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자일리입니다. 십여년 전 네팔에 트레킹을 갔을 때, 포터 아저씨께서 ‘지영’이라는 이름이 입에 잘 붙지 않는다며 ‘자일리’라고 불러주었는데, 그 이름을 실명 대신 쓰고 있습니다. 비록 제로웨이스트에 관한 책을 쓰긴 했지만, 저는 환경운동가도 아니고, 활동가도 아닌, 평범한 주부예요. 직장 다니며 두 아이를 키우고 있고요. 현재는 휴직 중인데, 7월이면 직장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제목은 <제로에 가까이>, 부제는 ‘차가운 도시 아줌마의 제로웨이스트 입문기’라고 되어 있네요. 제로웨이스트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저는 미니멀리즘 신봉자였습니다. 비록 남편과 분담을 하긴 하지만, 벌이와 살림을 겸하고 있어서 언제나 지쳐 있는 상태였고요. 그래서 가능한 치울 거리를 줄이자는 생각에 옷과 책 잡동사니 등을 간소하게 줄여 왔습니다. 제로웨이스트도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아요. 군더더기 없는 삶을 살고자 하는 의도에서 시작된 일이었죠. 낭비를 줄이고 합리적으로 살고자 한 것이었는데, 자연스레 환경 문제로 관심이 이어졌습니다.
요즘 제로웨이스트가 핫 이슈인데요.. 처음부터 제로웨이스트 관련해서 책을 쓰겠다고 계획을 하셨던 건지, 책 출간까지 이어지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 정말 핫 이슈죠... 그래서 책을 출간하는 데 있어서 부담이 컸습니다. 이미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와 있고, 제가 이 책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꾸준히 신간들이 나오는 상황이었습니다. 나까지 굳이 나무를 또 벨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갈등했었어요.
처음부터 책을 내겠다고 작정하고 쓴 건 아니었고요. 작년 7~8월 두 달 동안 브런치에 매일 연재를 했었어요. 제 자신과의 약속이었죠. 첫 한 달은 ‘하루 1만원으로 장보기’라는 주제로 글을 썼고, 그 다음 달에는 ‘플라스틱 관찰일기’로 글을 썼어요. 그렇게 60편의 글이 모였습니다.
그걸 책으로 엮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던 중 책실험실 b-lap의 ‘내책마련’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막상 기획서를 내야 할 상황이 오니, 새로 글을 쓸 엄두는 안 나고, 그때 적어둔 원고가 생각나더군요. 그날그날 적었던 글이기 때문에, 다시 보니 거친 부분들도 많더군요. 솎아내고, 재구성해보니 얼추 책 한 권 분량이 나왔고, 그것으로 독립출판물 제작 실습을 하게 된 것입니다.
‘내책마련’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제로에 가까이>는 출간되지 않을 수도 있었던 거군요.
- 네, 그냥 브런치 연재 글로만 남았겠네요... 제가 무척 소심한 편이라 내책마련 스탭 분들, 동료들의 격려 덕분으로 겨우 완성하게 된 것 같습니다. 처음엔 2부 정도만 찍자고 생각했었어요. 인디자인을 배워 직접 편집 디자인과 제작까지 해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독립출판이라는 과정이 단지 책을 만들어 내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홍보와 유통까지 이어지더라고요. 내가 만든 책으로 직접 독자와 만나보는 것, 이 또한 체험이고 공부다 싶어서 부수를 늘려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꼭 필요한 분들께 전달되고 또 이 책을 매개로 다양한 활동들이 연결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나까지 굳이 나무를 벨 필요가 있을까?”라고 고민하셨다는데, 책의 물성과 관련해서 하실 말씀이 있는지요?
-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물성을 가능한 통일시키고 싶었어요. 타일러 씨가 <두번째 지구는 없다>라는 책을 펴내면서 콩기름 인쇄와 fsc인증을 받은 종이를 고집했다고 알려졌는데, 저는 그런 소신이 되게 멋져 보였어요.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니은기역 출판사에서 나온 <살자편지>라는 책도 '친환경 출판'에 대해 많은 고민을 거쳐 출간된 책으로 알고 있고요.
일반적으로 책의 내지로는 모조지를 많이 쓰고 표지에는 무광 또는 유광 코팅을 하고 있지요. 보통은 이게 기본값인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시중에 유통되는 책을 보니 코팅을 했는데도, 또다시 비닐이나 유산지 같은 것으로 감싸서 진열을 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코팅을 하나 안 하나 오염에 노출될 가능성은 비슷하다는 판단이 들어 과감히 코팅을 생략했습니다. <제로에 가까이>는 적은 부수로 출판하고 유통할 예정이어서 상대적으로 훼손이나 반품 부담이 적기도 했고요.
용지는 재생용지를 사용했습니다. 내지는 그린라이트, 표지는 켄도라는 종이를 사용했고요. 그린라이트는 국산이고 재상종이가 20% 정도 함유 되었어요. 켄도는 재생펄프 40% + fsc®인증펄프 55% + 비목재(대마)펄프 5%를 함유하고 있고요. 제가 제작을 의뢰했던 인쇄소는 재생지는 보유하고 있었지만, 디지털 인쇄로는 콩기름 인쇄까지는 안 되는 곳이었어요. 여러 군데 문의를 해보았지만 '디지털 인쇄로는 콩기름 인쇄 불가'라는 답변이 공통적이었습니다. 오프셋 인쇄로는 가능한 모양이지만, 아무래도 제작 단가가 많이 올라가더라고요. 재생지와 콩기름 인쇄, 이것이 기본값이 될 수는 없는 걸까요? 또 출판할 기회가 된다면, 좀더 '제로에 가까이' 다가가 보고 싶네요.
