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창업 전선에 정부 지원금이 적지 않게 풀렸습니다. 정부 부처별로, 유관기관이, 지방자치단체가, 대학이…. 창업 공모전에 당선되면 최소 5000만원에서 많게는 5억원까지 지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정부가 창업 전선에 마중물 역할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벤처캐피탈 업계는 정부의 과도한 지원이 투자생태계를 가로막고 있다고 비판도 하지만, 황무지 같은 생태계에 오아시스를 깔았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창업 생태계와 기술 트렌드가 빠르게 변화하는데 한국만 뒤처져서는 안 되겠죠.
이에 김광현 창업진흥원 원장님을 만나 봤습니다. 창업진흥원은 정부의 창업 정책의 최전선에서 각종 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는 조직입니다. 김 원장님은 전자신문-한국경제신문 기자와 데스크를 거쳐 디캠프 원장을 지낸 분이죠. IT 칼럼리스트 '광팔이'로도 유명합니다. 전부터 뵙고 싶었는데 창업진흥원이 대전에 있어서 물리적으로 어려웠습니다. 그러다 원장님이 시간을 내주셔서 서울창업허브에서 어렵사리 만났습니다. 김 원장님으로부터 한국 창업 생태계의 현주소와 과제 등을 여쭤봤습니다.
Q. 창업진흥원장으로서 1년간 소회와 느낀 점은.
A. 임직원들과 소통 채널을 열고 신뢰를 쌓기 위해 노력했다. 임직원이 직접 혁신 아이디어를 내도록 유도했고, 이에 맞는 미션과 방향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활동했다. 자발적으로 창업지원 방식을 혁신하는 모습으로 이어졌다. 신문사에서 사내벤처를 이끈 경험이 창업자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Q. 왜 민간 창업진흥원장을 뽑았다고 생각하나.
A. 창업 정책을 혁신해 달라는 뜻으로 보고 있다. 취임한 뒤로 조직원들에게 소통을 명확히 할 것을 주문했다. 예컨대 창업자들을 상대로 100만원 상당의 세무·회계 바우처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창업자들은 다들 번거로워했다. 취임 후에 이 시스템을 간소화하고 이용을 편하게 했더니 서비스 만족도가 대폭 개선됐다. 자칫 애물단지로 전락할 뻔한 일을 바꿨다. 창업진흥원이 할 수 있는 일은 절차를 혁신해서 창업자들이 지원을 쉽게 받고. 보조금 헌터들은 넘보지 못하게 하는 데 있다. 취임 후 임직원들이 원장과 맞짱 토론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점심 도시락 미팅도 한다. 원장이 하려는 일을 인트라넷에 공유함으로써 메시지 전달을 명확히 했다.
Q. 정부가 제2의 벤처 붐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인가.
A. 저성장·자동화에 다른 세계적 추세다. 각국이 창업을 통한 일자리 창출에 나서고 있으며, 미국·중국 등 주요국 간에 창업 경쟁이 치열하다. 세계적으로 대기업을 통한 일자리 창출은 한계에 다다랐다. 신기술을 통한 기회형 창업을 통해 산업을 혁신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게 시대적 과제다. 이에 정부도 '제2의 벤처 붐'을 내걸고 기회형 창업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Q. 창업 전선 최전방에서 느끼는 어려운 점은.
A. 지원정책과 더불어 창업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야 한다. 역경을 딛고 창업에 성공한 기업인들을 평가해주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 또 과거 소비자 보호를 위해 만든 규제가 현재 창업과 혁신을 가로막는 경우가 많다. 규제 폐지를 언급하면 기득권층이 반발한다. 불합리한 규제를 혁파할 수도, 내버려 둘 수도 없는 실정이다. 규제 샌드박스 제도에 희망을 걸고 있지만 자칫 골든타임을 놓칠까 우려된다. 규제 개선은 꾸준히 추진해야 한다.
Q. 지난 10여 년 전과 비교해 창업 트렌드가 달라졌나.
A. 2000년 전후 때는 인터넷포털이나 온라인 게임 등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를 막는 불합리한 규제가 많지 않았다. 과감하게 시도할 수 있는 환경이었고, 기사에도 세계 최초란 문구가 매일 등장했다. 삼성전자나 에트리 같은 안정적인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전선에 뛰어든 분들도 많았다. 매일 같이 '세계 최초' 타이틀의 기술이 쏟아져 나왔다. 물론 과열된 측면이 있었고, 버블이 꺼지면서 충격이 컸다. 이때부터 창업 암흑기였던 것 같다. 박근혜 정부 때부터 다시 창업 활성화에 나서고 있는데 이때 트라우마가 쉽게 가시지 않는다. 똘끼 있는 사람들이 창업 전선에 안 뛰어든다. 2000년대 전후와 비교해 지금은 창업 전선에 인재가 적다고 본다. 지금은 최초로 개발한 기술·서비스도 규제에 막혀 타이밍을 놓치기 일쑤다. 창업 지원은 많이 개선됐다. 창업공간이 곳곳에 생겼고, 여러 형태의 지원 프로그램도 나타났다. 아이디어와 의지만 있다면 은행 대출 없이도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다. 엔젤·액셀러레이터·벤처캐피탈 등 투자생태계도 좋아졌다.
