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산티아고 까미노는 너무 멀어.
공용 알베르게는 세탁비, 건조비가 각각 3유로로 사립 알베르게 보다 싸다. 비도 맞았고, 진흙탕을 신발 벗고 걸어오느라 양말이 엉망이다. 날이 좋다면 샤워하면서 발로 대충 밟아 탈탈 털어 널겠지만 이곳은 고산지대인 데다 비가 오라가락하는 중이다.
빨래거리를 들고 세탁기가 있는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건조기는 돌아가고 세탁기는 멈추어 있길래 세탁기를 열려고 했더니 배 나온 아저씨가 불쑥 튀어나와서 같이 움직이고 있으니 손대지 말란다.
알겠다고 하고는 옆에 있는 주방 테이블에 앉았다. 2인용 녹색 테이블 2개가 붙여 있는 테이블에는 중년 남자가 빵 한 조각과 엔초비처럼 생긴 생선 통조림과 바나나 한 개를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이게 네 저녁이니?
뭐라고?
내가 어려운 말을 했나, 아님 이 남자가 귀가 먹었나?
이게 네 저녁이냐고?
디너와 서퍼를 바뀌 가며 말을 하고 있는데, 배 나온 아저씨가 내 앞에 앉아 있다가
맞아, 맞아. 저 녀석의 저녁이야.라고 말을 한다. 그러더니 둘이 어쩌고 저쩌고 떠들었다. 그러더니 배 나온 남자가 나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사우스코리아라고 대답하며 그러는 너는 어디서 왔냐고 물었더니 프랑스에서 왔단다. 저녁을 먹으려던 남자에게 그럼 너는 어디서 온 거니, 물었더니 자기는 독일사람이란다.
통성명은 자연스럽게 끝냈다.
프랑스 남자가 나에게 물었다. 한국 사람들은 그룹으로 까미노를 많이 걷는데 너는 왜 혼자 걷냐?
내가 승질이 좀 더러워서 사람들이랑 잘 못 어울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초면에 내 조크를 알아들을 리 만무하고 또 영어를 잘하지 못해서 '나는 못된 년이야'처럼 엉뚱한 말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냥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혼자 다니면 자유롭잖아.
프랑스 남자가 내 말에 동의한다는 듯 한참을 떠들고 나자 이번에는 옆에 앉은 독일 남다가 나에게 물어볼 게 있단다.
(뭔데. 쉬운 걸로 물어봐라.)
한국사람들은 아주 일찍 일어나잖아. 왜 그런 거야?
너, 진짜 그 이유를 모르는 거야?
응. 몰라. 그래서 너한테 묻고 있잖니?
시간 때문이잖아.
스페인시간 새벽 두시면 한국은 9시라고.
나도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나지만 자는척하고 7시까지 있는 거야. 아주 힘들게 견디고 있는 거라고.
사실 까미노에서 한국인들의 부지런함은 소문이 자자하다고 한다. 말이 좋아 부지런함이지, 며칠 전 공용알베르게에서 지내보니 민폐 수준이었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기침을 콜록콜록 해대며 짐을 챙기는지 왔다 갔다 하는 소리, 부스럭 대는 소리에 잠이 들었다 깼다 했다. 유럽인들 중에는 알베르게에 한국인 숙박객이 있는지 확인을 하는 사람도 있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다.
나도 바르셀로나에서 새벽 2시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새벽 3시에 리셉션 어둑한 곳에 앉아 아침을 먹었더랬다. 내가 봐도 도깨비가 하는 짓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 너희는 시간차가 없냐고 물었더니 없단다.
너희들은 행운이다, 좋겠다, 라며 부러움을 드러냈더니 둘 다 웃는다.
얼마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나눈 적 있다.
스페인까지 오는 비행시간이 얼마나 걸리냐 하는 것이었다. 얀이라고 하는 여자의 국가는 잊어버렸는데 그녀는 2시간 비행기 타고 스페인에 왔단다. 다른 한 명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왔는데 비행시간은 5시간이라고 했다.
