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과 제1장 부엉이 바위
나는 한 사람을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그의 삶은 조용하면서도 단단했고, 때로는 무모했지만 끝내 진심이었다.
그가 떠난 뒤, 많은 말이 오갔지만 오히려 말이 많을수록 그를 온전히 담기는 더 어려웠다. 이 이야기는 어떤 기록도, 평가도 아니다.
그저 한 사람이 남긴 흔적을 따라 걸어본 시간이며,
그의 말과 침묵이 머물렀던 자리에서 다시 문장을 써보려는 시도다. 완전한 복원도 아니고, 영웅의 초상도 아니다.
그저 한 아름다운 인간의 생을 다시 바라보는 일,
그 마음 하나로 시작된 소설이다. 그는 떠났지만,
그가 남긴 문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 오래 머물렀다.
2025년 봄
토사님
어둠은 아직 물러나지 않았다. 새벽의 공기는 바람이 없었다. 나뭇가지 하나 흔들리지 않았고, 짐승도 새도 숨을 죽인 듯했다. 봉하마을의 집들은 고요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검은 지붕 아래로 흙담장이 낮게 드리워졌고, 작은 창들은 빛을 품지 않았다.
그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려 애쓰며 신발끈을 조여 맸다. 운동화는 낡아 있었다. 밑창이 닳아 돌길에서는 발이 미끄러질 수 있다는 걸 알았지만, 굳이 새것으로 갈아 신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것은 산책이 아니라, 작별이었기 때문이다.
한 손은 옷깃 안쪽을 더듬었다. 하얀 종이 한 장이, 약간 구겨진 채 거기 있었다. 그 안에 썼던 문장들을 그는 다 외우고 있었다. 문장이라는 것은 사람의 몸처럼 늙고, 떠나고, 때론 살아남는 것이었다.
집 문을 닫을 때 손끝이 떨렸다. 그 것은 추위 때문도, 마음 때문도 아니었다. 그냥 오래된 습관처럼, 무언가를 조심이 다루는 동작이었다. 그는 마당을 지나, 장독대를 옆에 두고 뒤편 언덕으로 걸음을 옮겼다. 장독대 위에 고인 빗물이 살짝 얼어 있었다. 아주 오래전, 아내가 정성껏 담근 장이 그 속에 잠들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맛볼 일은 없을 것이다.
손전등은 들지 않았다. 그가 이 길을 걸은 건 수백 번도 넘었기에. 매번 농약을 뿌리러, 마을 어르신 장례를 치르러, 가끔은 혼자 걷고 싶어서.
하지만 오늘은 그 어느 날보다 조용했다. 흙 길을 밟을 때마다 땅속의 기척이 발바닥을 통해 올라왔다. 흙 속에 숨어 있던 밤벌레, 바람 없이 피어난 이슬, 돌 틈에 뿌리 내린 잡초들. 그것들이 그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당신, 또 오셨군요.’
그 말은 소리가 아니라, 공기 속에 스며 있는 감각이었다.
경사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그는 걸음을 멈췄다. 손을 뻗어 바위 하나에 닿았다. 이끼가 차가웠다. 몇 년 전, 기자 한 명이 따라오다가 이 바위에서 미끄러졌었다. 그때 자신은 농담을 했었다. “대통령이 부축하니까 기분 이상하지?”
그때 그 젊은이는 멋쩍게 웃었다.
지금 그는, 웃을 수 없었다.
나무들이 더 조밀하게 둘러싸이기 시작했다. 가지 끝에 매달린 물방울들이 희미한 빛을 받아 불그스름하게 반짝였다. 마치 누군가 오래도록 울다 말고 남긴 눈물 같았다.
그의 숨이 깊어 졌다. 들숨보다 날숨이 더 길었다. 가슴 아래쪽이 묵직하게 울렸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
그 사실이 이상했다. 그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이 때로는 무례하게 느껴졌다.
누군가를 향해 너무 많은 죄송함을 가진 채 살아 있는 것이, 이토록 버거운 일일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이제야 완전히 이해한 것 같았다.
눈앞에 나무 한그루가 나타났다. 여느 나무보다 더 작고, 더 기울어 있었으며, 줄기 한쪽이 마치 무릎 꿇듯 꺾여 있었다.
