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그 사람과 결혼하게 됐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나랑 식성이 잘 맞고 내 식성을 존중해 줘서.”
4살 무렵 엄마는 월급날이 되면 오빠와 나에게 삼립 옥수수빵과 빙그레 바나나 우유를 하나씩 사주셨다. 그럼 우린 신나서 먹었고, 엄마의 월급날이 빨리 다시 돌아오기를 바랐다. 엄마가 빵과 우유를 사 오셨는데 내가 이미 잠에 든 날도 있었다. 그럴 땐 엄마가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부르며,
“엄마가 바나나 우유랑 빵 사 왔는데 안 먹을 거야?”하면 나는 눈을 감은 채로 느릿느릿 기어와 엄마 무릎을 베고 누워 우유에 꽂혀있는 빨대를 빨곤 했다. 우리 집엔 소시지 반찬 같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이 없었으므로 당시의 내게 바나나 우유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다. 사실 이 이야기를 꺼내는 진짜 이유는 내게 식탐이 있음을 정당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도 사고 싶은 것을 못 사는 것, 가고 싶은 곳을 못 가는 것보다 먹고 싶은 것을 못 먹는 게 서러웠다. 그래서 인간에게 필요한 ‘의, 식, 주’를 배우면서 단연 ‘식’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대학원에 가서 사귄 남자친구는 내게, "아~! 나 죽기 전에 킹크랩을 한 번이라도 먹어봤으면 좋겠어!"라는 얘길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나서 기념일에 한 횟집에서 킹크랩을 사주었다. 그 덕분에 그나마 그와의 과거를 조금 미화할 수 있게 되었다.
30대에 들어서며 내 식성은 점차 완성되어 갔다. 하필 해물로. 내가 죽기 전에 꼭 먹어야 하는 음식이 있다면 그건 간장게장일 것이다. 내겐 항상 먹고 싶은 음식이 간장게장, 양념게장, 대게찜, 킹크랩, 꽃새우, 도화새우, 가을철의 살아있는 흰다리새우, 참치회, 꽃게찜, 해물찜, 아귀찜, 오징어회 같은 것들인데 슬프게도 모두 대학생이나 대학원생, 임용고시생이 사 먹기엔 비싼 음식들이었다.
임용고시는 내게 큰 스트레스를 안겨주었으므로 난 자주 더 그것들이 먹고 싶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점심으로 삼각김밥을 먹다가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나 오늘 참치회 좀 사줘. 돈이 없는데 너무 먹고 싶어. 나중에 갚을게.”
친구의 시간과 취향과 돈을 갈취하는 뻔뻔한 부탁이었음에도 그 친구는 흔쾌히 들어주었다. 다음날 그 이야길 들은 당시의 남자친구는 한숨을 쉬며,
“니가 지금 돈 꿔서 참치회 사 먹을 때야? 하.. 너 진짜 시험에 붙을 생각이 있는 거니? 돈도 없는데 웬 참치회야. 난 정말 이해가 안 간다. 너.”
나의 존엄성이 무참히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반박할 수도 없어 짜증이 났다. 내게는 식성을 발휘하는 일이 사람이 잠을 자고, 똥을 싸는 일처럼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그 사람은 알지 못했다. 꼭 그 이유 때문은 아니더라도 그 사람과는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지금의 내 짝을 만나게 됐다. 내가 해물을 좋아한다고 했더니 웃으며 자기도 해물을 엄청 좋아한다고 했다. 해물 안주로 술 마시길 좋아하는 사람이라 너무 좋았다. 지금 와서 이야기해 보면 자기는 그만큼 해물을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난 속은 것 같은 기분에 차갑게 질문을 던졌고 그는 정말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그때 왜 해물 좋아한다고 거짓말했어?”
“아니 좋아해. 정말 좋아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널 보고 나서는 내가 해물을 그렇게 좋아하는 건 아니란 걸 알게 됐어. 너처럼 좋아하는 사람은 진짜 처음 봐.”
어쨌든 그 사람은 처음으로 내게 꽃새우를 맛보게 해 주었고, 임용고시를 본 날에는 근사한 집에서 대게찜을 사주었다. 심지어 부산으로 놀러 갔을 때는 먹기에 죄책감이 들 정도로 팔딱거리는 생새우를 30마리는 족히 까서 내 접시에 올려주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는 자기에게 생갑각류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 이 사람이다! 이 사람이랑 살아야겠다!’
그는 내가 술을 좋아하는 것도, 담배를 피우는 것도, 내가 술을 먹을 때 만나는 사람들까지도 다 이해해 주었다. 내 모든 취향과 기호를 인정받는 일은 마치 잠재되어 있는 나의 장점들을 상대방이 미리 마구 알아 봐주는 황홀한 기분이었다.
결혼 후에 내가 앞서 참치회를 사주었던 그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하자 내 짝이 물었다.
“오늘 가서 뭐 먹기로 했어?”
“가을이니까 당연히 대하구이 먹기로 했는데?”
“근데 너 그거 알아?”
“뭐?”
“그 니 친구 있잖아. 나도 많이 만나봤잖아? 그 친구 해물보다 고기 좋아해. 몰랐어?”
“.... 아닌데? 걘 해물을 훨씬 더 좋아하는데?”
“그건 널 만날 때마다 니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어줬기 때문이거든? 오늘 가서 한 번 물어보든지”
하고는 가소롭다는 듯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친구와 만나고 돌아와 나는 의기소침하게 내 패배를 인정해야만 했다. 그러고 보니 나랑 친한 내 주위의 사람들은 나랑 만날 때 해물 메뉴를 자주 고른다. 나는 티 내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엄청 티가 나나보다.
나는 꽃게를 식당에서 먹지 않고 질 좋은 꽃게만 파는 사장님께 직접 주문해 택배로 받는다. 양념게장, 간장게장, 소금게장, 꽃게탕 전부 내가 만들어 먹는다. 사 먹는 건 비싸기도 하고 맛도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봄 꽃게가 최고라고 하지만 12월 정도의 저렴한 암게가 얼마나 알이 꽉 차 있는지 잘 모르는 것 같다. 대게, 홍게는 탈피 직전에 ‘홑게’라고 불리는데 1월에만 잠깐 나기도 하고 엄청나게 많은 내장과 수율을 품고 있으므로 꼭 맛보는 것이 좋다고 권한다. 단풍가리비는 국내산인데 생각보다 저렴해서 식당에서 먹는 것보다는 주문해서 먹는 것이 훨씬 좋다. 봄에는 독도새우가 생물로 나오므로 산소포장으로 배달시키면 훨씬 싸게 먹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을 주변에 하고 다녔으니 티가 날 수밖에 없겠구나 싶다.
지금도 내가 학교에서 스트레스를 받거나 무기력해져 있을 때, 육아가 힘들어서 꼼짝하기 싫을 때 내 짝이 힘이 불끈 나는 제안을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