나는 몇 시간이나 걸렸을까? 너희들이 한번 맞춰봐라, 했더니 모르겠단다.
24시간 걸렸다.
인천공항에서 4월 22일 2시 50분경 비행기를 타고 중국 심천 공항에 도착한 것은 5시경쯤이었다. 8시간 공항 웨이팅 후 다음날 오전 1시 30분(연착됨) 경 비행기를 타고 바르셀로나 공항에 도착한 것이 오전 9시 45분이었다.
멀다, 멀다 너무 멀었다. 게다가 7시간 시차를 계산 못해서 내 핸드폰 시계가 가리키는 오후 3시 45분 시간을 보고서 얼마나 허둥댔던지. 공항에서 택시를 집어타고 예약한 호스텔에 오전 11시에 도착해서 2시까지 기다렸다 입실을 했었다.
내가 그녀들에게 말했다.
우리나라 남과 북이 빨리 평화협정을 맺어야 한다고. 그래야 우리가 유럽을 기차를 타고 유럽을 싸고 빠르게 올 수 있다고.
그녀들도 24시간이 걸렸다는 말에 질렸던지, 그래, 그래, 맞아, 맞아하며 동의를 했다.
그러고 보니 비행기 가격을 물어보질 못했다.
백만 원이 넘는 비행기 가격까지 알았더라면 혹시 그녀들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지금 까미노가 문제가 아니다. 빨리 휴전선으로 가서 남북한이 평화협정을 빨리 맺으라며 시위라도 해야겠다. 지금 까미노를 걷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몰려간다면 가능하지도 았을까, 하고 제안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저씨들에게도 얘기해 줄걸 그랬다.
너희들 한국인들이 까미노에 얼마를 들여서, 또 몇 시간 비행기 타고 오는 줄 아니?
수백만 원 들여서 24시간 비행기 타고 온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두 아저씨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아저씨들에게 얻은 동전을 넣고 시작한 빨래가 얼추 다 되어간다.
프랑스 아저씨와 독일 아저씨는 잠시 종교 이야기를 나누다가 독일 아저씨가 먼저 자겠다며 들어갔고 프랑스 아저씨는 건조된 옷을 꺼내서 방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다시 나와서 내 앞에 앉아서 한참 동안 노래를 불렀다. 에디트 피아프 노래는 허밍으로 같이 불렀다. 유쾌하고 수다스럽고, 노래도 잘하는 배불뚝이 프랑스 아저씨 때문에 지루한 줄 모르고 빨래 시간을 보냈다.
8시 23분인데 밖이 환하다. 뿌였게 시야를 가리던 안개도 말끔히 걷혔다. 산골 마을이라서 밤공기가 제법 쌀쌀하다. 누가 유럽이 덥다고 했는지. 유럽의 봄, 아니 까미노의 봄은 절대 안심해서는 안된다. 가벼운 패딩이 꼭 필요하다.
오늘 밤에는 세탁한 겉옷을 침낭 속에 넣어 덮고 자야겠다.
14유로의 저녁.
양배추. 감자가 들어간 수프와 감자 프라이드와 돼지고기구이, 그리고 와인. 후식으로는 커피를 달라고 해서 마셨다.
어둠이 스미지 못한 밤 9시.
공용 알베르게. 1박 10유로.
저렴하고 깨끗하다. 어제 내 침대 2층에서 자던 커플을 여기서 또 만났다.
프랑스 아저씨가 2유로를.
독일 아저씨가 50센트 2개를 1유로로 바꿔주어서 세탁과 건조를 할 수 있었다.
프랑스 아저씨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게 까미노지!"
동키서비스에서 돌아온 내 배낭에 아주 가벼운 스틱 두 개와 어깨끈에 분홍 손잡이가 두 개 걸려 있다. 무슨 착오라고 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다. 직접 끈을 묶었고 그리고 스틱을 꽂았다.
너... 누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