그는 그것을 지나치지 못하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생명이라는 것이 때론 얼마나 조용히 꺾이고, 다시 무심하게 자라는지를 그 나무는 말없이 알려주고 있었다.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다.’
한때 했던 말이었다. 누군가 그 문장을 적어 손팻말로 만들어 그의 연설 현장마다 들고 왔었다. 그들은 그를 강물이라 불렀고, 그는 그 이름을 감당하려 애썼다.
그러나 지금, 그는 강물이 아니었다. 그저 물가에 오래 앉아 있던, 조용히 마르고 있는 돌멩이에 가까웠다.
그는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 봉하마을. 자신이 태어난 땅이자, 자신이 돌아온 자리. 그 아래엔 고요한 지붕들이 있었다.
그 지붕들 위로 새벽이 느릿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빛은 없었지만, 어둠의 끝자락이 아주 천천히 풀어지고 있었다.마치 누군가가 커튼을 걷는 대신, 천을 조금씩 찢어내고 있는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그러나, 어떤 한 부분은 기묘하게 가벼웠다. 어깨나 다리가 아니라, 오래도록 말하지 못했던 문장이 떨어져 나간 자리가.
바위는 그 앞에 있었다. 말이 없었다. 숨도 쉬지 않았다.그러나 분명히, 거기에서 그를 기다리는 기척이 있었다.
그는 마지막 몇 걸음을 옮겼다. 숨소리가 들렸고, 그것이 자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위 앞에 선 그는 마치 누군가가 이 길을 다시 내려갈 수 있을 것인지, 조용히 물어오는 것 같다고 느꼈다. 대답은 없었다.
그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바위 앞에 멈췄다. 말없이, 어떤 감탄도 없이, 그저 멈추었다.
부엉이 바위는 변하지 않았다. 수 십 년을 그 자리에 있었고, 앞으로 수백 년을 더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 바위를 평범한 바위라 말했지만, 그에겐 그 바위가 언제나 무언가를 품고 있었다. 무언가를 안고 있는 것처럼 움푹 파인 형상, 마치 오래전부터 누군가를 기다리는 자세처럼.
그는 조심이 손을 뻗었다. 손바닥이 차가운 표면을 더듬었다. 돌은 말을 하지 않았다. 숨결도 없고, 심장도 없지만, 어떤 생명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침묵을 지켜온 존재였다. 그리고 그 침묵이야 말로, 지금 그에게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하고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 천천히 앉았다. 무릎이 바위에 부딪혔고, 몸이 휘청였지만, 소리 내지 않았다. 허리를 낮추고 등을 기대자, 등골을 따라 서늘한 감각이 흘렀다. 바람 한 줄기가 나뭇잎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처음으로 새벽 공기가 옷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주변은 완벽할 정도로 조용했다. 나무도, 흙도, 저 멀리 개울물도 모든 울림을 거둔 듯했다. 오직 한 가지, 자신의 숨소리만이 들렸다. 마치 물속 깊이 잠긴 듯한 고요였다. 시간조차 숨을 멈춘 것 같았다.
그 순간 그는, 세상이라는 말의 무게를 생각했다. '세상'이라는 단어 안에는 너무 많은 얼굴과, 너무 많은 이름과, 너무 많은 비난과 사랑이 들어 있었다. 그 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졌고, 다시 스스로 꺼졌다.
바위 옆 풀잎 하나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움직임은 마치 작은 손짓 같았다.
‘괜찮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쪽은 텅 빈 어둠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도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리움. 슬픔. 이름 붙이기 어려운 무거운 감정 하나.
그것은 어떤 얼굴도 가지지 않은 채, 천천히 그의 가슴팍을 눌렀다.
아주 오래전, 아무도 없는 강가에 서 있었던 적이 있었다. 서늘한 물소리, 풀숲의 벌레 소리, 붉게 물든 노을.
그는 그때도 침묵 속에 있었다. 지금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다만 살아 있는 존재로서 그 순간을 견뎌내야만 했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온 것 같았다. 세상의 한가운데에서 물러나, 아무 목소리도 닿지 않는 바위 앞에서.
‘여기서 멈춰도 되는가.’
그는 눈을 떴다. 하늘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아주 느린, 그러나 확실한 새벽의 신호였다.
