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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막무침 Nov 11. 2021

메모리얼 스톤

#13. 메모리얼스톤


저는 그녀의 아름다운 손이 좋았어요. 왜 그런 손이 있잖아요? 누군가의 피가 왕창 묻어있더라도 당연히 저건 버건디 색의 물감이겠구나 하는 그런 손이요. 심지어 나이프가 들려있더라도 말이죠. 그 손이 저를 만질 때면 지금까지의 모든 죄가 사해지는 것처럼 성스럽게 느껴졌어요. 그녀의 손을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은 제 인생에서 가장 큰 기쁨이었죠.


하지만 저는 그녀의 손에 반지 하나 해주지 못했어요. 보시다시피 저는 많이 가난하거든요. 하루 일해서 하루 겨우 먹으며 사는 저한테 먹을 수 없는 반지는 너무 큰 사치품이었어요. 그 돈으로 반지 모양 사탕을 사는 게 더 이득이라는 멍청한 생각을 하며 살아왔죠. 지금은 아니지만 그녀가 떠나기 전까지는 그랬어요. 그게 너무 후회돼요.


가난에 지친다며 저를 떠난 그녀는 또다시 가난한 남자를 만난 것 같더라고요. 본인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평강공주 콤플렉스가 있는 게 분명해요. 아무튼 그놈을 만나면서 그녀가 다시 웃는 것을 보니 기분은 좋았어요. 그놈의 비좁은 반지하 원룸에서 들려오는 교성이 그녀의 행복 정도를 말해주더라고요. 행복해 보였어요. 나중에 아무도 없을 때 들어가서 그놈 노트북 검색 기록을 봤는데 뭐가 있었는지 아세요? 프러포즈를 하려는 것 같은 기록들이 있었어요. 참 염치도 없지. 사연을 받아서 프러포즈 이벤트를 해주는 그런 공연들 있잖아요? 그런 곳에다가 구구절절하게 사연을 돌리고 있더라고요. 그때 이 계획이 딱 생각났어요.


그녀의 행복을 위해 결혼반지를 선물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말이죠. 그 자식은 분명 결혼반지 하나 제대로 살 능력이 없을 거예요. 우선 가짜 이벤트 문자를 보냈어요. 사연을 보내주면 추첨을 통해서 결혼반지를 준다고요. 문자를 보낸지 한 삼십분쯤 뒤에 메일로 사연이 왔어요. 제가 그 남자 집에서 봤던 여기저기 보낸 사연 그대로였어요. 문장이라도 좀 바꿔서 보내지...성의 없게... 아무튼 사연을 받고 좀 이따가 당첨 메시지도 보내주고, 그 뒤로 반지 제작해 주는 업체에 연락을 했어요.


혹시 메모리얼 스톤이라고 아세요? 요즘 여기저기서 자주 보이는 장례방법인데 유골을 압축해서 보석으로 만든 뒤에 반지나 목걸이로 만들어주는 거래요. 원래 사람 유골은 가족관계 증명이 되는 사람이 직접 가져가서 제작 문의를 해야 하는데 반려동물은 택배로도 보낼 수 있대요. 그래서 반려동물 유골로 디자인이랑 다 골라서 예약을 했죠. 뭐 괜찮아요. 위로 안 해주셔도 돼요. 개새끼 소새끼라는 소리 많이 들어봐서 뭐 이젠 익숙해요.


아무튼 이제 제가 선생님을 찾아온 이유를 잘아시겠죠? 저를 저 화덕에 넣어주시고 유골만 모아서 퀵으로 보내주시면 돼요. 간단하죠? 주소는 여기 있고 나머지는 그 업체에서 반지 완성되면 그 자식 주소로 보내주기로 했어요. 그쪽에서 유골 받으면 선생님이 보내셨던 퀵으로 다시 열쇠랑 주소가 적힌 봉투가 이쪽에 올 거예요. 열쇠 챙기시고 그 주소로 가셔서 따님 구하시면 돼요. 아 그리고 예약 문자로 내일 이쪽에 경찰도 불렀거든요. 괜히 꼬투리 잡히기 싫으시면 깔끔하게 부탁드려요. 죄송해요. 선생님한테 이런 부담 드리기 싫은데 그래도 확실히 하고 싶어서요. 이해하시죠? 사랑의 힘이란 참 대단한 것 같아요. 따님도 손가락이 참 예쁘던데. 선생님 사랑 많이 받고 어서 예쁘게 자라서 저처럼 로맨틱한 남자 만나야죠.


이제 저 저기에 들어가면 되나요? 아 소리 지르고 그럴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지금 제 마음속에 타오르는 사랑이 저 불길보다 더 뜨겁거든요. 선생님도 이런 사랑을 느껴보셨을지 모르겠네요. 에이 그렇게 찝찝한 표정 하실 필요 없어요. 제가 말씀드린 대로만 해주시면 아무 문제 없을 거예요. 선생님도 따님도.


그녀랑 평생 함께 할 생각하니까 벌써 두근두근하네요. 아마 그 예쁜 손이랑 엄청 잘 어울릴 거예요. 그렇죠? 이제 이거 화덕문 좀 닫고 온도 좀 올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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