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활동을 시작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종종 듣게 되는 질문이 있다. 바로 친정이 어디냐는 것. 그럼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서울이에요.”라고 대답한다. 웬만한 사람들은 그 정도만 듣고 “아~ 가까워서 명절 때 좋으시겠어요.”하고 넘어 가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서울 어디요?”라고 되묻는다. 그럼 나는 아까보다 더 머뭇거리다가 “신도림이요.”라고 해버리고 이야기를 끝낸다.
나의 친정은 구로다. 서울의 외곽에 있는 구로는 아홉 명의 노인이 살았다는 데에서 그 동네 이름을 따왔다. 그래서 집 근처에 당시로는 꽤 큰 공원에 지명을 상징하는 아홉 개의 지팡이 구조물이 들어서 있다. 사람들은 흔히 ‘구로’를 들으면 가장 먼저 ‘구로공단’을 떠올리고 자연스럽게 근처의 가리봉동을 떠올리고 또 바로 옆 대림의 중국인들과 영화 범죄도시를 떠 올린다. 나는 구로에서 나고 거의 30년을 살았다.
구로에서 살았던 집 중에 어렸음에도 인상에 가장 남았던 집은 안에 화장실이 없는 집이었다. 내가 그 집을 기억하는 이유는 화장실이 없어서가 아니라 옹기종기 모여있는 주택의 한가운데가 큰 공터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새 동네가 되어 다시 가볼 수 없으나 어른이 된 지금 생각으로는 그냥 작은 공터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3살부터 7살까지의 온 동네 아이들은 아침을 먹고 부모님이 일을 하러 가시면 모두 뛰어나와 신나게 놀았다. 나는 오빠를 따라다니며 흐르는 콧물을 소매로 닦고 흙놀이를 했기 때문에 소매는 늘 까맣고 반들반들했다. 날씨 여부와 상관없이 밖에서 뛰어놀던 나는 늘 이국적인 검은 피부를 하고 종종 길에 떨어진 과자를 주워 먹었다. 비가 많이 오면 공터가 온통 물에 잠겼는데, 그게 어린 나이에 꽤 신났다. 수영장에는 가본 적이 없지만 거대한 수영장 같았달까. 그런 날엔 오빠는 아빠 등에, 나는 엄마 등에 업혀 근처의 큰집으로 가던 날들을 기억한다. 엄마 등의 그 따뜻함을 기억한다. 공터에서 놀다가 똥이 마려우면 오빠가 얼른 집에 들어가 부엌에 신문지를 펴 주었다. 그럼 거기에 쪼그려 앉아서 똥을 쌌다. 내가 다 쌌다고 말하면 오빠는 휴지로 엉덩이를 닦아주고 신문지에 같이 넣어 돌돌 말아 커다란 뚜껑 있는 대야 모양의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그 이후 억척같은 엄마와 일의 결과와 상관없이 성실한 아빠의 노력으로 우린 점차 큰 집으로 이사해 낡은 아파트까지 오게 되었다. 나는 1년이지만 유치원도 다니게 됐고 꽤 걷지만 길은 건너지 않아도 되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근처 중학교로 배정받아 쑥쑥 커나갔다.
중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싸움이 잦았다. 복도에 피가 떨어져 있기도 하고, 화장실에서는 집단 폭행이 수시로 일어났다. 아무것도 알지 못했을 리 없는 선생님들은 한 번도 전면에 나선 적이 없음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오히려 우리를 ‘구로동 쓰리영에 원케이’라며 당시 구로동에 있던 꼴통 중학교 4개의 머리글자를 따서 불렀고 교사의 기대를 받지 못한 우리는 한결같이 떠들었을 뿐이다.
길에서 싸움이 걸린 적도 많다. 모든 아이들이 그런 경험을 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나는 당시에 오빠와 치열한 전투 중이었으므로 작은 체구임에도 입이 걸었고 표정엔 독기가 가득했다. 그래서 누군가 나와 부딪히거나 날카로운 눈빛만 보내도 똑같이 응대했기 때문에 더욱 싸움에 자주 휘말렸다. 그때마다 생전 처음 본 사람과 원수같이 싸우길 반복했다. 늦은 시간에는 술에 취한 사람에게 희롱을 당하기도 했는데 그때는 그냥 지나가던 개에게 물렸다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럼에도 그때까지는 동네가 싫지 않았다. 그 동네에만 있었고, 그 동네 사람들과만 지냈으므로.
대학에 가고 나서 나는 구로동이 참 싫어졌다. 다양한 곳에서 살던 사람들이 모이는 대학에 오자 모든 친구들이 다 나처럼 살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는데 그게 내겐 바보 같게도 꽤나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친정이 ‘구로’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며칠 전 남편과 근사한 곳에서 오마카세로 점심을 먹고 있을 때였다. 다찌 자리에 앉아 셰프님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데 그분이 내게 어쩜 그렇게 해물을 좋아하냐며 고향이 바닷가냐고 물었다. 그러자 남편이 내 답변을 가로채며 말했다.
"와이프 고향은 서울 구로예요. 전혀 바닷가가 아닌데도 해물을 엄청 좋아해요."
"아 구로시구나~!"
나는 괜히 기분이 상했다. 식사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내가 왜 굳이 ‘구로’까지 얘기하냐고 따져 묻자, 남편 눈이 깜짝 놀라 동그래진다. 그 표정에 그냥 체념하듯 난 구로가 싫다고 얘기했는데 남편은 웃으며, “구로가 왜 싫어~~” 한다. “그냥 싫어.” 짧게 답하고는 생각했다.
나는 정말 구로가 왜 싫은가. 이름도 싫고, 위치도 싫고, 학교도 싫고, 아직도 거기가 친정인 것도 싫고 정말 다 싫은데 정말 싫은 이유는 뭔가. 오랜만에 친정에 방문하려고 그곳에 가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내 그 마음이 정말 싫은 것이다.
이쯤 되니 ‘구로’가 불쌍해진다. 걘 무슨 잘못이라고. 불현듯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의 연작 중 한 편인 ‘비 오는 날에는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 속 ‘임 씨’를 생각한다. 하층민 노동자로 괴롭게 생활하면서도 정직하고 성실했던 임 씨. 구로가 그랬다. 정말 딱 그랬다. 구로는 참 슬픈데 정직하고 성실해서.. 아직도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