그 빛은, 마치 묻지 않았다. 다만, 아무 말 없이 모든 것을 품어주는 것 같았다.
그의 눈앞에서 나뭇가지 하나가 흔들렸다. 그 흔들림은 마치 기억이 일렁이는 것처럼 천천히, 조용히 움직였다.
그는 눈을 감았다. 바위에 등을 기댄 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생각 속으로 가라앉았다.
봄날이었다. 봉하마을 마당 가득 연둣빛이 번지고, 들기름 냄새와 흙 냄새가 섞여 있었다. 정원 한쪽, 감나무 아래엔 작은 의자가 놓여 있었고, 손자는 그 위에 두 다리를 덜렁이며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 이게 뭐야?”
아이의 손에는 단풍잎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봄인데 단풍잎이 있네?”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건 가을에 떨어진 거야. 그런데 겨울을 이겨내고 남아 있었구나. 아주 끈질긴 잎이야.”
아이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밝게 웃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 조심스레 그 잎을 넣었다. 마치 보물처럼.
그의 가슴 한 켠이 그 순간 이상하게 아려왔다.
‘저 아이는, 내가 없는 세상에서 얼마나 오래 살아갈까.’
그는 그 문장을 목울대까지 삼킨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부엌에서 아내가 된장국을 끓이며 말했다.
“당신, 요즘 자주 멍하니 앉아 있어요.”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내는 국을 젛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모를 줄 알아요? 당신 얼굴을 몇 년 봤다고 생각해요.”
“그냥 피곤해서 그래.”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아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국을 불에서 내리고, 조심스럽게 국자 하나를 작은 그릇에 담았다. 그리고 식탁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미안해요.”
그 말은 느닷없이 튀어나왔다.
아내가 멈칫했다.
“왜요?”
“그냥… 미안해서.”
“정확히 뭘요?”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너무 많은 일들이 떠올랐고, 너무 많은 말이 입 속에 엉켜 있었다.
“괜찮아요.”
아내는 그렇게 말하고는, 국을 한 숟가락 떠 입에 넣었다. 그리고 조용히 씹었다. 아무런 표정 없이, 아무 말도 없이. 하지만 그 조용한 씹는 소리에서 그는 모든 이해와 분노와 수용을 동시에 들었다.
아이가 웃는 모습, 아내가 마늘을 까는 손, 자신이 나무 그늘에 앉아 신문을 뒤적이던 오후.
그 모든 것들이 너무도 선명해서, 오히려 불안해질 만큼이었다.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너무 짧다. 너무 분명하고, 너무 확실한 것일수록 먼저 꺼져버린다.
그는 가끔 기도 같은 걸 했다. 신을 믿는 건 아니었지만, 누군가 들을 수 있다면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이 아이가, 내가 못한 삶을 두려움 없이 살게 해 주세요.’
‘이 사람이, 나 없이도 평안하길 바랍니다.’
그는 바위에 등을 기댄 채, 눈꺼풀 아래에서 그날의 온도와 색을 떠올렸다.
햇살은 살갗에 따뜻했고, 흙냄새는 기억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 날의 모든 것이, 지금보다 훨씬 가볍고, 훨씬 영원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안다.
그날도 사라졌고, 웃음도 지나갔고, 지금은 단지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이렇게 조용히 다시 그를 끌어안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바위는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마치 방금까지 그 곁에 가족이 함께 있었던 것처럼.
바람이 지나갔다. 아주 얇고, 낮고, 길게 깔린 숨결처럼.그는 그 바람을 따라 기억도 함께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1981년.부산.
바람이 없던 날이었다. 낯 선 얼굴들이 눈을 피했고, 가족들이 울음을 삼키고 있었고, 책상 위에는 고문기록이 쌓여 있었다.
스물 몇 살의 대학생들이, 조용히 자백서에 서명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 있었다.
변호사로서, 아니, 그보다 먼저 인간으로서.
그들은 간첩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착하고 순한 아이들이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나는 당신들을 믿어요.”
그 말은 의도보다 더 작게 흘러나왔지만, 그들은 들었다.
그 순간부터 그는 달라졌다. 사건 하나가 사람을 바꾼 게 아니라, 사람 하나가 스스로를 다르게 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해 여름, 그는 첫 연단 위에 섰다.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는다는 것은, 손바닥이 식을 틈 없이 뜨거워지는 일이었다.
