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문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서문/부엉이 바위

by 토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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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그 문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한 사람을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그의 삶은 조용하면서도 단단했고, 때로는 무모했지만 끝내 진심이었다. 그가 떠난 뒤, 많은 말이 오갔지만 오히려 말이 많을수록 그를 온전히 담기는 더 어려웠다. 이 이야기는 어떤 기록도, 평가도 아니다. 그저 한 사람이 남긴 흔적을 따라 걸어본 시간이며, 그의 말과 침묵이 머물렀던 자리에서 다시 문장을 써보려는 시도다. 완전한 복원도 아니고, 영웅의 초상도 아니다. 그저 한 아름다운 인간의 생을 다시 바라보는 일, 그 마음 하나로 시작된 소설이다. 그는 떠났지만, 그가 남긴 문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 오래 머물렀다.

2025년 어느날 토사님


제1장 – 부엉이 바위

1. 새벽 4시, 산을 오르다

어둠은 아직 물러나지 않았다. 새벽의 공기는 바람이 없었다. 나뭇가지 하나 흔들리지 않았고, 짐승도 새도 숨을 죽인 듯했다. 봉하마을의 집들은 고요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검은 지붕 아래로 흙담장이 낮게 드리워졌고, 작은 창들은 빛을 품지 않았다.

그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려 애쓰며 신발끈을 조여 맸다. 운동화는 낡아 있었다. 밑창이 닳아 돌길에서는 발이 미끄러질 수 있다는 걸 알았지만, 굳이 새것으로 갈아 신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것은 산책이 아니라, 작별이었기 때문이다.

한 손은 옷깃 안쪽을 더듬었다. 하얀 종이 한 장이, 약간 구겨진 채 거기 있었다. 그 안에 썼던 문장들을 그는 다 외우고 있었다. 문장이라는 것은 사람의 몸처럼 늙고, 떠나고, 때론 살아남는 것이었다.

집 문을 닫을 때 손끝이 떨렸다. 그 것은 추위 때문도, 마음 때문도 아니었다. 그냥 오래된 습관처럼, 무언가를 조심이 다루는 동작이었다. 그는 마당을 지나, 장독대를 옆에 두고 뒤편 언덕으로 걸음을 옮겼다. 장독대 위에 고인 빗물이 살짝 얼어 있었다. 아주 오래전, 아내가 정성껏 담근 장이 그 속에 잠들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맛볼 일은 없을 것이다.

손전등은 들지 않았다. 그가 이 길을 걸은 건 수백 번도 넘었기에. 매번 농약을 뿌리러, 마을 어르신 장례를 치르러, 가끔은 혼자 걷고 싶어서.

하지만 오늘은 그 어느 날보다 조용했다. 흙 길을 밟을 때마다 땅속의 기척이 발바닥을 통해 올라왔다. 흙 속에 숨어 있던 밤벌레, 바람 없이 피어난 이슬, 돌 틈에 뿌리 내린 잡초들. 그것들이 그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당신, 또 오셨군요.’

그 말은 소리가 아니라, 공기 속에 스며 있는 감각이었다.

경사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그는 걸음을 멈췄다. 손을 뻗어 바위 하나에 닿았다. 이끼가 차가웠다. 몇 년 전, 기자 한 명이 따라오다가 이 바위에서 미끄러졌었다. 그때 자신은 농담을 했었다. “대통령이 부축하니까 기분 이상하지?”

그때 그 젊은이는 멋쩍게 웃었다.

지금 그는, 웃을 수 없었다.

나무들이 더 조밀하게 둘러싸이기 시작했다. 가지 끝에 매달린 물방울들이 희미한 빛을 받아 불그스름하게 반짝였다. 마치 누군가 오래도록 울다 말고 남긴 눈물 같았다.

그의 숨이 깊어 졌다. 들숨보다 날숨이 더 길었다. 가슴 아래쪽이 묵직하게 울렸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

그 사실이 이상했다. 그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이 때로는 무례하게 느껴졌다.

누군가를 향해 너무 많은 죄송함을 가진 채 살아 있는 것이, 이토록 버거운 일일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이제야 완전히 이해한 것 같았다.

눈앞에 나무 한그루가 나타났다. 여느 나무보다 더 작고, 더 기울어 있었으며, 줄기 한쪽이 마치 무릎 꿇듯 꺾여 있었다.

그는 그것을 지나치지 못하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생명이라는 것이 때론 얼마나 조용히 꺾이고, 다시 무심하게 자라는지를 그 나무는 말없이 알려주고 있었다.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다.’

한때 했던 말이었다. 누군가 그 문장을 적어 손팻말로 만들어 그의 연설 현장마다 들고 왔었다. 그들은 그를 강물이라 불렀고, 그는 그 이름을 감당하려 애썼다.

그러나 지금, 그는 강물이 아니었다. 그저 물가에 오래 앉아 있던, 조용히 마르고 있는 돌멩이에 가까웠다.

그는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 봉하마을. 자신이 태어난 땅이자, 자신이 돌아온 자리. 그 아래엔 고요한 지붕들이 있었다.

