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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콜럼버스 Aug 23. 2019

유니콘 대표는 왜 장관에게 "필요 없다" 말했나

정책 지옥과 생태계 구축의 필요성

출처=pxhere



■ 세종정부종합청사 모 장관실


장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기업을 유니콘으로 키우시는데 고생 많으셨습니다. 젊은 나이에 큰일을 해내셨어요."


이 대표:

"아닙니다. 저희 임직원들이 다 열심히 뛰어줬고, 투자자들이 믿어준 덕분이죠."


장관:

저희도 정부 차원으로 돕고 싶은데, 지원이든 협업이든 필요한 일 있으면 말씀하세요.


이 대표:

아, 아닙니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저희 나름대로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장관:

아녜요, 아녜요. (전화 수화기를 들며) 응, 김 국장, 난데 장관실로 들어와 봐요.


이 대표:

장관님, 정말 괜찮습니다. 현재로서는 정부 지원받을 일 없습니다.


장관:

아녜요. 대표님, 앞으로 대기업과도 많이 부딪혀야 하니 정부가 뒤에서 도와줘야 할 거예요.


(문이 열리며...)


김 국장:

장관님 부르셨습니까.


장관:

응 김 국장 들어와 봐요. 대표님이 앞으로 일하시는 데 도움 되도록, 스타트업들 어떤 지원이 필요할지 박 과장 등등해서 한번 알아봐요.


김 국장:

알겠습니다 장관님.


이 대표:

정말 괜찮습니다. 정말입니다. 만약에 필요한 게 생기면 향후 연락드리겠습니다.


장관:

허허... 젊은 대표님이 아직 장벽을 못 만나봐서 그래요. 어려운 점 있으면 그냥 저랑 여기 김 국장에게 마음 편히 털어놓으세요.






                                                

올해 초 실제 있었던 일을 살짝 각색해봤습니다. 감 좋은 독자분들이라면 이 창업자와 장관이 누군지 눈치채셨을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아녜요, 괜찮습니다"



젊은 창업자는 왜 장관의 호의를 극구 거절했을까요. 정부와 협업을 해 본 일이 있는 분이라면 이 창업자의 심정을 이해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이 대표가 장관에게 도움이 필요하다고 무언가 요청했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까요. 아래 내용은 가상입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



"장관님, 실은 저희가 규제에 걸린 게 있어서 사업 확장이 어렵습니다. 특례 조항이나,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한번 넘어볼 수 있는지 검토해주시겠습니까." 이 대표는 속내를 꺼냈다.



장관은 말했다. "그런 일이 있다면 당장 고쳐야지. 김 국장, 이거 실무진에서 한번 검토해 봐요."



장관과의 미팅이 끝난 뒤 이 대표는 김 국장과 함께 김 국장 사무실로 내려갔다. 김 국장은 세부 내용을 요구했다. 이 대표가 안고 있는 현황과 문제점,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스타트업, 해외 사례, 해결 방안 등등….



또 이런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는 '보고서'를 제출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 대표는 규제를 바꿀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사업개발을 담당하는 최 팀장에게 얘기를 꺼냈다.



"팀장님, 보고서 하나 잘 써주세요. 이거만 잘 되면 일이 쉽게 풀릴 수 있을 거예요."



최 팀장도 반색한다.


     


출처=pxhere



이튿날 김 국장 아래의 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필요한 데이터와 양식 등을 물어봤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일이 진행될지 물었다. 그런데 반응은 의외로 시큰둥하다.



과장은 "보고서를 받아보고 관계 부처 등과 협의해 봐야죠. 일단 기다리세요"



최 팀장은 일주일 동안 성실히 보고서를 작성해 정부에 제출했다. "과장님, 혹시 부족한 내용 있으면 말씀하세요." 꼬리까지 살랑댔다.



그러나 과장으로부터 열흘 넘게 연락이 없다. 재촉하는 것으로 비칠까 먼저 전화를 걸기도 어렵다.



다시 이틀 뒤, 기다리고 기다리던 연락이 옵니다.



"팀장님 글자 폰트랑 서식이 저희랑 안 맞아서 이래이래 저래저래 수정해주셔야겠습니다. 그리고 OO 데이터가 필요하고요, XX 사례도 있어야 해요."



팀장은 직감했다. '아, 결제에서 까였구나.'



그러나 실망감을 감추고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해서 보내겠습니다." 답하고 바로 과장 말마따나 보고서를 고쳐 보냈다.



이틀 뒤 온 연락.