“이 땅에서 사람 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건, 아주 단순한 것입니다. 원칙. 상식. 그리고…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그의 말은 그리 유창하지 않았다. 강한 억양과 다소 무뚝뚝한 표현, 가끔은 말이 꼬였고, 표정이 어색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그를 외면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눈빛들은, 그가 더듬는 말 속에서 진심을 꺼내 듣고 있었다.
누군가가 말했었다.
“저 사람은, 당선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래도 계속 나온다. 참 바보 같은 사람이야.”
그렇게 ‘바보 노무현’이라는 말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처음엔 조롱이었지만, 나중엔 애정이 되었다.
그는 그 말을 곱씹었다. ‘바보’라는 단어는 날카롭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했다.
유세가 끝난 어느 날 밤, 혼자 사무실에 남아 컵라면을 먹었다. 창 밖으로 봄비가 내리고 있었고, 손에는 벗겨진 명함이 몇 장 남아 있었다.
그는 종이에 그날의 발언 중 기억에 남는 문장을 적었다.
“정치는 나쁜 사람이 하면 더 나빠집니다. 좋은 사람이 해야 조금이라도 나아집니다.”
그는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마치 자신에게 들려주는 것처럼.
아무도 박수치지 않았고, 기사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문장을 적는 손끝에, 뜨거운 것이 고였다.
그날 이후로, 그는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은 돌아섰지만, 그는 서 있었다.
사람들은 비웃었지만, 그는 다시 유세차에 올랐다.
사람이 사람을 위해 말한다는 것. 그는 그 일을 믿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믿음 하나만으로 너무 먼 길을 온 것 같았다.
바람이 다시 불었다. 바위 위 풀잎이 한 번 흔들렸다.
그는 눈을 감고, 그 시절의 마이크 잡던 손을 떠올렸다. 손은 떨렸고, 손바닥에는 땀이 흥건했다.
그건 두려움이 아니라, 다짐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날의 창문은 굵은 빗방울로 덮여 있었고, 바깥은 잘 보이지 않았다. 청와대 집무실.
책상 위에 놓인 신문은 이미 읽혔고, 커피는 식어 있었다. 그는 그 커피에 손대지 않았다.
“대통령님, 회의 시작 10분 전입니다.”
비서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 숨어 있는 긴장이 느껴졌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고요한 방 안에서, 혼자 숨을 고르고 있었다.
며칠 전, 국회에서 탄핵이 통과되었다.
뉴스에서는 연일 ‘권력의 몰락’, ‘대통령의 실패’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창밖에선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침묵했고, 간혹 노래를 불렀다.
그는 그 침묵을 알았다.
소리 없는 분노, 조용한 의지.
누군가는 그 침묵을 무서워했고, 누군가는 그 침묵에 감동했다.
그는, 그 침묵에 기대고 있었다.
청와대 복도를 걸을 때마다, 발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렸다. 어깨에 얹힌 것들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누구도 자신을 정답이라 부르지 않았고, 누구도 자신이 틀렸다고 단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그는 질문을 마주해야 했다.
“나는 지금, 옳은가.”
하루는 문을 닫고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었다. 긴 회의 끝에 모두가 물러난 자리. 벽에 걸린 시계 초침만이 방을 울리고 있었다.
그는 서류를 덮었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입술을 열었다. 아무도 없었지만, 그는 중얼거렸다.
“내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걸, 왜 이제서야 아는 걸까.”
그 말은 소리도 없이 가라앉았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는 스스로에게 고백한 셈이었다.
촛불을 든 시민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광장 끝에서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손팻말을 들고 있었다.
“대통령님, 울지 마세요.”
그 문장을 보았을 때, 그는 혼자서도 웃을 수 있었다. 웃고, 동시에 속이 아릿해졌다.
누군가의 기대는 때로, 누군가의 무게가 된다.
외로움은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 것이 아니었다. 대통령이 되던 날부터 이미, 그는 그 길 위에 혼자 서 있었다.
모두가 뒤에서 응원하거나 비판하거나 손을 뻗었지만, 그 누구도 대신 걸을 수는 없는 길.
지금 그가 이 바위 앞에 앉아 있는 것도, 어쩌면 그날과 다르지 않다.
