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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맛

24년 11월 8일 금요일

by 보리남순



밭작물들의 수확은 끝이 없다. 빨간 고추를 수확하고 난 후에도 남은 파란 고추로 할 수 있는 음식은 많다. 고추장아찌를 담고, 찹쌀가루를 입혀 쪄서 고추 부각을 만들 수도 있다. 멸치를 넣고 간장을 부어 만든 애고추 조림은 또 얼마나 맛있던가. 매콤하고 알싸한 고추로 어떤 반찬을 만들던 그날은 과식하는 날이다.


고추를 따 먹을 시간은 그리 오래 남아 있지 않다. 서리만 내리지 않는다면 고추, 가지, 호박, 오이 등 밭작물을 더 오래 수확할 테지만,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서는 서리가 가장 무섭다. 된서리 한 번이면 채소는 형체를 잃어 물에 데친 곤죽 모양새가 된다.


그래서 서리 내리기 전에는 밭작물을 갈무리하는 손이 바쁘다.

모든 수확을 마쳤어도 호박의 기세는 여전히 좋다. 하루가 다르게 밤 기온이 뚝 뚝 떨어졌어도 호박은 씩씩하다. 노란 꽃이 피고 마디마다 호박을 달았다. 호박은 꽃으로 암수를 구별한다. 호박이 달리지 않고 피는 꽃은 수꽃이고 호박을 달고 꽃을 피우는 것이 암꽃이다. 앙증맞은 호박을 단 꽃도 수정되지 않으면 멕아리 없이 떨어져 버린다. 호박이 풍년이 들자면 솔솔바람도 불어야 하고 벌과 나비도 있어야 한다.

무작정 호박줄기에 맺힌 것들을 땄다. 어떻게 하겠다는 궁리도 서지 않은 채였다. 그저 바구니에 따서 모았다. 애쓰고 세상으로 나온 것들에 대한 애처로운 마음이었다.

호박밭을 옮겨 다니며 따서 모은 호박꽃과 애호박, 연한 호박잎과 용설을 닮은 순까지 따고 보니 바구니에 가득 찼다.


호박꽃으로 요리를 만들어 먹는다는 것을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은 있으나 직접 눈으로 보거나 먹어본 적은 없다.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채소의 세계는 잎, 줄기, 뿌리다. 서양요리가 익숙해지면서 ' 먹을 수 있는 꽃'의 세계가 열렸지만 작물을 키우는 우리 농부들에게 꽃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재료다. 들깨의 깨보숭이도 여물지 않은 씨앗을 튀기는 것일 뿐 꽃은 아니다. 더러는 아카시아꽃을 따서 얇은 튀김옷을 입혀 튀김을 해 먹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봤으나, 여전히 식재료로 꽃은 낯설었다.

요즘 텔레비전에는 이러저러한 요리 경연 프로그램들 있다. 전문가들이 모여 경연을 펼치는 것도 있고 요식업에 있지 않은 사람들이 나와 경연을 펼치는 것도 있다. 경연에 나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요리를 참 잘한다. 주어진 식재료를 이용해 주제에 맞는 음식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을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사람들 중에서 가장 눈이 가는 사람은 재료가 가진 본연의 맛을 잘 살리는 사람이다. 요즘은 조금 덜 해지기는 했지만 한 때 유행했던 '단짠단짠 한 음식'들을 먹어보면 향신료 맛이 강해서 그 안에 무엇이 들어갔는지 재료를 짐작할 수 없어 당황스러운 경우가 있다. 향신료의 맛에 굴복해 식재료의 맛을 살리지 못한 요리는 가장 등급이 낮은 요리다.

뛰어난 요리사는 재료가 가진 본연을 맛을 살리는 사람들이다. 그러자면 요리사의 미각과 함께 상상력이 있어야 한다. 음식을 '잘 만드는 사람은 많이 먹어본 사람'이라는 말은, 곧 경험을 확대할 수 있는 상상력이 있는 사람이 요리를 잘 만든다는 말일 것이다.


상상력은 요리에서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음악, 노래, 미술, 체육 등 모든 예술 부분은 물론 삶에도 상상력은 필요하다. 가르친 대로, 타고난 제 성향대로 살 것만은 아니다. 도전과 모험은 탐험가만 가야 할 덕목은 아니다. 우리도 매일을 새날로 맞이한다. 어제의 경험을 재료로 오늘을 새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다. 비슷한 환경에서도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은 더 긍정적으로 잘 사는 사람들이다.


바구니 가득 따온 재료들을 위한 상상력을 발휘할 때다. 호박순과 호박잎은 이미 익숙한 재료였지만 꽃과 암꽃에 달린 작은 호박은 낯선 재료다.

재료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맛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꽃과 애호박은 찜기에 넣고 살짝 쪄냈다. 꽃 색이 노랗게 살아 있다. 살짝 찐 꽃과 아기호박을 초간장에 곁들여 먹었다. 은은하게 풍기는 호박꽃 향에 놀랍도록 코와 입이 즐거웠다. 음식맛에서 ' 아름다운'이라는 형용사를 발견하기는 난생처음이다.

호박꽃 요리를 해 먹고 난 후, 최근에 호박꽃으로 요리를 해 먹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호박꽃을 먹기 위해 호박을 키운다.'는 말이 있을 정도라고 했다. 충분히 공감이 되었다. 호박잎과 호박으로도 충분히 다양하고 많은 요리를 할 수 있지만 호박꽃은 잎과 열매에서는 찾을 수 없는 꽃이 주는 맛과 멋이 있다. 호박꽃은 멋진 요리재료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만든 튀김과 내가 쪄서 만든 요리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언젠가 이탈리아에 가게 된다면 그 요리를 꼭 먹어보고 싶다.


아무래도 호박꽃과 애호박 본연의 맛을 즐기기에는 내 방식이 더 낫지 싶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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