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 기니스! 거의 20년이 다 되어서야 그의 다음 책을 손에 얻게 되었다!
오스 기니스에 대한 어렴풋한 그때의 기억은 ‘소명’이라는 그의 대표 서적을 소환하는데, 내용은 거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딱 두 가지는 남아 있다. 내용이 어려웠다는 필요 없는 기억과 ‘소명의 의미’를 두 가지로 설명했던 다행스러운 기억이 남아있다.
1차적 소명, 2차적 소명, 이 소명 개념만 하나 얻어내어 여기저기 아는 척하며 써먹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몹시 부끄러운 기억이다. 이 소명의 개념이 당시 청년부 사역을 좀 했노라 하는 사람들에게는 신선했으면서도 명쾌했던 설명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건, 20년이 지나 읽게 된 이번 책도 비슷하다. 어려운 개념화된 표현들 사이에서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충분히 그래도 될 만한 책이었다. 한 번 모두 읽은 후에, 다시 밑줄 친 내용을 블로그에 타이핑해서 옮겨가며 다시 읽었다. 당연히 충분히 그래도 될 만한 책이었음을 확인했다. 전작의 '소명'처럼, 책 한 권을 관통하는 주제가 있어서 한걸음 한걸음 걷기에 지치지는 않을만했다.
부끄럽지만, 이번에도 뭔가 하나 얻어내어 여기저기 써먹을 것이 있는지 광야의 하이에나 같이 킁킁거리며 따라간다.
우리가 시간을 제대로 다루려면 시간의 창조자와 시간의 의미를 알아야 하고, 그 창조자가 그의 장대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에게 준 역할을 알아야 하는데, 그 이야기를 통해서만 시간과 역사 저네의 심오한 뜻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것은 개인의 소망과 운명을 우주 자체의 목적과 운명에 맞추는 삶을 살도록 우리가 초대받았다는 사실이다.
오스 기니스, 오늘을 사는 이유, IVP, p.38
카르페 디엠! 시간을 붙잡아라! 그 현대적 해석은 조금 현대인을 위로하고, 즐겁게 하고자 각색된 느낌이 크다.
오스 기니스는 인간 존재의 핵심인 시간을 매개로 카르페 디엠을 다시 해석한다. 그는 먼저 시간을 살펴본다 그의 말처럼 대조하면 명확해진다. 시간을 보는 세 가지의 관점을 상호 비교한다. 정말 그의 말대로 개념 자체가 명확해진다. 그 관점들 중에 우리는 당연히 언약적 관점을 고르게 된다.
그 후에 시간의 인식에 대한 영향,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 시대의 전진과 발전에 따라 우리가 시간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며,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며 살아왔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언약적 관점을 고른 이상 편하지 않다.
성경과 유대교-기독교적 역사관에 따르면 끝의 개념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두 의미는 전혀 다르지만 결코 분리시키면 안 되고, 양자의 관계는 어두운 시대 속에서 신앙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성경에서는 ‘끝’을 때때로 결말, 마침표, 종결, 최후라는 의미의 라틴어 finis로보지만, 또한 목표, 목적, 최고점, 절정이라는 의미의 헬라어 telos로 보기도 한다. 결말로서의 끝과 절정으로서의 끝, 둘 다 역사상 언제나 작동하고 있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그렇다. 우리는 둘 다를 기억하고, 양자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하고, 두 진리 모두를 잘 파악하면서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오스 기니스, 오늘을 사는 이유, IVP, p.191
그리고 책 중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인 오늘을 어떻게 붙잡을지에 대한 방법을 소개한다. 하나님 앞에서 걷기, 분별하기, 우리 세대에서 하나님의 목적 이루기! 단순히 나에게 주어진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 이상의 의미가 우리의 시간, 우리의 오늘에 주어졌음을 명확히 알 우 있다.