아무도 답을 주지 않던 그날처럼, 아무도 탓하지 않던 그날처럼, 그는 여전히 혼자 있다.
그러나 그 혼자라는 상태가, 그에게는 끝이 아니라 한 존재가 자신과 끝까지 동행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청와대 창밖의 비를 떠올렸다.
빗방울은 고르게 떨어졌고, 그 빗소리는 자신이 내린 결정의 무게를 대변해주는 유일한 소리였다.
그리고 지금, 이 바위 위를 스치는 바람이 그 빗소리와 꼭 닮아 있었다.
바람이 멈췄다. 풀잎은 흔들리지 않았고, 바위의 그림자는 숨을 죽였다. 그는 무릎 위에 두 손을 올려 두었다.손가락 마디마다 오래된 흠집이 있었다. 그 흠집들은 말 대신 남은 문장처럼 보였다.
그는 종이를 꺼내지 않았다. 유서는 이미 적혀 있었다.아니, 유서라는 것은 쓰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에 마음속에 새겨진 말들이 어느 날 가만히 표면 위로 떠오르는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그 문장이 떠올랐을 때, 그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빛은 희미했고,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도 불분명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세운 뜻이 오히려 짐이 되었다.’
그 문장 뒤로, 수많은 얼굴이 지나갔다. 자신을 믿었던 사람들, 등을 돌린 사람들, 변함없이 곁에 남아 있던 사람들.
그는 그 모든 얼굴이 마음속에서 하나로 겹쳐지는 것을 느꼈다.
기쁨도 있었고, 원망도 있었고, 슬픔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감정은… 고마움이었다.
‘오래 싸웠다. 이제 그만 놓아도 되지 않겠나.’
유서에는 그런 문장이 없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오래도록 맴돌던 말이었다.
그는 한 번 더 숨을 들이마셨다. 공기가 폐 안으로 들어오고, 잠시 그곳에 머물다 다시 나갔다.
삶도, 그렇게 나가는 것이리라.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다만,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긴 시간을 걸어온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는 마음속에서 다시 그 문장을 떠올렸다.
‘운명이다.’
짧고, 무겁고, 이상하게 편안한 문장이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던 종착역처럼.
유서를 쓰는 데는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문장을 품는 데는 평생이 걸렸다.
‘아무도 원망하지 말라.’
그는 그 문장이, 자신에게 남기는 마지막 당부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조용한 문장이 떠올랐다.
‘삶과 죽음은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그는 그 말을 마음 안에서 조용히 꺼내 펼쳐 놓았다. 말이라는 것이, 때로는 아무도 들을 수 없을 때 가장 진실해진다는 걸 그는 이제야 완전히 깨달았다.
바람이 다시 불었다.
나뭇잎 하나가 바위 앞에 떨어졌다.
그 작은 낙하의 움직임 속에, 모든 말이 담긴 듯했다.
그는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마지막 문장을 한 번 더 떠올렸다.
‘고맙다.’
그 말은, 정말로 오래도록 머릿속에 머물러 있던 말이었다.
누구에게, 모든 사람에게.
그가 살아온 이 모든 날과, 함께 울고 웃었던 얼굴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떠올리지 않았다. 그 건 필요하지 않았다.
문장은 끝났고, 그 아래에 조용히 여백이 펼쳐졌다.
그는 그 여백 속으로, 아주 천천히 들어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고요했다.
새소리도, 바람도, 나뭇가지의 떨림도 잠든 순간.
그는 바위 위에 앉아, 등 뒤로 뻗은 그림자의 온도를 느꼈다. 그림자는 조금씩 길어지고 있었지만, 그 길이 끝나는 지점은 보이지 않았다.
몸이 무거웠다. 팔과 다리, 등뼈와 무릎 관절 하나하나가 모두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 무게는 단순히 살과 뼈의 무게가 아니었다.
살아온 날들의 무게. 듣고도 못 들은 척한 말들, 외면하지 않아도 되었던 얼굴들.
‘이제 괜찮다.’
그 문장은 소리 내지 않았지만, 안쪽에서 울렸다. 오래된 종처럼, 조용히 댕— 하고 울리는 울림.
그는 바위에 손을 얹었다. 돌의 감촉은 차가웠고, 의외로 부드러웠다. 수많은 비와 바람에 닳은 표면은 마치 누군가의 오래된 손바닥 같았다.
