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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피성 Jul 12. 2022

박신일, '은혜가 걸어오다'


몇 천년 전이었을지 모를 야곱이 우리에게 낯선 인물일까? 나의 모습과 전혀 다른 성경 속의 인물일까. 야곱은 현대인의 전형을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와 전혀 다를 바 없이, 야망을 품고 이뤄 가려고 인생을 살았던 야곱이다.


야곱은 자신만의 꿈과 의욕이 있었다.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고, 밟고 일어섰다. 형 에서를 제치고 축복을 얻어냈고, 살기 위해 자기 만의 길을 떠났다. 외삼촌의 기업 밑에서 자신만의 정당한 방법으로 자신의 재산을 불려 나갔다. 일확천금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긴 시간에 걸쳐 성실함을 기반으로 일했다. 그로 인해 아내도 얻었고, 자식도 얻었다. 긴 시간이 지나자 독립할 시기가 되어 이제 자신만의 힘으로 독립의 길로 간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야곱은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무일푼으로 시작해 거대한 부를 소유할 만큼 부호가 된 인물이다.


이런 야곱의 모습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너무 잘 투영할 수 있을 만큼 비슷하다. 우리는 야곱과 같은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내고 있다. 그런데 똑같아서 어쩌란 말인가. 무언가 너무 허전하다. 채로 거른 것처럼, 알맹이는 모두 빠져버리고 껍데기만 남은 느낌이다. 결국 야곱의 이야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에 무언가 공백을 메울 무언가가 강력히 필요하다.



하나님은 실패와 좌절의 깊은 밤에 찾아오셔서 야곱에게 삶을 변화시키는 꿈을 주셨습니다. 발뒤꿈치를 잡은 자, 남의 것을 빼앗는 자 a heel-grabber를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는 자 a grace-grabber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김신일, 은혜가 걸어오다, 두란노, p.84





이 책을 관통하는 것은 ‘은혜’다. 끊임없이 반복되고, 새롭게 해석되는 것은 오직 은혜다. 은혜라는 말 외에는 야곱을 설명할 수가 없다. 은혜가 빠진다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책의 표지를 한번 다시 본다. ‘은혜가 걸어오다’ 너무나 적절한 네이밍이다. 그러나 부제는 조금 삐딱하게 보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의 불행을 이긴다’ 본 책에서는 ‘불행’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한번 정독하고, 다시 슬쩍 리뷰해봐도 무언가를 불행으로 언급한 부분을 찾기가 힘들다. 오히려 에서의 선택, 이삭의 선택, 리브가의 선택, 라반의 선택, 라헬의 선택, 아들들의 선택, 결국 야곱의 선택, 모든 선택들이 눈에 들어온다. 대신 그 선택에는 하나님이 없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하나님이 없는 선택이므로 불행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불행히도 우리는 하나님 없는 자신의 선택들이 만들어온 결과 아래 모두가 정직하게 서야 한다. 야곱도 그랬다. 본인의 선택에 의해 살아왔던 인생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야 한다. 그 선택들에 죄가 깃들여 있다. 은혜의 ‘결’과는 확연히 다르다.



성경은 여전히 또 실수하고, 또 죄를 짓고, 자신이 해 오던 익숙한 방식을 선택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미완성의 순례자로서 걸어가고 있는 실존의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회심을 해도 본질적인 죄성의 문제는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김신일, 은혜가 걸어오다, 두란노, p.202



그러나 저자의 일관된 해석과 안내처럼, 우리는 삶 속의 일련의 죄를 선택함에도 불구하고 그 위에 길게 드리워진 하나님의 은혜를 본다. 저자의 말처럼 영적인 비극의 상태인 우리 삶에 떨림이 없는 죄가 있으며(p.55), 그럼에도 돌이키지 못해 습관이 되어감에도 불구하고, 넘어지고 비틀거리는 부족한 순례자를 성화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은, 계속해서 부어 주시는 은혜 위의 은혜(p.205)다.


야곱이 그러했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그렇다. 내 많은 선택에 의해 인생을 살아가고, 그것이 결국 죄와 연결됨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못해 일상에 자리를 잡아버렸고, 끊임없이 후회와 회개를 반복한 나머지 내가 너무 초라해 보일 때, 나를 묵묵히 덮고 계시는 주님의 은혜를 본다.


결국 그렇게 우리는, 저자의 다양한 해석 가운데 하나인, 감당할 수 없는 은혜, irresistible grace 아래 살아간다.



지치지 않으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는 단지 야곱 한 사람만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은혜, irresistible grace’는 오늘도 우리의 심장을 향하고 있습니다.
김신일, 은혜가 걸어오다, 두란노, p.240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감당할 수 없는 은혜 아래 살아가는 나, 죄의 악순환에 있는 나,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는 '방향을 바꿀 것을 제안한다. 어쩌면 평생 야곱 위에 드리워진 은혜는 계속해서 야곱에게 방향을 바꾸라고 제안했을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선택이 야곱의 선택이었던 것처럼, 방향을 바꾸는 것도 야곱의 선택에 의해서 가능하다.


저자는 방향을 바꾸기 위해 한 가지를 제안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홀로 나아감이다. 내 감정과 내 생각을 이기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한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홀로 나아가야 한다. 지금, 하나님께 홀로 나아갈 시간이다.



야곱에게 무엇이 새로운 출발입니까? 그에게 있어서 새로운 출발은 다른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 인생의 방향을 옮긴. 것이었습니다. 잘못의 악순환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야곱을 하나님이 붙드셔서 예배의 자리로 끌고 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야곱의 인생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셨습니다.
김신일, 은혜가 걸어오다, 두란노, p.236



한편 한편이 주일 설교 말씀처럼 느껴진다. 책 한 권이 야곱이 인생사를 기반으로 하고, 야곱의 출생, 야곱의 성장, 야곱의 도피, 야곱의 성장, 야곱의 귀향 등 각 장마다 야곱의 삶의 면모들을 가감 없이 드러내 준다. 그런데 야곱의 삶을 스스로 나의 삶에 투영해 보면 여지없이 들어맞는다. 단순한 야곱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다. 그래서인지 감당할 수 없는 은혜라는 저자의 마지막 고백에 숙연해지기도 한다.


설교 같다고 하여 쉬운 것은 아니다. 저자는 은밀한 구속사적 해석들을 곳곳에 심어 놓았고, 편안한 해석으로 우리에게 던져준다. 라헬의 죽음에 대한 구속사적 의미가 대표적이다. 라헬의 의미는 암양이다, 야곱이 양을 칠 때 그가 치던 양 중에 죽은 암양이 없었다. 그러나 라헬은 부모의 우상을 훔쳤고, 야곱은 모른 채, 훔친 자는 죽을 것이라고 했다. 결국 라헬은 막내아들을 낳다가 죽는다. 라헬, 암양이 죽고 아들을 얻는다. 이는 구속사적 의미가 짙다. 어린양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죄로 인해 죽고, 생명을 낳는다.


또한 인용된 문장 하나하나가 내용 적용이 뛰어나다 그중에서 J. I. 패커의 말년 인터뷰의 내용이 상당한 울림을 준다.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다 '바르게 걸을 수 있는 능력'을 잃었을 때, 하나님을 더 잘 볼 수 있지 않았을까.



‘89세의 패커, 비록 시력을 잃었지만 그는 여전히 그리스도를 봅니다. On losing sight, but Seeing Christ.’
김신일, 은혜가 걸어오다, 두란노,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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