하지만 오스 기니스의 충고처럼, 현대인의 적실성(시기적절함)을 거부하며 언약적 관점으로 살아가는 삶에는 대가가 존재한다.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삶의 두려움이 밀려오지만, 또다시 오스 기니스는 충고한다. 하나님을 믿으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때까지는 오늘을 붙잡자. 이날뿐 아니라 하루하루를, 확신과 소망을 품고 온전히 붙잡자. 그러나 자화자찬하며 과시하는 초소형 신들처럼 굴지는 말자. 하나님 앞에서 걸으면서, 시대의 징표를 읽으려고 애쓰면서, 항상 우리 세대에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노력하면, 다가오는 위대한 주님의 날에 소망을 두는 모든 이들과 다 함께 일하면서 겸손히 오늘을 붙잡자.
오스 기니스, 오늘을 사는 이유, IVP,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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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1
우리는 어느 공간을 점유해서 타인의 접근을 막을 수 있지만, 아무도 시간을 독점할 수는 없다. 시간은 우리의 ‘공유지’, 즉 어느 순간에든 살아있는 모두에게 열린 공유의 땅이다.
시간은 앞을 향해 한 방향으로만 움직여 나아가며 멈출 수 없다. ... 물리적 공간의 세계를 정복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쉽지만 이것이 항상 시간을 대가로 삼는다는 치명적인 사실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p.32
아무리 손쉬운 성취라도 우리는 항상 우리 인생의 가장 큰 도전이자 가장 불가해한 신비인 시간을 그 비용으로 지불한다. 예수님은 또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선언하셨다.
p.34
그러면 우리는 오늘날 시간의 도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며, 현대의 빠른 생활의 압력 아래 어떻게 보다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 시간에 매이고 시간으로 찢긴 상태를 피할 길은 없다. 이는 인간 존재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p.34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 송시11에 나오는 유명한 금언, 카르페 디엠, 곧 ‘오늘을 붙잡아라’
p.37
이 책은 크르즈나릭이 간과한 아주 다른 답, 즉 성경이 주는 답변의 윤곽을 그려 보려고 한다.
p.38
우리가 시간을 제대로 다루려면 시간의 창조자와 시간의 의미를 알아야 하고, 그 창조자가 그의 장대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에게 준 역할을 알아야 하는데, 그 이야기를 통해서만 시간과 역사 저네의 심오한 뜻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것은 개인의 소망과 운명을 우주 자체의 목적과 운명에 맞추는 삶을 살도록 우리가 초대받았다는 사실이다.
p.40
우리 인간은 시간 속에 푹 잠겨 있어서 결코 시간을 객관적으로 보고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시간은 존재의 핵심에 있다.
p.41
우리는 시간 안에 있고 시간은 우리 안에 있기 대문에, 시간이 무엇이고 시간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에 관한 질문은 우리의 시점에서는 대답할 수 없다.
p.42
시간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
서로 대조하면 무척 명료해진다.(p.49)
-순환적 cyclical : 동양에서는 환생, 니체는 영원한 회귀, 시간은 움직이는 바퀴, 바퀴에 매인 삶, 순환을 멈출 수 없음, 온전한 자유는 그 순환에서 벗어나는 삶. 시간 속의 영원
-언약적 covenantal : 시간과 역사는 시스템, 바깥에서 온 신적 계시의 결과물이므로 순환적일 뿐 아니라, 직선적이고 언약적인 것,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 존재, 또한 인간들 역시 자유. 인간은 선택과 행위에 대한 책임 있음. 카이로스
-연대기적 chronological : 세속주의 신념이 견지하는 연대기적 시간. 영원 없는 시간을 조망함. 크로노스
p.49
시간과 역사에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중요성이라는 한 쌍의 진리 아래, 시간과 역사는 어디론가 가고 있고, 우리 각자는 본질적으로 유일무이하고 중요한 존재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과 세대, 나아가 전체 역사 안에서 담당할 독특하고 중요한 역할이 있다.
