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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바질 Aug 10. 2021

코로나라고? 세상에.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았다.

감염경로는 깜깜. 일하는 중 자꾸 머리가 어지럽고 헤롱헤롱 한 기분이 들면서 과하게 피곤하기에 혹시 몰라 집에 남아있던 자가진단 키트를 꺼냈다.


사용법대로 따라 하고 스포이드로 용액을 떨어트리는 순간 바로 두줄이 그어졌다. 양성이라는 얘기다.

너무 놀라 터져 나오는 울음을 우겨막고 질병관리센터니, 보건 소니, 미친 듯이 전화를 걸어봤지만 하필 점심시간이라 받는 곳은 아무도 없었다.

2시간 내내 홀로 시한부 선고받은 사람마냥 엉엉 울다가 점심시간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선별 진료소를 찾아 검사를 받고, 양성일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자가격리를 시작했다.


다음날, 걱정되는 마음에 새벽부터 일어나 뜬눈으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8시가 되자 양성 확진 문자가 왔고, 이곳저곳에서 미친 듯이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증상 보고를 하고, 이동경로를 얘기하고, 어느 정도 마무리. 들어갈 수 있는 치료센터가 없어, 2일 정도 자택에서 대기해야 한다고 했다.

사실 집에 있는 동안 증상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확진 판정받은 날은 워낙 하루 종일 꺼이꺼이 울어재껴서 몸이 힘들었던 것 같고, 그다음 날은 맛과 향을 못 느끼는 것과 좀 어지러운 것 외에는 아무 증상도 없었다.


머리가 아파 하루 종일 먹었던 타이레놀






드디어 생활치료센터 이송 날, 나를 기다리고 있는 구급차를 보며 바보 같은 설렘을 느꼈던 것도 잠시.

통통배 버금가는 흔들림과, 방지턱은 가볍게 날아오르는 운전 센스, 차원을 뚫고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 같은 속도감,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역방향으로 배치된 의자.

나와 같이 동행한 다른 환자분은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고, 경기대 앞을 지나며 드디어 내릴 수 있다는 희망에 찼던 마음은 지도에 표시된 현 위치의 방향이 갑자기 의왕시청을 향하는 것을 보고 살얼음 녹듯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마도 길을 잘 못 들으셨던 것 같다. 성남에서 수원까지 장장 2시간 반이 걸렸다니 세상에)

구급차에서 내리면서, 다시는 구급차 탈 일이 없었으면, 그리고 앞으로 구급차를 보면 안에 탄 사람을 위해 기도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구급차에서의 멀미 때문에 울렁거리는 빈 속을 부여잡고 문진을 받고, 엑스레이를 찍고, 방으로 올라갔다.

방문을 열자 나른하게 누워있는 룸메이트와 후끈한 실내공기, 싸이키 조명마냥 깜빡거리는 센서등, 먼지로 가득해 두 걸음 만에 새카매진 발바닥이 나를 반겼다.

1층에서 받아온 종합 안내서로 연신 부채질을 해대며 짐을 풀고, 먼지 가득한 바닥을 구석구석 쓸고 닦고, 깜빡이는 조명을 끙끙대며 고쳤다. 몇 시간 되지 않아 룸메이트는 중환자실로 이송됐고, 방에는 나 혼자 남게 되었다. (불행 중 다행인가..)


처음 타본 구급차, 이때까지는 설렜었지






둘째 날 아침 나는 일어나자마자 찡얼찡얼 울어댔다.

집에 가고 싶다고 찡얼찡얼…. 옆방 애기랑 같이 울었다.

방음 정말 안되거든요 여기…(앱스토어 결제 완료 소리까지 들린다고!!)

열은 계속 계속 올라서 머리는 아찔… 숙소 내부는 아직도 덥기만 하고, 요청한 선풍기는 결국 받지 못하였다.

그나마 기다리던 밥도 한 시간 반이 지나서야 배급받을 수 있었다.