"팀장님, 세종시로 한번 오셔야겠는데요. 저희 윗분에게 설명을 하셔야 해서요. 아 그리고 서류가 좀 필요해요. □□□랑, ◆◆◆, ▲▲▲, ◎◎◎, ★★★, ♥♥♥, ♠♠♠, ☎☎☎ 등등 등등 챙겨 오세요. 메일 보낼 테니 거기에 나온 요건 맞춰 서류도 꾸며주시고요. 그리고 비슷한 스타트업 대표님들 서명이나 성명이나 의견 같은 거 있음 최대한 모아주세요. "


                


출처=pixabay



                        

"하아......." 최 팀장은 한숨이 나왔지만 정부 지원을 기대하고 묵묵히 일을 해나간다.



해당 서류를 정리해서 냈지만 과장·국장·차관을 결재 라인이 올라갈 때마다 비슷한 요구가 쏟아졌다.



김 팀장은 다른 업무에서 거의 손을 놓았다. 일손이 부족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규제만 넘으면 천국이 있으리라….



주변에 열심히 조사를 하고, 같은 의견을 가진 스타트업을 모아 자료를 제출했다. 이 안을 도입함으로써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업종 및 기업을 찾아보고 대책까지 마련하는 꼼꼼함까지 발휘했다.



그러나 결제는 하세월 늘어진다.



약 6개월의 시간이 지나고 정부는 이 기업에 도와줄 수 있는 플랫폼 특례 제도를 만들어 지원하는 방법을 강구했다.



정부 측에서는 기존 기업에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이래저래 보완책을 덧댔다. 정책은 누더기가 됐다. 이 대표와 최 팀장은 이게 어디냐며 기대감을 놓지 않았다.



그런데 정부는 이를 다시 관계 부처와의 협의를 거쳐야 하고, 국회에도 보고를 해야 한다고 한다.



이 일을 맡았던 정부 관계자가 욕심을 부리다 보니 일이 좀 커졌다. 또다시 시간은 기약 없이 길어진다. 이 대표는 정부 일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사업을 추진한다.



시간이 흘러흘러 약 1년이 지난다. 장관은 바뀌었고, 담당 국실장들도 다른 곳으로 전배를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정부 관계자가 해당 건을 추진할 계획이며, 언론에 보도자료를 내겠다고 업무 협조를 요청한다.



최 팀장은 내키지 않았다. 일이 산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힘없는 기업인데….



문제는 터졌다. 이 안건이 언론 보도를 통해 전국으로 퍼지자 피해가 우려되는 기업인들이 들불처럼 들고 일어선 것이다.



"특혜를 폐지하라, 영세기업 다 죽인다" 청와대 앞에서 연일 시위가 벌어졌다. 이 대표 기업에 대한 비난 여론도 커지고, 시민단체가 찾아와 날마다 비판을 쏟아낸다. 국회까지 떠들어 댄다.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 몰랐던 관료들은 입을 다물고, 위에서 누군가 처리해주길 기다린다. 새로 만들어질 '무언가'는 유령처럼 언제 통과될지 모른 채 방치되고 말았다. 책임은 아무도 지지 않고, 이 대표만 난처해졌다. 



결국 이 대표는 투자자들에게 비판을 받고, 대책 마련을 요구받는다. 일부 투자자들은 이 대표의 퇴진을 주장하기도 한다. 장관의 호의가 결국 이 대표를 지옥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출처=pixabay






다소 극단적이지만 얼마든지 현실에서 나올 수 있는 얘기입니다.



한국은 이미 기반이 닦여 있고 한 가지를 바꾸기 위해선 10개 이상을 손봐야 할 정도로 모든 일과 제도가 맞물려 있습니다.



거쳐야 하는 과정이 많고 정책 변수나 변동성 역시 크기 때문에 정부의 스타트업 지원 정책은 정말 실현되기 어려우며, 시간도 오래 걸립니다.



예산을 따오기보단 틀을 바꾸는 일이 많기 때문에 정부 담당자들로서도 큰 애정을 갖지 않습니다.



건 바이 건으로 접근하는 정책은 통과가 어렵고 효과를 내기 힘들며, 되레 스타트업들의 발목을 잡을 수 있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Startup_ecosystem



                                 

이에 비해 중국처럼 아직 산업 기반이 공고히 갖춰지지 않고, 정부가 일방적으로 무언가 추진할 수 있는 나라는 신사업을 펼치기 좋습니다.



이 때문에 정부의 방향도 스타트업을 '정책'보다는 생태계 '구축'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하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큰 틀에서 이 생태계는 어떻게 구축해야 할까요.



현재 한국의 창업 지원 정책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강력합니다. 창업 전, 창업 후 1~4년, 4~7년 등 창업 시점을 단계별로 나눠 마중물로 쓸 수 있는 자금 지원과 사무실, 데이터, 네트워크 확보, 투자 연결 등 단계별로 촘촘하게 지원을 펼칩니다.