p.51
하나님은 초월적이고 철저히 타자이시다. 유일하시고 바깥에 계시며 만유 위에 계셔서 지극히 자유로운 분이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세계를 위해 그 세계와 직접 열정적으로 교류하시고, 특히 자기의 형상과 모양대로 닮게 만드신 인간 피조물에 헌신하시며 관심을 기울이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고 믿는 것보다 더욱더 우리 인간을 사랑하고 믿으신다.
p.53
시간의 인식에 관한 한, 인간의 자유는 결정적으로 세 가지 능력에 의지한다. 1. 우리의 시간 인식은 과거에 대한 기억을 포함하여, 방대한 과거를 우리의 의식으로 불러와서 과거를 현재 살아있는 요소로 만든다. 2. 우리의 시간 인식은 상상력과 비전을 포한한다. 이는 우리의 의식에 미래를 펼쳐서 미래를 현재 살아 있는 요소로 가져온다. 3. 우리의 시간 인식은 의지를 포한하여, 현재 선택에 영향을 미치게 한다.
p.55
인간의 의지는 분명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바라보는 성경의 관점에서 주된 요소이지만, 그 의지는 선과 악, 창조와 파괴 모두를 위해 쓰일 수 있다.
p.57
우리 인간은 시간과 역사 속에 살며 행동할 자유와 책임을 모두 지닌 존재다. ... 우리의 창조성은 우리 자신을 창조하는 창조성이다. 즉 우리의 무수한 선택들이 마음의 습관을 만들과 그 습관은 우리 자신을 형성한다. ... C.S.루이스가 주장했듯이, 자유는 우리 인간이 우리의 창조주를 가장 닮게 하는 선물이다.
p.58
과거는 영향을 미치지만 그로 인해서만 미래가 결정되지는 않기 때문에, 자유란 미래가 언제나 과거와 다를 수 있음을 의미한다. ... 우리는 과거나 현재와는 다른 모습이 될 수 있다. 진정한 변화, 진정한 개혁, 진정한 성장이 가능한 이유는 자유가 우리에게 상상할 수 없는 잠재력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p.59
자유를 바라보는 성경의 관점
-겸손을 요구하며 합리주의의 확실성이라는 오만에 저항한다.
-자유는 미래와 관련해 참으로 창조적이다.
-자유는 과거와 관련해 구속적인 면이 있다.
-자유는 항상 위험과 불안정함을 수반한다. 이것이 언약적인 시간과 역사가 지닌 불가피한 함의인데, 인간의 이야기는 언제나 그 끝이 열려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p.65
우리가 바르게 선택한다면 무엇이든 개혁하고 개선할 수 있겠지만, 메시아의 시대가 오지 않는 한 완벽해질 전망은 없다. 인간의 이야기는 열려 있는 만큼 더 좋아지거나 더 나빠질 확률이 똑같다는 사실에 놀랄 필요가 없다. 이 모든 사실은 오만하지 말고 겸손하며 책임감을 가져야 함을 강조한다. 우리 인간은 언제나 자유를 감사히 여기고 그 신비를 존중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자유의 능력과 타락해서 자유를 잃기 쉬운 우리의 성향 때문에 겸손해져야 한다.
p.66
여기에 자유의 역설이 있다. 자유가 그 자체로 최대의 적이 될 수 있는 것은 자유의 타락은 곧 자유로운 사람들이 주인으로 시작해서 스스로 선택한 강박관념과 스스로 선택한 중독에 굴복하는 노예로 끝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자유는 결코 오만으로 격상되면 안 된다.
p.68
성경의 인간관은 최고의 인간 가치를 묘사하고 보호한다는 의미에서 최고의 인본주의라 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은 독특하게 관계를 맺고 대화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 타인,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살아간다.
-우리 인간은 우리의 의식, 우리의 작용, 우리의 책임성과 같은 속성으로 인해 땅에서 유일하게 결과를 낳는다.