책상에 엎드려 엉엉 울면서, 아 내가 요즘 가졌던 행복은 나의 노력 때문이 아니었구나. 불편함 없는 생활환경의 산물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몸 컨디션도 좋지 않은데, 불편한 환경에, 소음까지… 너무 괴로워서 앞으로의 9일은 물론 당장 오늘 하루도 견뎌낼 자신이 사라지며 눈물이 그렁그렁 앞을 가렸다.


그나마 겨우 남아있던 긍정의 끈이 끊어지며 한없이 울고 있기만 했다. 조금만 더 견디라고, 힘내라는 친구들의 다정한 말에도 분노가 차올랐고, (앞으로 이런 상황에 있는 친구에게는 힘내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게 뭔 개고생이냐고 불쌍하다고 말해주는 쪽이 훨씬 위로가 되었다.) ‘나만 왜…’ 하는 생각에 억울함이 치밀기 시작했다.


집에 있을 때만 해도 37도에 머물러있던 열이, 오늘로써 37.8도를 기록했고, 스트레스 때문인지, 증상이 심해진 건지 왼쪽 머리는 두통 때문에 터져 버릴 것 같고, 체력은 바닥을 쳐서 두세 걸음 걸어 다니다 보면 지쳐버려 헉헉 거리며 다시 침대에 누워야 했다.


에어컨이 시원치 않아 머리 방향을 문쪽으로 옮겼다


몸도 마음도 한껏 지친 상태로 무기력하게 누워 잠을 청하는데, 옆방에 있는 아이가 방을 둥글게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저 어린것이 뭔 잘못을 했다고 이 좁아터진 곳에 갇혀서…. 얼마나 답답하겠어.. 하다가도, 그럼 나는 무슨 죄길래 저 소리를 하루 종일 들어야 하는 건데요.

꿍꽝꿍꽝꿍꽝… 가끔씩 꿍! 하고 뛰어내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이 엄마가 너무 미워 벽을 두드리고 시끄럽다고 얘기하니 그제야 아이를 달래는 아이 엄마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녁 8시가 다 돼서야 저녁밥을 받았다. 갑자기 이유모를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도시락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홀로 ‘안 먹어!!’ 선언을 했다. 의자에 앉아서 씨익씨익 대며 서럽게 울다가, 배가 고파서 결국 다시 주워 책상에 올렸다. 다 흐트러진 도시락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도 한참 도시락을 노려보며 나와의 싸움 (자존심과 배고픔 사이의 싸움이었을까?)을 하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우겨우겨 먹었다. 혼자서 뭔 생쇼인지 정말.

 

분노가 끊임없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저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꾸물꾸물….

마치 절대로 찢어지지 않는 두꺼운 젤리가 내 온몸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아 허공에 발길질을 몇 번 한 뒤에야 겨우 잠이 들 수 있었다.






새벽의 B동 기숙사


셋째 날, 새벽 일찍 눈이 떠졌다.

우리 방은 창문이 서쪽을 향하고 있어서 해가 저무는 시간 (3시-7시)에는 무척 덥다. 그 시간에는 방에서 누워있는 것과 물 샤워 빼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너무 더워서) 비교적 선선한 새벽과 아침시간을 잘 활용해 보자는 생각을 했다.


새벽 4-5시경 기상해 씻고 취미생활을 하고, 밥을 먹고, 청소를 좀 하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점심을 먹고 바로 누워 6시가 될 때까지 쭈욱 자는 거다. 그러면 더위를 좀 잊을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5시쯤 자연스레 눈이 떠졌고, 아침해가 색을 물들이는 빌딩을 빼꼼 바라보기도 하고,

여기 와서 처음으로 창문을 열고 새소리, 풀벌레 소리,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니 문득 세상과 단절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퇴소하는 사람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배급받은 아침을 먹고, 스트레칭과 가벼운 운동을 하고, 화장실 청소를 하고, 점심시간 전까지 친구와 전화통화를 했다. 여기까지는 마음이 몹시 좋았다. 어제 마구 분노를 쏟아낸 내가 조금 부끄럽기도 했고 뭐, 그랬다.