Q. 똘끼가 무엇인가.
A. 투자나 기업 경영은 단계에 따라 다르다. 초기 단계 기업은 리더의 역량과 똘끼가 중요하다. 비즈니스 모델이 아무리 좋아도 협업이 깨지면 무의미해진다. 그래서 사람을 많이 본다. 과감한 도전정신과 역경이 닥쳤을 때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도전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 기존 관행에 의문을 갖고 혁신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현재 생태계에 안주하거나 아이디어만 갖고 투자하려는 사람들만으로는 창업은 어렵다. 회사가 커지고 직원이 늘면 내부 갈등이 많이 생기는데 슬기롭게 극복하려면 돌파력과 실행력이 필요하다. 비즈니스 모델은 조금 부족해도 도전적이고 실행력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Q. 20년 전에는 똘끼 넘치는 창업자가 많았나.
A. 당시에는 투자자들이나 심사역들이 비즈니스 모델을 평가한 데 비해 지금은 창업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먼저 본다. 당시에는 워낙 똘끼 넘치는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창업자를 검증할 필요가 크지 않았다. 지금은 똘끼 있는 창업자가 많은 편은 아니다. 지금은 아이디어와 기술을 잘 섞어서 생활 서비스를 혁신할까 하는 사람들이 많다. O2O도 나름대로 밸류 있는 거라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아이디어는 출발이다. 아이디어 자체는 높게 보지 않는다. 그것을 받쳐줄 역량이 먼저다.
Q. 창업·투자·스케일업·엑시트·창업의 선순환 구조가 갖춰졌나.
A. 엑스트가 여의치 않은 게 문제다. 입구는 넓어졌는데 출구가 여전히 좁다. 인수·합병(M&A)이나 기업공개(IPO) 사례도 많지 않다. 엑시트가 잘 돼야 선순환이 가능하다. 엑시트 이후에 재창업이나 투자자로서 후배 창업자를 도울 수 있다. 아직 이런 선순환이 완성되지 않았지만 최근 수년 새 많이 개선됐다. 또 대기업이 M&A로 스타트업을 뺏어간다는 인식은 잘못됐다. 제값 주고 산다면 창업자들이 손뼉 쳐 줘야 한다. 대기업이 먹어버리는 것 아닌가라는 경계 심리가 강한 것 같다. 다만 아직 대기업의 기술 탈취는 있는 것 같다. 이는 정부가 심판 역할을 해야 한다. 한국 산업구조가 대기업의 하청 재하청 구조인데, 21세기에는 안 맞는 모델이다. 대기업과 맞짱 뜰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Q. 기술보다 O2O 등 플랫폼 창업이 많은 이유는.
A. 아이디어와 약간의 기술로 기존 서비스를 개선하는 O2O 창업이 유행했다. 소비자 편익을 늘리는 측면에서 좋게 보고 있지만 O2O 비즈니스의 성공이 쉽지는 않다. 투자를 기피하는 투자사도 생겼다. 판을 바꿀 만한 기술 창업은 여전히 미흡하다. 다만 숨은 고수들이 의외로 많아, 점차 나아지리라고 본다.
Q. 글로벌 네트워크가 부족하다는 비판에 대한 생각은.
A. 해외 시장을 공략하려는 기업을 정부 차원으로 돕고 있다. 2000년 전후부터 해외에 창업공간을 마련해 국내 스타트업의 현지 정착, 투자 유치를 지원했는데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창업생태계의 이해 부족 때문이다. 현재는 해외 진출을 원하는 창업자를 선발해 해외 액셀러레이터의 창업공간으로 보냄으로써 현지 창업자·투자자들과의 협업을 끌어내고 있다. 앞으로는 국내 스타트업·액셀러레이터가 현지에서 후배 창업자들을 돕도록 유도할 계획이다.
Q. 국내 스타트업의 기술력·아이디어 수준은.
A. 최근 한국을 방문한 영국 테크스타·미국 플러그앤플레이 간부들이 좋은 팀이 많으며, 더 많은 팀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서울이 아시아 창업 허브가 될 잠재력이 있으며, 한국에 진출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한국 스타트업의 수준은 낮지 않다. 우수한 인재들이 창업계로 더 들어오면 2000년 전후 벤처 붐 때처럼 매일 세계 최초가 쏟아질 것이다.