-우리 인간은 시간과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지속적인 목적을 이루는 그분의 협력자로서 창조세계에서 유일하게 중심 역할을 한다.
p.71
신의 섭리와 인간의 협력 관계, 신의 주도권과 인간의 동의를 잇는 고리가 언약적 시간관을 열어 준다. 시간이 언약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이들이 그분과의 언약적 합의 관계에 속하게 된다는 뜻이다.
p.72
언약적 시간 속의 인생은 언제나 ‘하나님 아래’와 그분의 섭리 아래 있다. 겉보기에 어떠하든지 인간의 권력과 그 오만에는 항상 윤리적 한계가 있는 법이다. 믿음으로 사는 인생은 궁극적으로 그 효과와 성공을 보장받지만, 결과의 성공 여부는 믿는 자의 소관 밖이다.
p.77
현대인이 시간의 노예가 되는 것은 우리의 많은 시간이 남들의 통제 아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의를 사로잡는 것들에 삶의 많은 부분을 낭비하고 있다. 현대성은 우리 모두를 시간의 노예로 만든다.
p.78
안식일은 현재의 시간에서 ‘시간을 구속하는 일’의 중심이다. 회개와 용서가 과거의 시간에서 시간을 구속하는 일의 중심인 것과 같다. 안식일은 타임아웃이자 휴식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고 회복시키며 균형을 다시 잡아 준다. ... 언약적 관점에서 시간과 역사는 실재하고 근본적이며 피할 수 없다. 인간의 작용도 실재하고 결정적이며 중요하다. 자유와 정의에 대한 지속적 헌신 또한 반드시 필요하다.
p.79
순환적 시간관의 옹호자들이 시간 속의 영원을 바라본다면, 연대기적 시간의 옹호자들은 그와 정반대다. 이들은 영원 없는 시간을 조망한다. 헬라어 ‘크로노스’는 시간을 의인화하여 포현한 단어다. 이는 시간을 선이나 악에 대한 잠재력과 의미로 충만한 의미심장한 순간으로 보는 ‘카이로스’와는 대조적으로, 시간을 직선적 순간들의 연속으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크로노스는 내재적 의미가 없는 직선적 순간들의 연속으로, 끝없고 변함없이 단조롭게 똑딱똑딱 흘러가는 시간이다. 의미심장한 순간을 가리키는 카이로스와는 무척다르다. 카이로스는 예컨데, 훗날 시간을 초월한 것으로 간주된 승리 또는 재난의 순간 같은 것이다.
p.81
언약적 시간과 연대기적 시간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은 의미의 원천이 다르다는데 기인한다. 언약적 시간관에서 나오는 의미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보고 그렇게 될 것을 아시는 것인 데 반해, 연대기적 시간에 속한 의미는 인간들이 보고 세우려 애쓰는 것이다.
p.93
시계는 세계화를 운반하는 잘 알려진 것들보다 훨씬 더 영향력이 클 뿐만 아니라, 근대적 시간이 우리에게 가하는 압력과 현재 및 미래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 배후에 있는 촉매제-또는 범인-이기도 하다.
p.96
현대식 시간관 배후에는 중요한 세 가지 발전이 있다. 첫째, 관찰에 의존하는 음력에서 계산에 의존하는 양력으로서의 전환이다. 둘째, 하루 단위의 자연스러운 시간 감각에서 주 단위의 인위적인 시간 감각으로서의 전환이다. 셋째, 아침과 오후 같은 다소 포괄적인 인식에서 시와 분과 초 같은 더 정확한 인식으로의 전환이다.
p.99
서구 세계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다성 음악, polyphony’이라고 한다. 이는 통일성과 다양성의 균형을 맞추고 공통 목적을 위해 여러 다양한 부분들을 섞음으로써 이루는 조화를 말한다.
p.100
현대식 시계 시간의 세 번째 특징은 우리가 가장 잘 인식하는 것이자 조정에 의해 강화되는 것, 즉 압력이다. 현대적 삶의 전성기인 오늘날, 시계에 쫓기는 세계 속에 시간은 너무나 정확해지고 조정된 나머지 우리를 둘러싸고 앞두로 밀고 당기며, 위에서 누르고 사방에서 압박한다.
p.104
이 미친 속도는 우리의 혈압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의 일상 경험을 형성할 뿐 아니라, 카르페 디엠의 의미와 어떻게 ‘오늘을 붙잡아야’할지, 그리고 어떻게 짧은 생애를 최대한 활용할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도전을 가한다.
p.107
시계 및 시계 시간이 잠재의식에 미친 강력한 영향은 여전히 우리의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실재관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두 가지 사항을 들 수 있다.