저 플라스틱 의자 위에 도시락을 배급받는다


점심 배급 안내 방송이 울리고 서둘러 밖을 나갔는데,

엥? 내 것만 없잖아?

믿기지 않아 여러 번 두리번거렸지만 정말 내 것만 없었다.

다급히 생활지원센터에 전화를 걸었는데, 넘어오는 건 신경질적인 대답과 수화기 가득한 한숨.

툭툭 대는 말투로 예예, 알겠어요, 말해놓을게요, 네네.

아니 선생님. 지금 화가 나는 건 저예요. 저만 밥을 못 받았잖아요. 제가 무언가를 잘못해서 일이 이렇게 된 건 아니잖아요.

다시금 분노가 차올랐지만, 저쪽도 많이 힘들고 바쁠 테니 일단은 기다리자. 하는 마음으로 30분을 흘려보냈지만

도시락은 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전화기를 다시 들었고, 3번의 시도 끝에 걸린 전화에서 들은 얘기는

“13**호에 사람이 지금 계시나요?”였다.

예, 저요-, 지금 전화를 걸고 있는 제가 이 방에 살고 있습니다.

대충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방에는 아무도 없는 걸로 되어있는 것 같았다.

내 이름과 생년월일, 방 호수를 말하고 곧 보내주겠다는 도시락을 또 애타게 기다렸다.

15분이 흘렀고, 도시락은 올라오지 않았다.

배고픔에 날이 서버린 나는 미친 듯이 생활지원 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10번즘 걸었나, 그제야 또 다른 사람이 전화를 받았고,

또 같은 내용을 물어봤고, 같은 대답을 했다.

뭐지 전달이 안된 건가? 의아한 마음에 마지막으로 한번 더 기다려 보자 했다.

기다림의 시간이 1시간을 넘어가자 ‘ 아 이거 내가 점잖게 굴면 오늘 점심밥은 없겠는걸, ‘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또다시 몇 번의 전화연결 끝에 받은 상대방에게 울분이 가득한 목소리로 억울함을 큰소리로 토해냈다.

그러고 10분 뒤, 잔뜩 찌그러진 도시락 하나가 방문 앞에 놓였다.


뿌드득 소리가 나는 일그러진 뚜껑을 열면서, 오는 길에 잔뜩 성질이 나 도시락을 내던졌을 누군가를 상상하니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어제의 내 맘 같아 웃겼다. 갈 곳을 잃은 분노랄까.






넷째 날, 앞으로 퇴소까지 6일.

오늘부터는 시간표를 계획해 움직여보자고 마음먹었다.

새벽 5시 반쯤 기상해 대충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창가에 앉아 창문을 열고 어제 먹지 않고 챙겨둔 사과를 먹는다.

이 시간에는 정말 상쾌한 바람이 불어와서 기분이 좋다.

5시 40분부터 50분까지 아침해가 빨갛게 나무를 물들이는 것을 구경하다 6시부터 약 40분 정도 퇴소하는 사람의 숫자를 센다. 오늘은 57명.

그리고는 짧은 명상 후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아침밥을 기다린다. 기상 후부터 13시까지가 이곳에서의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해가 아직 익지 않아서 창문을 열어놓아도 바람이 선선하고, 옆방의 소음도 없다. 책상에 앉아 조용히 일기를 적는다. 나가서 먹고 싶은 것들이나 하고 싶은 것들을 잔뜩 노트에 끄적여도 본다.


아무 맛도 안 나던 사과. 사각거리던 식감만 기억이 난다.


점심 후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가장 큰 골칫거리였는데, 오늘은 시험 삼아 운동을 해봤다. 어차피 더우니 블라인드를 닫고 윗몸일으키기, 팔 굽혀 펴기 같은걸 잔뜩 했다.

