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 당근라페

정말 맛있어요

by BAR SUR

나에게 당근은 흙맛이다. 아주 오랫동안, 이 명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실이었다. 횟집에서 기본 반찬으로 내어주는, 가장자리가 하얗게 말라 수분기가 날아간 당근에서도 어김없이 흙맛이 난다. 중국집 탕수육 위에 장식으로 올라간, 정교하게 칼집을 낸 꽃 모양 당근에서도 예외 없이 흙의 향기가 피어오른다. 나는 물맛 나는 오이나, 훨씬 더 강한 호불호의 영역에 있는 고수도 잘 먹는 편이지만, 유독 당근만큼은 단호하게 거부해 왔다. 다른 이유가 필요 없었다. 흙맛이 나니까.


그런 나의 확고한 신념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작년 어느 여름날, 점심 식사를 위해 자주 찾던 샐러드 가게에서였다. 동료의 샐러드 위에 고명처럼 수북이 올라간 주황색 채소. 당연히 당근이겠거니 하고 무시하려는데, 그날따라 유독 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 입을 권면받아 용기 내 먹어본 순간,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흙맛이 전혀 나지 않았다. 대신 아삭하게 씹히는 식감과 기분 좋게 새콤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그것의 이름이 당근라페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날 이후, 그 샐러드 가게에서 종종 아기 주먹만 한 당근라페를 옵션으로 추가하게 되었다. 흙맛 나던 당근을 내 돈 주고 사 먹는 나 자신이 꽤 어른이라고 느꼈다.


그렇게 어른다움의 상징이 되어주었던 당근라페는, 이직을 하고 생활 반경이 바뀌면서 자연스레 잊혔다. 애초에 내가 당근을 찾아 먹을 만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긴 했다. 그러다 최근, 여름을 앞두고 식단 관리를 다시 시작하면서 그 존재가 불현듯 떠올랐다. 샐러드용 채소를 장바구니에 담다가, 문득 그 새콤했던 당근라페가 간절히 먹고 싶어진 것이다. 쿠팡에 찾아보니 당근라페는 소량으로는 팔지 않고 대부분 1kg 단위로 판매 중이었다. 게다가 생각보다 칼로리가 높고 당류도 꽤 포함되어 있었다. 다이어트 식품인 줄 알았는데 의아한 생각이 들어 며칠 동안 당근라페에 대해 더 찾아보게 되었다.


결국 나는 직접 만들어보기로 결심했다. 유튜브에서 요리법을 찾아보니 생각보다 간단했기 때문이다. 요리를 즐겨하지 않는 나의 자취방에는 당근을 채 썰 강판 따위는 없었지만, 나머지 재료는 얼추 갖추고 있었다. 나는 곧장 강판과 홀그레인 머스터드를 주문하고, 세척된 생당근 500그램짜리도 함께 장바구니에 담았다.


다음 날 아침, 로켓처럼 도착한 당근을 포장지에서 꺼내는데, 순간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위협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주 싱싱하고 통통한, 단단하지만 투명한 질감, 자연에서 왔다고 보기에는 어려울 만큼 영롱한 주황빛. 당근을 외면했던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감회가 새로웠다. 강판에 당근을 갈기 시작하자, 익숙하고도 낯선 특유의 흙 향이 올라왔다. 덜컥 걱정이 들었다. 혹여나 내가 만든 당근라페에서는 흙맛이 나면 서글플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의 걱정은 기우였다. 샐러드 재료와 비슷해서인지, 당근라페 만들기는 생각보다 정말 간단했다. 잘게 채 썬 당근 세 개에 소금 반 스푼을 넣고 골고루 버무려 숨을 죽인 뒤, 올리브유 세 큰 술, 발사믹 식초 한 큰 술, 홀그레인 머스터드 한 큰 술, 후추 약간을 넣고 다시 한번 잘 섞어주면 끝이었다. 물론, 단단한 당근을 강판으로 일정하게 갈아내는 것이 약간의 요령과 힘이 필요한 작업이긴 했지만, 넉넉잡아 10분 정도면 신선한 당근라페 한 통이 완성되었다.


놀랍게도, 내가 만든 당근라페는 작년에 맛본 샐러드 가게의 그것보다 훨씬 더 아삭하고 새콤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기했던 것은, 흙맛이 정말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나에게 당근에서 흙맛이 사라지는 순간은, 뭉근하고 뜨겁게 익어 형체를 잃어버린 카레 속 당근 뿐인 줄 알았는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유레카 모먼트였다. 눈에도 좋고 비타민도 풍부해서 내 몸에 꼭 필요하다고 늘 생각해 왔지만, 그 지독한 흙맛 때문에 먹지 못했던 당근을, 드디어 맛있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고무장갑을 끼고 생당근을 채 썰어 손수 당근라페를 만드는 내 모습이 제법 어른스럽기도 하다.


그날 이후, 나는 당근라페의 매력에 푹 빠졌다. 지난주에는 너무 맛있어서 PT 선생님께도 한 통 만들어다 드리고, 서울에 올라오셨던 엄마에게도 한 통 만들어드리고, 집들이 가는 친구 집에도 사이드 메뉴로 만들어갔다. 다들 맛있다고 해줘서 뿌듯했는데, 아직은 우리에게 생소한 음식이라 더 신선하게 느끼는 듯했다. 일주일 새 당근 2kg을 넘게 소비하면서 나름의 실험도 해봤다. 레몬즙은 상큼함을 더해줘서 잘 어울렸지만, 들깨가루는 특유의 상큼함을 반감시켜서 별로였다. 그리고 한 번 만들 때 당근은 최대 네 개 정도가 가장 적당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틀이 지나면 아삭함이 조금씩 사라지고 물이 생기기 시작하니, 욕심부리지 않고 적당히 만드는 게 당근라페를 더 맛있게 먹는 비결이다.


평생을 편식하던 채소 하나를, 이제는 내 손으로 직접 요리해 주변 사람들에게 그 맛을 전파하고 있다니. 스스로가 생소하기도 하고 대견스럽게도 느껴진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처럼 절대 변할 것 같지 않던 나만의 불호의 영역을, 스스로의 작은 노력과 발견을 통해 조금씩 허물어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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