-한때 공간을 가리켰던 단어들이 이제는 시간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 ex.문명화되다civilized. 문명화되지 못한 것은 더 이상 공간적으로 그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그 뒤편에 있다. ex.진보progress. 진보의 깃발 아래 제안된 것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그렇게 되었다. 현대인에게는 진보를 주장하기만 해도 충분한 논증이 된다.
-언어가 묘사의 탈을 쓴 채 슬그머니 평가하는 경우다. 이런 언어는 묘사하는 체하지만 실은 칭송하거나 비난한다. ex.약속된 미래가 과거보다 낫다는 보장이 없음에도 ‘진보적’이란 말이 여전히 자명한 용어로 과시되고 있다.
p.125
우리 각자는 가치 있는 존재인가? 우리의 인생은 갈등과 재난의 시기에도 그 어떤 의미라도 있는가?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 ... 각 인생에 의미가 있는 것은 우리 각자가 중요한 존재이고 역사는 유일하므로, 우리가 더 큰 그림과 더 긴 이야기 속에서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는 마지막에 베일이 벗겨질 때 그 모든 의미를 드러낼 것이다.
p.128
카르페 디엠, 곧 오늘을 붙잡아라 또는 시간을 구속하는 것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대다수 사람이 그 이상을 해석하는 방향과는 확연히 다르다. 대부분 이를 이기적이고 단기적이고 순전히 즉흥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카르페 디엠에 대한 견해들 중에 성경적 또는 언약적 시간관의 견해보다 더 확실한 토대, 더 강한 추진력, 더 높으 비전은 없다.
p.129
하나님은 시간과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를 부르시며, 오늘을 붙잡을 수 있게 하는 은사는 다음 세 가지 원리들을 한데 묶어 주는 생활방식에서 나온다. 바로 ‘하나님 앞에서 걷기’, ‘시대의 징표를 읽기’, ‘자신의 세대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다.
p.130
신앙생활에서 필요한 자연스러운 토대는 하나님 앞에서 걷는 일이다. 한 사람이 말하고 행하는 방식, 매일의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은 항상 그의 믿음을 시험하는 최상의 방법이며, 그의 의향과 동기를 잘 가리키는 지표다.
p.133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실재는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수많은 논증보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과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를 통해 더 잘 나타난다. 그리고 신앙의 신뢰성은 믿음을 진술하거나 신조를 선언할 때보다 참된 신앙을 살아 낼 때 더 뚜렷하게 빛난다.
p.134
두번째 요건은 이 순간과 이 시간을 분별하는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면 우리의 세계와 시대도 알 수 있다. 우리는 한 손에 성경을, 다른 손에는 신문 또는 인터넷을 들고 ‘시대의 징표를 읽도록’ 부름받았다.
p.138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진정 지혜의 근본이다. 모든 것을 하나니의 나라에 비춰 조망할 수 있는 관점과 겸손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고, 우리 자신이 중앙에서 벗어나 제자리를 찾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편견과 부패를 바로잡을 수 있게 된다.
p.139
세 번째 요건은 우리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려는 노력이다.
p.140
믿음의 사람들이 시대를 분별하고,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분과 동역자로 섬기며, 세상이 애초에 창조 의도에 따라 회복되도록 돕는 것이다.
p.140
구약성경은 이를테면 시간에 대한 태도 면에서 선지자와 제사장의 역할을 명백히 구별하낟. 선지자들이 대체로 현재 또는 ‘현재 속 미래, 시작에 이미 내포된 끝’에 관심을 갖는 반면 제사장들을 영원에 관심을 품고, 선지자들은 적실한 것과 자발적인 것에, 제사장들은 정규적인 것과 구조화된 것과 질서정연한 것에 관심이 있다. 오늘을 붙잡는 것은 그래서 그 핵심에 선지자적 성격이 있다.
p.145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결코 나누면 안 된다. 시가의 세 얼굴은 하나이고 나눠질 수 없다. 셋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이고, 셋은 우리 삶에서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서로 얽혀 있고 편재한다.