운동이 끝나고는 방바닥 구석구석을 쓸고 닦고.

분명 입소 첫날에 깨끗이 청소해놨다고 생각했는데 언제 먼지가 이렇게 쌓였지, 싶었다. 삐질삐질 흘린 땀을 샤워기로 씻어내고 티비프로그램을 한편 정도 시청하고 낮잠을 청한다.


여기 와서 가장 좋은 건 알람을 켜지 않고 낮잠을 잘 수 있다는 것. 어차피 시간이 무한하게만 느껴지니, 오래 잠들어있을수록 유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정말 간절하게 눈을 뜨고 싶을 때만 뜬다. 그래도 보통 2시간을 못 넘기지만.


저녁을 먹고 핸드폰을 좀 가지고 놀다 보면 방이 점점 어둑어둑해진다. 8시부터는 본격적인 노을 쇼가 시작되는데, 앞서 말했듯이 방이 서쪽을 향하고 있어 노을이 아주 볼만하다. 노란빛이 산을 넘어 하늘에 어둑어둑한 푸른빛만 남을 때까지는 1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창가에 가만히 앉아 또 구경을 하고, 사진으로 남겨두고.

완전히 해가 넘어가고 희미한 빛만 남아있는 방에 가만히 누워있는다.

어둠이 완전히 방을 잠식할 시간 9시, 폐기물 수거 안내방송이 울린다. 잠시 불을 켜고 쓰레기를 방문 밖에 내놓고, 일어난 김에 마지막으로 화장실을 들르고, 물을 마신다.

불을 끄고 말똥말똥한 눈으로 어둠을 바라보며

‘오늘 자면 이제 5일 남았네. 아니지, 마지막 날은 일찍 퇴소하니깐 4일 남은 걸로 쳐야 해,’ 손가락으로 요일을 세어가며 5일 남았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지, 4일 남았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다 잠이 들었다.


여기 온 후, 해가 지고 난 이후의 시간들이 조금 무겁게 느껴져서 최대한 빨리 자려고 노력 중이다.

감기는 눈을 기다리고 있다 보면 문득, 여기서 영영 나가지 못하게 될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기분이 들어, 숨이 턱 막혀 오르는 게 느껴진다. 그 기분을 지우고 애써 잠이 드는 매일이다. 오늘만 지나면 이제 절반을 지나는 건데, 얼른 밖에 나가고 싶다. 나무 그늘 아래서 산책하고 싶다.







5일째, 이 생활에 이제 꽤나 적응을 한듯하다.

어젯밤 중국에서 학창 시절을 같이 보낸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영상통화로 구경을 시켜주니, 예전 지내던 학교 기숙사 생각이 난다며, 그때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 친구와는 약 2년간 같은 학교에 다녔었는데, 말도 안 되는 학칙이 난무하던 학교였다.

외출은 주 1회 허용이었었나? 뜨거운 물은 아침 6시쯤에 한번, 저녁쯤에 또 한 번, 1시간 정도만 나왔고, (그래서 겨울에는 끓인 물을 큰 바구니에 찬물과 섞어 쭈그려 앉아 씻고는 했다. 1980년 아니고요 2010년입니다.) 핸드폰과 컴퓨터는 모두 압수. 학교 내에 매점은 없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아 그리고 아침 조회도 있었다. 새벽 6시에 운동장에 집합해 400m의 거대한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숙소로 돌아가 등교 준비를 한다. 친구와 오랜만에 회상을 하면서, ‘와 진짜 우리 거기서 뭐하고 놀았지?’라는 말을 서로 수도 없이 반복했다.


다행히 룸메이트가 없어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 좁은 방에서 벽도 없이 임의로 배정된 룸메이트와 먹고 자고, 문에 잠금장치도 다 제거해버려서 남자 사감 선생님이 벌컥벌컥 문을 열어젖히고, 한 달에 한 번쯤 불시로 내가 없는 내방을 작은 서랍 하나 빠짐없이 구석구석 검사받고, 바퀴벌레 시체쯤은 덤덤하게 쓰레기 받기에 올려 버리고.