그 지붕들 위로 새벽이 느릿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빛은 없었지만, 어둠의 끝자락이 아주 천천히 풀어지고 있었다.마치 누군가가 커튼을 걷는 대신, 천을 조금씩 찢어내고 있는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그러나, 어떤 한 부분은 기묘하게 가벼웠다. 어깨나 다리가 아니라, 오래도록 말하지 못했던 문장이 떨어져 나간 자리가.

바위는 그 앞에 있었다. 말이 없었다. 숨도 쉬지 않았다.그러나 분명히, 거기에서 그를 기다리는 기척이 있었다.

그는 마지막 몇 걸음을 옮겼다. 숨소리가 들렸고, 그것이 자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위 앞에 선 그는 마치 누군가가 이 길을 다시 내려갈 수 있을 것인지, 조용히 물어오는 것 같다고 느꼈다. 대답은 없었다.

그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2. 바위 앞에서

그는 바위 앞에 멈췄다. 말없이, 어떤 감탄도 없이, 그저 멈추었다.

부엉이 바위는 변하지 않았다. 수 십 년을 그 자리에 있었고, 앞으로 수백 년을 더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 바위를 평범한 바위라 말했지만, 그에겐 그 바위가 언제나 무언가를 품고 있었다. 무언가를 안고 있는 것처럼 움푹 파인 형상, 마치 오래전부터 누군가를 기다리는 자세처럼.

그는 조심이 손을 뻗었다. 손바닥이 차가운 표면을 더듬었다. 돌은 말을 하지 않았다. 숨결도 없고, 심장도 없지만, 어떤 생명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침묵을 지켜온 존재였다. 그리고 그 침묵이야 말로, 지금 그에게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하고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 천천히 앉았다. 무릎이 바위에 부딪혔고, 몸이 휘청였지만, 소리 내지 않았다. 허리를 낮추고 등을 기대자, 등골을 따라 서늘한 감각이 흘렀다. 바람 한 줄기가 나뭇잎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처음으로 새벽 공기가 옷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주변은 완벽할 정도로 조용했다. 나무도, 흙도, 저 멀리 개울물도 모든 울림을 거둔 듯했다. 오직 한 가지, 자신의 숨소리만이 들렸다. 마치 물속 깊이 잠긴 듯한 고요였다. 시간조차 숨을 멈춘 것 같았다.

그 순간 그는, 세상이라는 말의 무게를 생각했다. '세상'이라는 단어 안에는 너무 많은 얼굴과, 너무 많은 이름과, 너무 많은 비난과 사랑이 들어 있었다. 그 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졌고, 다시 스스로 꺼졌다.

바위 옆 풀잎 하나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움직임은 마치 작은 손짓 같았다.

‘괜찮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쪽은 텅 빈 어둠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도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리움. 슬픔. 이름 붙이기 어려운 무거운 감정 하나.

그것은 어떤 얼굴도 가지지 않은 채, 천천히 그의 가슴팍을 눌렀다.

아주 오래전, 아무도 없는 강가에 서 있었던 적이 있었다. 서늘한 물소리, 풀숲의 벌레 소리, 붉게 물든 노을.

그는 그때도 침묵 속에 있었다. 지금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다만 살아 있는 존재로서 그 순간을 견뎌내야만 했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온 것 같았다. 세상의 한가운데에서 물러나, 아무 목소리도 닿지 않는 바위 앞에서.

‘여기서 멈춰도 되는가.’

그는 눈을 떴다. 하늘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아주 느린, 그러나 확실한 새벽의 신호였다.

그 빛은, 마치 묻지 않았다. 다만, 아무 말 없이 모든 것을 품어주는 것 같았다.


3. 첫 회상: 가족

그의 눈앞에서 나뭇가지 하나가 흔들렸다. 그 흔들림은 마치 기억이 일렁이는 것처럼 천천히, 조용히 움직였다.

그는 눈을 감았다. 바위에 등을 기댄 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생각 속으로 가라앉았다.

봄날이었다. 봉하마을 마당 가득 연둣빛이 번지고, 들기름 냄새와 흙 냄새가 섞여 있었다. 정원 한쪽, 감나무 아래엔 작은 의자가 놓여 있었고, 손자는 그 위에 두 다리를 덜렁이며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 이게 뭐야?”

아이의 손에는 단풍잎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봄인데 단풍잎이 있네?”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건 가을에 떨어진 거야. 그런데 겨울을 이겨내고 남아 있었구나. 아주 끈질긴 잎이야.”

아이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밝게 웃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 조심스레 그 잎을 넣었다. 마치 보물처럼.

그의 가슴 한 켠이 그 순간 이상하게 아려왔다.

‘저 아이는, 내가 없는 세상에서 얼마나 오래 살아갈까.’

그는 그 문장을 목울대까지 삼킨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부엌에서 아내가 된장국을 끓이며 말했다.

“당신, 요즘 자주 멍하니 앉아 있어요.”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내는 국을 젛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모를 줄 알아요? 당신 얼굴을 몇 년 봤다고 생각해요.”

“그냥 피곤해서 그래.”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아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국을 불에서 내리고, 조심스럽게 국자 하나를 작은 그릇에 담았다. 그리고 식탁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미안해요.”

그 말은 느닷없이 튀어나왔다.

아내가 멈칫했다.

“왜요?”

“그냥… 미안해서.”

“정확히 뭘요?”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너무 많은 일들이 떠올랐고, 너무 많은 말이 입 속에 엉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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