1.과거를 왜곡함: 악행 > 회개, 용서, 변화. 과거의 의미 (진정한 회개는 과거를 해방시킴)
2.현재를 왜곡함: ex.세대주의 (no 연속, no 책임), 현재에만 관심
3.미래를 왜곡함: 진보주의의 문제점(미래의 것이 최고, 과거는 좋지 않은 것), 적실성의 문제
p.146
그리스도인은 멸망과 죄좌 죽음으로부터의 구출이라는 개인적 측면에서 그러하다. 그런즉 구출에 대한 감사야말로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충성하는 근본 요인이고, 망각이 감사에 독약이듯이 기억은 감사에 산소와 같다. ‘기억하라’와 ‘잊지 말라’는 한 쌍의 명령은 성경적 믿음의 필수불가결한 북엔드다.
p.154
진정한 회개와 용서는 근본적이고 실제적인 것이며 오늘날 너무나 필요하다. 둘 모두는 인간의 자유와 선택에 달려 있으며, 그 자유와 함께 과거를 해방시키고 진정으로 다른 미래를 열어 줄 수 있다.
p.159
시간을 왜곡하는 방식은 과거와 미래를 희생시킨 채 현재를 확대하는 것, 즉 현재의 왜곡과 관련되어 있다. 명백한 예를 들면, ‘세대주의’에 대한 열망, 즉 현재를 뒤틀어서 그것을 과거와 미래로부터 절단함으로써 불연속적인 세대라는 측면에서 끊임없이 생각하는 방식이다.
p.161
-세대는 정체성을 묘사하는 중요한 방식이 되었다.
-세대는 새로운 형태의 상대주의가 되어 계급, 인종, 젠더, 종교와 같은 다른 범주들에 더해졌다.
-세대는 권위의 위기를 심화시키고 경험적 지혜를 반박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세대주의는 더 넓고 장기적인 책임과 연대의 틀을 저해한다. 세대주의는 이른바 ‘현재의 횡포’ 내지는 ‘단기주의’의 핵심 차원이다. 그런 단기적 사고방식은 만성적인 시간의 노예 상태의 주요 증상이며, 이는 당장의 만족에만 관심을 두는 방종이나 다음에 차려질 식사에만 관심을 두는 타인에 대한 종속으로 표현된다.
-세대주의는 지속 가능성과 살아 있는 전통의 붕괴를 촉진한다.
-세대주의는 현대의 급진적 개인주의와 병행하고, 인간 본성을 바라보는 많은 현대적 관점들의 고지식함과 유토피아주의를 강화한다.
-세대주의는 장기적이고 멀리 떨어진 것을 실재하지 않으며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취급한다.
p.165
대대로 전수하는 것은 일찍 유대교가 그랬듯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성품 때문이다. ... 이 진리는 유대교와 기독교 신앙의 심장에서 고동친다.