정말 기초적인 의식주 외에 인간이 필요로 하는 부수적인 것들을 모두 배제한 곳에서 2년을 지냈는데, 지금 고작 5일 가지고 울고불고 그 난리를 치다니.

근데 또 돌이켜 생각해보니, 패턴이 항상 비슷했던 것 같다.

[말도 안 되는 환경이 주어지면 일단 울고불고 난리난리를 침 - 컴플레인 미친 듯이 걸고, 이건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며 주변 사람들에게 하소연함 - 해결이 안 된다는 걸 받아들이고 나면 누구보다 잘 적응해서 별거 다하면서 지냄.]


어떤 느낌이냐면,

1) 별말 없이 들어와서 방에 이불 커버 하나 바꾸지 않은 채로 그대로 살다 나가는 사람

2) 꿍시렁꿍시렁 거리면서 가구 배치 바꾸고, 커튼 빨래하고, 샤워 헤드 새로 사서 바꾸고, 화분 갖다 놓는 사람


나는 2번의 사람인 거다. 기숙사 특성상 한학 기마다 방을 비워줘야 하는데, 한 3년은 그 방에서 안 나갈 사람처럼 잔뜩 꾸며놓고 살았다.


옛날 얘기가 길어졌는데, 여하튼, 좋은 환경은 인간을 예민하고 약하게 만드는 걸까?라는 생각을 했다.

특히 요즘따라 소음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어마 무시해져서 그런 생각이 더 드는.. 나 진짜 중국에서 어떻게 산거야?


다행히 방을 둥글게 뛰어다니던 옆방 아이는 어제 퇴소했고, 엄청나게 평화로워진 방 안에서 오늘도 어제와 같은 하루를 보냈다.






거짓말이 아니고 정말 매일 하늘이 이랬다


6일째, 여기서 생활하는 게 꽤 괜찮다고 (미친거아니야?) 생각이 드는 순간이 몇 차례 있었던 날.

오늘도 부지런히 퇴소자를 세고, 운동을 하고, 청소를 하고, 완전히 적응해 버린 것 같다.

특이사항이 있다면 몸에 두드러기가 생겼는데, 운동을 하거나 샤워할 때만 올라오는 걸로 봐서 콜린성 두드러기(?) 인 것 같다.

좀만 덥다고 느껴지면 온몸이 따끔따끔 빨갛게 부어오른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백신 후유증으로 나오는 사람이 몇 있는 것 같다. 이것도 그냥 코로나 증상 중 하나인가?

여하튼 움직임에 대한 열망이 나날이 강해지고 있다. 첫날 의료기구들을 받았던 바구니에 생수 3병을 담고 데드리프트를 하면서 캐스트 어웨이와 올드보이 그 중간 어디쯤… 와버렸다고 느껴졌다.

 

오늘도 방에서 조용히 쉬고 있는데 갑자기 우당탕탕 방역복을 입으신 분이 무시무시한 산소통과 호스를 들고 방에 들어오셨다. 다급한 그분의 몸짓과 질문공세에 나는 상황을 제대로 물어보지도 못하고 코에 호스를 꽂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질문할 타이밍을 보고 있었는데, 어딘가로 다급히 전화해 나의 상태를 보고하더니 갑자기 밖으로 나갔다. 코에 호스를 꽂은 채로 그분이 오시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데, 침대에 남겨두고 간 쪽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000C 호흡곤란/가슴통증/39.3도.’ 동명이인의 환자분의 상태가 적힌 쪽지였다. 그분이 빨리 오셔야 (동명이인의) 저분이 빨리 치료받을 텐데, 초조하지만 코에 호스를 그대로 꽂은 채로 얌전히 기다렸다. 또 우당탕 정신없는 모습으로 들어오셔서 내 코에 꽂혀있던 호스를 정신없이 회수하고는 슝- 밖으로 나가셨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침대 끝에 앉아 내 이름이 정말 흔하긴 하구나. 생각했다.