      




출처=pxhere


                                  

다만 여러 규제와 기득권에 막혀 데이터 활용이나 금융·의료 등 규제 산업에 진출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큰 틀의 혁신과 변화를 끌어내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창업자들은 엄두도 못 내는 분야도 많죠.



이스라엘과 비교해 볼까요. 이스라엘은 텔 아비브 시 정부가 도로 정보와 대중교통 정보, 심지어 표지판 정보까지 제공해 창업자들의 신기술 개발을 돕고 있습니다. 돕고 있다기보단 열어 둔 것이죠. 알아서 가져가라며. 이스라엘 군 보안 기술도 민간으로 가져가 창업에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 보안 기술을 시장에 내놓음으로써 이스라엘 군의 보안 기술 수준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만약 부족하다면 군은 또 이를 보완한 기술을 개발합니다. 계속된 혁신입니다.



엑시트 역시 어렵습니다. 한국은 정부 주도의 압축 성장을 일군 나라이기 때문에, 대부분 산업 분야가 소수 핵심 사업자가 과점하는 구조입니다. 이 기득권을 강고하게 지키다 보니 신기술 수요가 크지 않습니다. 최근 한일 분쟁으로, 그간 국내 중소기업들이 혁신적 기술을 많이 내놨는데 사장된 사례가 많다는 사실이 알려졌죠.



좋은 기술보다는 싼 가격이 중요한 시장의 요구 때문에 스타트업이 번성하기 어려운 환경입니다. 자연히 엑시트나 투자를 받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스타트업 시장은 전 세계 시장을 상대로 합니다. 온라인, ICT 기반 사업이라 굳이 국내를 타깃으로 삼지 않아도 됩니다. 이 결과 산업 전체적으로 박리다매형 수익 구조가 됐습니다. 이러다 보니 인구가 많고 해외 진출이 용이한 미국이나 중국 같은 나라들의 스타트업이 번성하고 있습니다. 국내 스타트업이 일찌감치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실제 국내 유니콘 기업 중 한곳을 제외하곤 모두 해외 투자를 받아 기업가지 10억 달러를 달성했습니다.



이에 국내 스타트업이 번성하고 비즈니스 모델이 세계로 뻗어나가기 위해선 해외 진출과 네트워크 강화가 필요합니다.



최근 국내 한 은행계 VC와 얘기하던 중 "자사는 은행의 해외 지점이 많기 때문에 해외 진출이 쉽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당황했던 적이 있습니다. 결코 해외 지점과 영업점으로 승부할 수 없습니다. 상호 신뢰하고 동업할 수 있는 수준의 네트워크와 기업 연계가 필요합니다. 유대인 자금이 이스라엘 스타트업을 육성해 나스닥에 상장시키듯이요. 이를 위한 정부와 대기업들의 다각도 노력이 필요합니다.



성공 사례가 나오고, 비전이 보인다면 스타트업을 통해 자신도 세계적 기업인으로 거듭나겠다는 젊은 창업자가 많이 등장할 겁니다.




1. 규제 완화
2. 엑시트 시장 활성화
3. 글로벌 네트워크 강화
4. 청년 창업 활성화


                                           

이 네 가지 문제를 달성하면 한국 스타트업의 생태계는 한결 튼튼해지고 경쟁력 있는 기업들이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전 세계 공통으로 적용되는 스타트업 생태계는 없습니다. 미국·이스라엘·이탈리아·싱가포르 등 각 국가들도 자연발생적이든, 정책적으로든 자국에 맞는 생태계를 구축해 산업 전환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한국도 이에 대한 고민과 여론 조성이 필요해 보입니다. 

           








                                      

이런 생태계 구축 이슈와 관련해 8월 20일(화) 대한상의 국제회의장에서 '스타트업 생태계 활성화를 위한 스타트업 코리아!' 행사가 열렸습니다. 오래전부터 창업 생태계 구축에 기여해 온 아산나눔재단과 스타트업 얼라이언스, 구글,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등이 공동 주최했습니다.



이날 행사에 참여한 전문가분들도 규제 완화와 엑스트 창구 활성화의 필요성을 주요 의제로 다뤘습니다. 또 청년들의 창업의지 고양과 인재 확보도 중요하게 언급했습니다. 주최 기관들은 공동으로 보고서를 작성해 여러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배포했습니다.



다만 이날 행사에 참석자가 많지 않았다는 점은 아쉬웠습니다. 투자나 네트워킹 행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창업자나 예비창업자분들의 관심을 못 끈 것 같은데, 어찌 보면 이보다도 생태계 구축 문제가 중요할 수 있습니다.



이날 주최 기관들이 공동으로 제작한 보고서 첨부하니 관심 있는 분은 일독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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