'이곳이 좋다.'
이곳은 누구의 목소리도 닿지 않는 자리였다. 단지 숨과 숨 사이의 공간만이 존재하는 장소.
그는 아주 천천히 일어섰다.
다리에서 무언가 뚝— 하고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피로, 혹은 놓아 버림.
어깨를 한 번 움직였다. 외투가 뒤로 젖히면서 마른 나뭇가지에 스쳤다.
아주 작은 소리가 바람 속에 녹아 사라졌다.
그의 시선이 산 아래를 향했다. 봉하마을이 멀리 있었다.낮은 지붕들이 어둠 속에 잠겨 있었고, 논밭은 아직 서리가 내려앉기 전의 색이었다.
그는 그 마을을, 사람들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했다.
삶이라는 것은 결국,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나뭇잎 하나 떨어지는 것과 비슷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냥…이렇게 조용히 사라지면 된다.’
어느새 동쪽 하늘이 아주 조금, 아주 미세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검은색이 회색으로 바뀌는, 아주 느린 경계.
그는 그 빛을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그 속엔 나뭇가지 하나, 새 한 마리, 그리고 아직 깨어나지 않은 마을의 시간들이 고요히 떠 있었다.
한 걸음.
바위의 끝으로 다가섰다.
발끝 아래, 공간이 있었다. 아무 것도 없고, 아무것도 묻지 않는 어둠이.
그는 그 어둠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엔 무서움도 없고, 안도도 없었다. 단지 ‘끝’이라는 이름의, 아주 고요한 형체가 있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공기가 폐 안으로 들어왔다가 천천히 빠져나갔다.
그 숨이 마지막 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조차도 평온하게 받아들여졌다.
손끝이 떨렸다. 그러나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누군가를 향한 마지막 미련처럼 느껴졌다.
그는 그 미련에게도, 조용히 작별을 고했다.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리고 마침내,
발을 들었다.
새벽이었다.
권양숙은 잠에서 완전히 깨지 않은 채, 조용히 눈을 떴다.
방 안은 어두웠지만, 어둠은 얇아지고 있었다. 천천히, 아주 느리게 새벽빛이 벽지를 스치고 있었다.
옆자리가 비어 있는 걸 알아차리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가끔 새벽에 혼자 나가 산책하곤 했다. 아무 말없이 나가, 돌아와선 감나무 아래서 신문을 읽거나, 부엌 창가에 기대 커피를 마시곤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오늘은 느낌이 달랐다.
그가 나간 자리엔 체온이 없었다.
이불은 차갑게 식어 있었고, 창문 사이로 들어온 바람이 그 위를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일어나 작은 램프를 켰다. 조명이 방 안을 희미하게 밝히자, 벽에 걸린 그의 옛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웃고 있었지만, 어딘가 외로워 보이는 표정.
그녀는 그 표정을 기억했다. 세상 모두를 등지고 싸우던 날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 앓던 밤들.
그가 어딘가로 떠날 때 짓던 얼굴.
아랫마당 쪽에서 닭이 울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조금 빠른 울음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신호’처럼 느꼈다.
부엌에 나가 보온병을 꺼내며, 문득 손끝이 떨렸다.
그 순간, 아주 작고 약한 생각이 마음에 들어왔다.
‘오늘은…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그녀는 조용히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갔다.
하늘은 희미하게 밝아지고 있었고, 산 쪽에서 내려오는 바람이 한결 선선했다.
감나무 가지가 흔들렸고, 고요한 정원에는 말없는 시간이 퍼져 있었다.
그녀는 부엉이 바위 쪽을 바라보았다.
직접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산 아래에서 살아온 세월 동안, 그 바위가 어디쯤 있는지는 몸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금,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도.
그녀는 아주 천천히, 손을 모았다. 무릎 위에 올려 두었던 손처럼, 조심스럽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가 이번에는, 정말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눈물이 흘렀다. 흘렀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조용한 눈물이었다.
닭이 다시 울었고, 마을은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하루는 그 울음 이전의 어둠에 머물러 있었다.
그 어둠은 차갑지 않았고, 무섭지도 않았다.
다만 그 속에는,
아주 오래도록 자신 곁에 머물러 있었던 한 사람의 체온이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