해가 저무는 방


7일째, 친구가 대뜸 휴가를 가자고 연락이 왔다. 제안보다는 강요에 가까웠지만. (이미 날짜와 숙소는 정해졌고 나만 동의하면 되는 상태) 아직 7월인데 10월의 얘기를 꺼냈다. 지난날의 나였다면 여행 3일 전까지도 ‘글쎄, 갈 수 있을까’라고 얘기했겠지만, 이제는 정해진 일상이 있는 나이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그때는 바빠서라기보다는, 프리랜서라는 직업상 앞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었다. 돈을 많이 주는 일이 갑자기 여행 일정과 겹쳐버린다면, 한 달을 계획했건, 1년을 계획했건 쓰린 속으로 여행은 포기해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일 제의가 갑자기 찾아왔기 때문에 언제나 어중간한 마음으로 당장 내일의 일도 확신하지 못한 채 살았다.

예기치 못한 여행이나 좋은 제의가 깜짝 선물처럼 갑자기 등장하는 것도 나름 즐거웠으나, 5년을 그렇게 살다 보면 지치는 것도 당연하다. 언제나 여행처럼 붕뜨고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갈 순 없는터.

2달 뒤의 계획을 확신에 찬 마음으로 승낙하면서 묘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휴일과 일하는 날이 명확하게 구분되고 달마다 같은 금액의 돈을 따박따박 받는 삶이 진짜 시작되었구나.

자유로운 삶을 포기하지 못해서 그렇게 원하던 안정적인 삶을 먼발치에서만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드디어 내가 용기 내어 포기했구나. 뿌듯하고 대견스러운 마음에 스스로를 마구 칭찬해줬다.






해가 다 들어온 아침 8시의 풍경


8일째, 퇴소 관련 연락을 받았다.

이곳에서 이제 하루만 버티면 밖에 나갈 수 있다.

퇴소 날이 당장 코앞으로 다가오니 설레는 마음에 잠도 오지 않는다.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고 나가자마자 처리해야 할 일들을 적었다. 너무 신나!







드디어 퇴소 날.

김치공장 아주머니 같은 비닐옷과 헤어캡을 쓰고 느려 터진 엘리베이터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렸다. 나름 일찍 일어나서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1층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후덥지근한 복도의 열기에 비닐옷은 팔에 찰싹 붙어 불쾌한 감각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빨리 나가고 싶어 애달복달하는 마음은 더위를 증폭시키고 있었다. 그런 끈적한 비닐옷을 입고 하루 종일 일하고 있을 의료진들을 바라보니 마음 한구석에 죄책감이 생겼다. 화내서 죄송해요.


소독을 마치고 후덥지근한 아침 공기를 가르며 뛰어갔다. 오랜만의 달리기에 다리는 후들후들 심장은 쿵쾅쿵쾅. 이렇게 도합 11일간의 격리생활이 종료됐다. 아 행복해!



입소날부터 쓴 일기를 다시 읽어보니 짧은 10일 동안의 감정 변화가 어마 무시한 게 느껴진다. 화를 냈던, 울었던, 과정이 어쨌든 잘 견 내준 나에게 박수를… 스스로의 감정에 대해 깊게 들여다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지금의 흐름이 너무 빨라서 잠시 멈출 시간이 필요했던걸 수도,라고 다 끝난 마당에 긍정적으로 생각해본다. 후각은 아직 돌아오않아 나를 반겨주는 집 냄새 같은 건 모르겠지만, 엄마가 내가 돌아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청소했을 방을 보니 마음이 아늑해진다. 얻는 게 더 많았었다고 대충 위로하고 허겁지겁 그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일을 처리했다. 코로나 안녕! 우리 두 번은 만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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