p.167
랍비 색스, ‘당신의 가치관을 자녀들의 마음에 새기고 그들은 그들 자녀의 마음에 새겨, 우리 조상이 우리 안에 계속 살아 있고 우리는 우리 자녀들 안에 살아 있으며 이렇게 종말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짐으로써 불멸에 이르게 된다’
p.171
과거와 미래를 희생기킨 채 현재에만 특권을 부여하는 세대주의는 교회에 재난과도 같다. 온통 현재에만 집착하는 많은 그리스도인은 만성적인 근시안에 시달린다. ... 우리는 항상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거류 외국인’이다. 망명자라는 인식을 늘 품고 우리의 궁극적 본향을 갈망하는 마음은 세속화에 대한 면역력의 중요한 부분이고, 앞으로 돌진하는 소망과 함께 그리스도인다운 독특성과 신실함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p.175
그토록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적실해지려고 그토록 열심히 노력했는데 대체 어쩌다가 그토록 적실성을 잃어버렸는가? 200년 동안 신앙을 재창조하고 교회를 재설계하려고 진지하게 헌신한 끝에, 우리는 참으로 당혹스러운 사실을 직면하고 말았다. 그리스도인들이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열심히 적실성을 추구했으나,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적실성을 잃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p.176
적실성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적실성이란 현재의 문제와 적절한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을 예수님의 복음에 의해 규정하는 이들은 누구보다도 가장 적실해야 한다.
p.180
우리가 판단할 것은 동기가 아니라 결과다. 신실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선지자적 반시대성의 대가를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다.
p.181
진정한 초시간성은 거짓된 현대의 시기적절함을 거부하는 반시대성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입장은 값비싼 대가를 치른다. 우리의 순간을 붙잡는 것은 현대 세계의 그릇된 모델에서 등을 돌리고 하나님 아래에서만 보이는 진정한 순간과 진정한 시간을 보는 일에 달려 있다. 그런데 그 관점은 또한 압박감을 수반한다. 시기적절하지 못한 사람들은 물결을 거슬러 헤엄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p.188
이 세계화 시대에 세계 전역을 지배하는 정서는 두려움이다. ...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은 다음과 같은 장엄한 진리에 의지할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보다 더 크시니 모든 상황에서 그분을 신뢰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으라. 두려워하지 말라.
p.191
성경과 유대교-기독교적 역사관에 따르면 끝의 개념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두 의미는 전혀 다르지만 결코 분리시키면 안되고, 양자의 관계는 어두운 시대 속에서 신앙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성경에서는 ‘끝’을 때때로 결말, 마침표, 종결, 최후라는 의미의 라틴어 finis로보지만, 또한 목표, 목적, 최고점, 절정이라는 의미의 헬라어 telos로보기도 한다. 결말로서의 끝과 절정으로서의 끝, 둘 다 역사상 언제나 작동하고 있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그렇다. 우리는 둘 다를 기억하고, 양자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하고, 두 진리 모두를 잘 파악하면서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p.196
언약적 시간 안에 살며 행동하는 이들에게는 이 원리로부터 두 가지 실제적 함의가 흘러나온다. 첫째, 이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에게 장기적 사고방식, 점진적 행동, 비인본주의적인 신념을 의미한다. 믿음과 소망은 그런즉 인내와 끈기를 요구한다.
p.199
우리가 하나님의 협력자인 것은 사실이지만 최종 결과는 항상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이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책임성을 자율성과 의존성이라는 두 극단 사이의 경로를 만드는데 필요한 열쇠로 간주하지만, 책임성은 자기 의존이 아니다.
p.202
우리가 하나님의 협력자이자 공저자로서 크고 작은 방식으로 하루하루를 붙잡고 시간을 구속하는 일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반면에 장대하고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카르페 디엠은 우리가 아닌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언젠가 모든 날들에 끝을 고할 그날, 하나님은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방식으로 그날을 붙잡으실 것이다. ... 모든 종말과 우리 인생의 마지막 종말과 죽음이 시간과 역사의 절정인 하나님의 위대한 종말에 의해 삼켜지리라는 사실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p.208
그때까지는 오늘을 붙잡자. 이날뿐 아니라 하루하루를, 확신과 소망을 품고 온전히 붙잡자. 그러나 자화자찬하며 과시하는 초소형 신들처럼 굴지는 말자. 하나님 앞에서 걸으면서, 시대의 징표를 읽으려고 애쓰면서, 항상 우리 세대에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노력하면, 다가오는 위대한 주님의 날에 소망을 두는 모든 이들과 다 함께 일하면서 겸손히 오늘을 붙잡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