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만 쉬었을 뿐인데, 성적이 불타올랐다”
수진과의 새 대화
옥상 계단은 여전히 뜨거웠고, 세상은 아직도 수업 중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몰래 빠져나온 시간의 틈새였다.
지훈은 그 틈 안에 앉아 있었다. 바람은 교무실과 급식실 사이를 통과한 뒤 그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수진은 조용히 올라왔다. 운동화 끄는 소리가 지훈의 심장 박동과 비슷한 박자였다.
“9등? 이제 내 위잖아.”
수진의 목소리는 칼날 없이 정확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무기였다.
지훈은 시선을 들지 않고 말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수진은 계단에 앉았다. 한 칸 위. 지훈보다 약간 높은 곳.하지만 그 높이는 묘하게 편안했다.
“맞아.” “나는 네가 어떻게 공부했는지 다 보니까.”
그 말은 칭찬도, 위로도 아니었다. 그냥, 기억이 담긴 문장이었다.
지훈은 작게 웃었다. 입꼬리 하나만 움직이는 연습된 웃음.
“나도…내가 이제 보이는 것 같아요.”
그 말에 수진이 고개를 돌렸다. 눈은 정면을 보되, 마음은 옆을 봤다.
그 사이엔, 점수도, 비교도, 과목도 없었다. 그냥, 서로가 자기답게 공부하고, 자기답게 살아낸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걸 상대방이 알아봐 줬다는 것.
지훈은 그걸, 이 세상에서 제일 정직한 상장처럼 느꼈다.
책방으로의 마지막 방문
문은 여느 때처럼 삐걱 소리를 냈고, 먼지는 여전히 종이 냄새처럼 났다. 그런데—도사님이 없었다.
지훈은 말없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습관처럼 인사했지만, “도사님”이라는 말이 기억 속 마룻바닥에 조용히 내려앉았다.대답은 없었다.
대신, 책상 위에 조용히 놓인 한 장의 종이.
흰 종이. 검은 글씨. 글씨는 익숙했고, 문장은 낯설었다.
“지식은 네 것이 되었고, 나는 이제 사라질 것이다. 다시 필요하면, 네 안에서 날 찾거라.”
지훈은 그 글씨를 읽는 데 딱 4초 걸렸고, 그걸 이해하는 데 아마 몇 년이 걸릴지도 몰랐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가, 작게 웃었다.
“사라진 게 아니라…이 책방이 나잖아요.”
손끝으로 책장의 옆면을 문질렀다. 거기엔 지식이 없었다. 대신, 그가 공부하던 자세, 감정, 숨결이 붙어 있었다.
책은 그대로였지만, 책을 읽는 사람은 달라져 있었다. 공부는 책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남긴 ‘방식’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한 잔 따라보았다. 도사님이 늘 그랬듯이.
그리고 찻잔을 들며, 마음속으로 말했다.
“고맙습니다.이제, 저 혼자도…조금은 읽을 수 있어요.”
나만의 노트, 첫 장
지훈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책은 없었다. 문제집도 없었다. 심지어 펜도 아직 뚜껑을 안 땄다.대신, 탁자 위에는 하얀 노트 한 권.
정말 완벽하게 하얀, 그 어떤 선행학습도 닿지 않은 공간.
지훈은 잠시 노트를 바라보다 펜을 들고, 가장 왼쪽 위에 조심스럽게 한 줄을 썼다.
“점수는 지나간 기억이다. 나는 기억이 아닌, 언어를 만들 것이다.”
글씨는 좀 삐뚤었고, 조금은 사춘기 같았고, 조금은 어른 같았다.
그는 페이지를 넘겼다. 두 번째 장에는 자기가 만든 수학공식 리듬을 그려넣었다. 아래에는 손으로 그린 원이 하나.‘π는 내 친구’라고 적었다.
세 번째 장은 과학.양성자는 노란색, 중성자는 회색, 전자는 파란색. “이 친구들, 매일 아침 내 셀카를 지탱해주는 조합임.”이라는 주석까지 달았다.
사회는 질투로 외운 기억.‘자유시장경제 = 동준 스킨’ ‘복지국가 = 수진의 미소’
그리고 국어.노트 한가운데에 굵은 글씨로 이렇게 썼다.
“시란, 고백을 숨기기에 딱 좋은 구조다.”
노트의 모양은 낙서장 같았고, 그래서 더욱 진짜 같았다.
지훈은 그 노트를 덮으며 말없이 창밖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은 오후였지만, 그에겐 세상이 살짝 줄을 바꾼 문단처럼 느껴졌다.
“이젠…남이 만든 공부가 아니라 내가 쓰는 공부를 하자.”
그는 그렇게, 한 장 한 장 자신을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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