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문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16장. 깨어있는 시민들

by 토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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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 깨어 있는 시민들

1. 다시 열린 책장

대학 도서관, 오후 두 시. 창밖의 빛은 오래된 커튼 사이로 책상 위에 누웠다.

열람실 구석, 책꽂이 앞에 멈춰 선 한 학생이 책등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사람 사는 세상.’

노란색 책등. 표지엔 이름 하나, 노무현.

그 학생은 조용히 책을 꺼냈다. 먼지가 조금 날렸지만 그는 재채기를 하지 않았다.

대신, 책장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첫 문장. 그는 소리 내지 않고 읽었다.

“민주주의는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짧은 문장. 그러나 그는 한참 동안 그 문장을 다시 읽었다.

그 말은 과거의 언어 같지 않았다. 지금도 유효한 하나의 질문처럼 느껴졌다.

그는 펜을 꺼내 책 옆 여백에 작게 적었다.

“지금 우리가 묻고 있는 말.”

책을 넘길수록 손끝에 온기가 느껴졌다.

연설문 일부. 누군가에게 쓴 편지. 법정에서의 발언.

그 말들엔 꾸미려 하지 않은 리듬이 있었고, 설득보단 설명하려는 태도가 있었다.

학생은 그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계속 읽었다.

그 말들은 화려하진 않았지만, 자꾸 곱씹히는 맛이 있었다.

책 중간. 짧은 메모가 끼워져 있었다.

누군가의 필체.

“다시 읽습니다. 그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메모를 다시 끼워두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잠시 바라봤다.

“말이 어디까지 이어지는 걸까…”

그는 속으로 말했다.

책을 덮으며 그는 속으로 이름을 불렀다.

노무현.

그건 대통령의 이름도, 뉴스 속 이름도 아니었다.

지금 그의 앞에서 자기에게 말 걸고 있는 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그날 저녁, 도서관을 나서며그 는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오늘, 말이 남긴 사람을 보았다. 그리고 그 사람 안에서내가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를 생각했다.”

그 말은 조용히 적혔지만, 어딘가에서 또 다른 말을 부르고 있었다.

2. 조용한 토론

수요일 저녁 일곱 시. 작은 회의실 안 열다섯 개 남짓한 의자가 동그랗게 배치돼 있었다.

하얀 벽엔 ‘주제: 기본소득은 가능한가?’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참석자들은 30대 청년부터 70대 은퇴자까지 나이도, 옷차림도 다양했다.

누구도 사회자가 아니었고, 누구도이야기의 주인이 아니었다.

첫 발언자는 공무원 퇴직자였다.

“나라가 모든 사람에게 조건 없이 돈을 준다? 듣기엔 그럴듯하지만…현실은 쉽지 않을 겁니다.”

그 옆에 앉은 청년이 조용히 말했다.

“그렇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국가가 어떻게 지켜줄 수 있을까, 그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습니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고, 그 누구도 끼어들지 않았다.

중간쯤, 청소노동자인 60대 여성이 손을 들었다.

“저는 그런 용어들, 솔직히 어려워요. 근데 만약 그 돈으로 치약 하나 안 아끼고 살 수 있다면…그게 사람답게 사는 거 아닌가 싶어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이론보다 정확했다.

논쟁은 오갔다. 질문도 많았고, 불완전한 답도 많았다.

그러나 목소리는 격해지지 않았고, 고개는 자주 끄덕여졌다.

서로의 말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한 사람씩,다시 말을 이었다.

마지막 정리에 앞서, 40대 남성이 말했다.

“오늘 여기 앉은 우리 열다섯 명이 모두 같은 생각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신 우리가 서로의 생각을 어떻게 듣고, 어떻게 말하는지를함께 배워간다면—그게 곧, 그분이 말하던 ‘사람 사는 세상’이겠지요.”

그 말에 누군가 작게 박수를 쳤고, 그 박수는 길지 않았지만 조용한 동의의 언어가 되었다.

모임이 끝난 후, 사람들은 빈 의자를 정리하며 작게 인사를 나눴다.

“다음 주에도 오실 거죠?”“그럼요. 이게 내 요즘 가장 깊은 대화 시간이에요.”

한 여성은 메모장을 접으며 중얼거렸다.

“말을 믿어본 지, 참 오랜만이네요.”

회의실 불이 꺼지고, 밖엔 봄밤의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그들이 나간 뒤의 공간엔 여운처럼이 문장이 남았다.

“민주주의는, 말을 나눌 수 있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3. 마을 회관에서

경남 어느 군 단위 마을. 작은 회관 안. 플라스틱 의자 열 개,낡은 화이트보드, 그리고 보온병에 담긴 둥굴레차 냄새.

그날 저녁, 헌법책 읽기 모임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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