Q. 모빌리티처럼 근본적 생태계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 산업군은.
A. 근본적으로 일자리 변화가 가장 클 것이다. 자동화가 급속히 진행되면 일자리는 줄어든다. 은행의 지점 감축과 일자리 감소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대신 아마존과 넷플릭스·에어비앤비·우버가 새로운 일자리를 만든다. 일자리가 사라지기도, 생기기도 하는 복잡한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그렇다고 혁신을 피하면 산업경쟁력을 통째로 잃어버릴 수 있다.
Q. 정부의 과도한 지원책으로 수준 낮은 창업이 난립하는 것 아닌가.
A. 생계형 창업은 과잉이지만, 기회형 창업은 과열이 아니다. 2000년대 초 벤처 붐이 꺼지고 10년 남짓 황무지나 다름없는 창업 암흑기가 이어졌다. 최근 몇 년 새 창업환경이 좋아졌다지만 아직 나무를 듬성듬성 심은 수준이다. 숲을 무성하게 가꾸려면 아직 멀었다. 나무가 무럭무럭 자랄 수 있도록 지원 효과의 극대화 방안을 고민하는 한편 적극적으로 씨를 뿌릴 때다. 창업 문턱을 낮추고, 리스크도 줄여야 한다.
Q. 정부의 역할이 더 필요하다는 의미인가.
A. 정부가 할 건 다 했다. 정책이 부족하지는 않다. 생태계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창업 정책과 관련해 부처 간에 얽혀 있기 때문에 이를 조정할 필요는 있다. 또 잘못 창업했다가는 패가망신한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창업에 성공한 멋진 친구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조금이나마 매출과 이익을 내 직원을 채용하는 회사라면 인정, 존중해주는 문화가 필요하다. 당장 유니콘을 만들라며 노래 부르기 보다는 고용을 늘리고 월급을 잘 챙겨줄 수 있는 창업자들이 많아 나와야 한다.
Q. 창업 성공 가능성이 높은 연령대가 있나.
A.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이 사회적으로 가장 물익은 나이다. 회사 조직이 돌아가는 생리도 알고 회사에서 3~4명 정도 조직을 이끌어본 경험도 있다. 이런 것들을 다 버리고 주변 반대를 뿌리치고 뛰쳐나온 게 30~40대 창업자들이다. 동아리 회장과 창업은 많이 다르다. 50대 성공한 창업자는 전반적으로 보수적이다. 큰일에 배팅보다는 리스크가 적은 사업에 뛰어든다.
Q. 창업지원금이 많이 풀리며 블랙엔젤도 많이 등장하지 않나.
A. 해커도 블랙, 화이트 나뉘는 것처럼 엔젤도 블랙, 화이트 경계가 모호하다. 물론 블랙 멘토는 사라져야 한다. 창업 생태계는 한 번에 맑아지지 않는다. 더러운 물이 줄어드는 것뿐이다. 시간이 흐르면 블랙엔젤에 대한 평판이 생길 것이고 자연스레 정화될 것이라고 본다.
Q. 해외에서 제기되고 있는 스타트업 거품 논란은 어떻게 생각하나.
A. 중국에서 스타트업의 가치가 뚝뚝 떨어지고 문을 닫는 유니콘이 생기는 등 거품 붕괴 논란이 나오고 있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다. 한국의 벤처 붐 때처럼 그간 중국 창업계는 과열 국면으로 치달았다. 다만 세계적으로는 거품이 빠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실리콘밸리에서도 간혹 거품 얘기가 나오지만, 붕괴를 걱정할 단계는 아니다. 투자자들이 잠시 숨을 고를 가능성은 있다. 한국의 경우 스타트업 가치가 미국·중국에 비해 현저히 낮아 문제는 없을 것이다.
Q. 올해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분야나 목표가 있나.
A. 첫 민간 출신 창업진흥원장으로서 혁신을 해야 한다. 지원 프로그램과 절차를 혁신하는 게 임무다. 지난해 부서별 지원 사업 혁신방안을 마련했고 토론회를 가졌다. 토론회 내용의 80%가 올해 창업지원 정책에 반영됐다. 올해는 멘토링 시스템, 온라인 창업교육 시스템, 이상거래 탐지 시스템 등 3개 시스템 개발에 주력할 계획이다. 려고 한다. 온라인을 통해 지역과 무관하게 멘토링·창업교육을 실시한다. 창업교육의 경우 지난해 수료자는 30만 명에 달했다. 올해는 육군 장병들을 대상으로 교육도 할 계획이다. 이상거래 탐지 시스템은 정부지원금의 부정 집행을 사전에 방지하고 투명화하는 예방 시스템이다.
Q. 스타트업 및 예비창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A. 창업을 통해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욕과 실력이 있다면 과감히 도전하길 바란다. 사업자 등록 전, 창업 후 3년 이내, 창업 후 3~7년 등 기간별로 정부 지원책이 마련돼 있다. 시스템 개선을 통해 지원 절차를 획기적으로 간소화했다. 안전한 직장만 생각할 일은 아니다. 100세 시대에는 언젠가 창업을 해야 한다. 도전적으로 살고 창업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