이제 책의 물성에 대해 이야기했으니, 책 내용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면 좋겠어요.
- 1부는 장바구니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저는 4인 가족을 이루어 살고 있는데, 보통 일주일에 한 번씩 대형마트에 가서 장을 보곤 했어요. 아무래도 대형마트에 가다 보면 가공식품을 많이 사게 되죠. 바코드가 찍혀 있고, 유효기간이 정해져 있고, 또 알 수 없는 길고 어려운 이름의 화학첨가제들이 잔뜩 들어 있는 그런 상품들을요.. 그런데 그렇게 장을 한가득 봐와도 “먹을 게 없네”라는 말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 다용도실에서 고구마 한 봉지를 발견하게 됐어요. 곰팡이를 잔뜩 뒤집어 쓴 모습이었죠. 그것이 각성의 계기였어요. 식생활에 뭔가 문제가 있구나 싶었고, 당분간 “하루에 1만 원 이하로만 장을 보자” 이렇게 시작하게 된 거죠.
보통 제로 웨이스트 하면, 텀블러나 에코백 같은 것부터 떠올리게 되는데, 출발점이 좀 달랐던 거네요.
- 네, 제 경우에는 ‘음식물 낭비를 줄이자’는 지극히 실용적 목적에서 시작을 한 것 같아요.
1부는 장바구니와 관련된 이야기를 담으셨고, 2부는 ‘플라스틱’으로 주제가 넘어가는데요.
- 1부에서는 매일 1만 원으로 어떤 음식물들을 샀는지, 어떻게 냉장고 파먹기를 하고, 잊고 있던 식재료들을 꺼내어 먹었는지 그런 이야기들을 담았어요. 하루에 많아봤자 두세 가지 재료들만 구매하다 보니 재료 하나하나에 눈길이 갔어요. 우리밀빵, 카레, 국수 등의 원재료명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게 되었죠. 그렇게 하다 보니 음식을 둘러싸고 있는 껍데기, 즉 포장지에도 눈길이 가더군요.
그래서 이번에는 매일 발견하는 플라스틱에 대해 써보자, 이렇게 된 거예요. 플라스틱 우유병, 두부 포장, 김 포장, 죄다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죠. 스팸 뚜껑, 브리타 정수기 카트리지처럼 형태를 지닌 플라스틱뿐 아니라, 콩나물, 과일, 채소 같은 것들을 감싸고 있는 비닐봉지도 만만치 않더군요. 우리가 입고 있는 옷만 해도 폴리에스테르 100%인 경우가 많고요, 크록스도 플라스틱으로 만든 대표적인 신발이죠. 레고를 비롯한 완구류, 지우개 같은 학용품들도 대부분 플라스틱이에요.
우리 현대인들은 플라스틱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어버렸는데, 플라스틱은 결코 썩지 않지요. 그것들이 미세하게 부서져서 바다를 떠돌아다니거나 태워져서 다시 우리한테 돌아온다고 생각하니 공포심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집중적으로 플라스틱을 탐구하고 나니, 어느덧 사물을 볼 때 ‘썩는 것과 썩지 않는 것’으로 구분해서 바라보는 시선이 생긴 것 같아요.
제로웨이스트를 실천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있나요?
- 저는 제로웨이스트가 반짝하고 지나가는 유행처럼 되어버리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캠페인으로 접근하거나 '해아 한다'는 강박을 가지기보다는 각자 생활 속에서 소소한 발견과 시도를 쌓아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제로웨이스터라면 이렇게 행동해야지’라는 표준 행동지침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해요. 각자 자기 자리에서 더 공감하며 잘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주부 입장이라서 음식물 낭비나 식재료 포장지에 더 관심을 갖게 된 경우였고요. 플라스틱 어택이나 비치코밍처럼 적극적인 행동에 나선다거나, 천주머니나 비누 같은 물건을 직접 만들어 나눈다거나, 혹은 기업에 편지를 쓴다거나...이런 식으로 접근할 수도 있겠지요. 제로웨이스트가 특별한 행동이 되기보다는 당연한 기본값이 될 때까지 서로가 서로에게 동력이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혹시 다음 책도 구상하고 계신가요?
- 책 만드는 과정이 힘들긴 한데 중독성이 있는 것 같아요. 이제 막 책을 냈는데, 신기하게도 또 다음 책을 내고 싶은 마음이 생기네요. 제가 이번에 쓴 책은 환경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또 한편 주부가 쓴 ‘생활 서사’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최근에 젠더 이슈가 부상하면서 ‘여성들의 글쓰기’가 조금씩 주목받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림, 육아, 돌봄과 관련된 서사들은 제대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한평생 일기를 쓰고 계신데, 그걸 책으로 묶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최근에 제가 읽고 있는 것은 1970~80년대에 쓰신 일기들인데요. 제가 출생한 무렵부터 시작된 육아일기이자 당시 생활사와 시대상이 담겨 있는 글이기도 합니다. 당시 이십대 새댁이 겪었던 시집살이, 육아, 남편과의 갈등이 담겨 있는 여성 서사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눈물콧물이 담긴, 하지만 사랑스러운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