로 쓰인다는 점이 흥미롭다.
어찌되었든 남성과 여성이라는 단편적인 이상향에서 벗어나, 테토적 남성과 에겐적 남성처럼 그 범주를 넓혀준다는 점에서는 젠더에 대한 이해가 성숙해졌다는 증거 같기도 하다. 이제는 일상화된 MBTI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외향적인 모습이 우월하다거나, 슬픈 상황에 공감하지 못하는건 이상하다는 이분법적인 판단을 넘어 각자의 유형에 따라 서로를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여기에 테토, 에겐 같은 특성이나 고향, 취미 같은 배경까지 곱해지면 16가지 유형의 경계를 초월한 각자마다의 스펙트럼이 만들어진다.
나는 생각을 모 아니면 도라는 극단의 시나리오로 몰아가는 것을 좋아해왔다. 인과 관계를 생각하며 상상을 거듭해 결과가 흑과 백처럼 극대화되는 것이 선명한 정답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선택과 결과를 마주하며 배우게 된 것은, 세상의 대부분의 일에는 칼로 자른 듯한 정답이 없다는 사실이다. 언제나 절충안이 존재하고, 서로 윈윈할 수 있는 협상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의 사고방식도 흑백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수많은 색깔이 존재하는 스펙트럼의 세계로 옮겨졌다.
나의 스펙트럼은 고정되어있지 않고 삶에 들어오는 빛에 따라 새로운 빛깔로 바뀌는 듯 보인다. 이런 변화는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를 기억하는 오랜 관계들 앞에서 빛바랜 처지가 되게 만든다. 이를테면 초록색 스펙트럼이 된 내가 주황색이던 시절에 잘 어울렸던 다홍색과 황토색의 친구들을 만날 때면, 지금의 내가 초록색이라는 사실을 애써 설명하고 이해시키기 보다, 주황색이었던 나를 꺼내 연기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주황빛을 내다 집에 돌아오는 길이면 나는 스스로가 어떤 색인지 알 수 없는 탁한 회갈색이 되어버린 듯한 기분에 휩싸인다. 초록의 본질을 잃고, 주황을 흉내내다 뒤섞여버린다. 흐릿해진 나 자신을 다시 선명한 초록색으로 되돌리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옛 관계를 지키는 것과 지금의 내 자아를 지키는 것이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고민스러운 밤들이 늘어간다. 관계 또한 건강한 자아의 일부라는 것을 알기에, 이 딜레마는 아직 풀지 못한 숙제다.
지난 주말에는 9년 지기 동기들의 청첩 모임에 다녀왔다. 10명 남짓의 친구들은 모두 이성과의 결혼을 당연히 지향할 것이라는 전제로 대화를 이어갔다. 흑백의 레트로 영화 같은 대화 속에서 비혼주의자라는 나의 말은, 모두에게 어중간한 횟빛의 열린 결말처럼 들려진 듯했다. 친구들은 저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나의 상태를 정의 내려주려 애썼다. 나이가 들면서 그것이 상대를 위한 서툰 배려이자 관심이라는 것을 알게 돼 고맙게 느껴졌지만 동떨어진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오늘도 선택의 기로에 선다. 옛 친구들 앞에서 잠시 과거의 주황색이 되어 편안한 안정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어색한 침묵을 감수하고 지금의 초록색을 드러낼 것인가. 어떤 선택을 하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마음 한구석이 씁쓸하다. 주황색을 연기한 날에는 내가 흐릿한 회갈색이 된 것 같아 서글프고, 초록색을 고집한 날에는 아름다웠던 주황색 시절의 관계 하나를 잃어버린 것 같아 아쉽다.
일하는 철학부터 사랑의 방식, 그리고 성적 지향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은 명확한 색의 경계가 없는 스펙트럼에 더 가깝다. 저마다 어떤 정도의 차이 내지 범위 안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변화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딱 떨어지는 답을 듣고 싶어하고, 최대한 익숙한 범주 안에 넣어두고 싶어 한다. 모두가 자신만의 스펙트럼을 꺼내보일 수 있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서로에게 깊이 공감하고 연대를 이룰 수 있을까.
초록동색이라는 말처럼 비슷한 색깔끼리 모이는 것도 좋겠지만, 다양한 내면의 스펙트럼을 빛내며 알록달록한 모습이 스펙트럼 사회가 가지는 매력일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한번 물들면 지워지지 않고 뒤섞으면 흐리멍텅해지는 물감을 담는 캔버스이기 보다는, 한 곳에 모이면 가장 밝게 빛나는 빛줄기를 만들어내는 투명하고 잘 다듬어진 프리즘이면 좋겠다. 무엇보다 각자가 자신을 고정된 색으로 규정짓기보다 다양한 면모를 가진 자신의 스펙트럼을 발견하고, 서로의 고유한 빛깔로 어우러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