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심리·대응·회복, 우리에게 필요한 한 권.15장
전세사기는 방 하나를 훔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시간과 신뢰, 일상의 평온을 한꺼번에 삼키는 ‘사회적 기만의 설계’다.
사기꾼이 만든 덫은 대개 복잡한 문서나 기술이 아니라, 매우 단순한 심리의 문이다.
이 소단원은 그 문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우리가 왜 거기로 들어가는지를 밝힌다 — 그래야 나무를 베기보다 뿌리를 뽑을 수 있다.
전세사기는 형태만 다를 뿐 본질은 같다: 정보를 소유한 자와 모르는 자 사이의 비대칭을 이용해 ‘급한 결단’을 끌어내는 것.
첫째, 깡통전세다. 집값이 전세금보다 낮은, 즉 ‘빈 깡통’ 상태. 외관상으론 아무 문제 없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근저당이나 담보대출이 전세금을 훨씬 초과하고 있어,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줄 능력이 없다. 보증금의 안전은 집값의 안정 위에 서야 하는데, 그 지반이 약하면 전세는 모래성이다.
둘째, 이중계약. 여기서는 문서가 두 벌로 존재한다. 한 장은 세입자에게, 다른 한 장은 다른 ‘숨은’ 세입자나 금융 쪽으로 흘러간다. 임대인과 중개인이 결탁해 동일 물건에 대해 여러 권리를 파헤친다. 표면의 계약서는 진짜처럼 보이지만, 실제 권리는 다른 곳에 묶여 있다.
셋째, 명의도용형. 가짜 등기부, 위조 인감, 대리인 행세. 눈으로 보이는 서류가 있어도 그 종이가 진짜 사람의 권한을 담보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름이 맞아도 ‘누가’ 가지고 있는지가 관건이다.
넷째, 신탁사기형. 부동산이 신탁되었거나 다른 금융구조에 묶여 있는 상태인데, 표면상으론 임대권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신탁계약의 권리배분상 임차권이 성립하지 않는 경우, 세입자는 나중에 비어 있는 집과 법적 싸움을 맞는다.
이 네 가지는 서로 섞여 나오기도 한다. 한 물건에 깡통전세가 존재하고, 그 위에 이중계약이 얹히며, 명의는 가짜일 수 있다. 사기범은 가능한 한 많은 ‘불확실성’을 한데 모아, 피해자가 판단하기 전에 결단하게 만든다.
사기꾼은 기술자가 아니라 심리학자다. 그들이 끄집어내는 마음의 문은 다음 네 가지다.
첫째, 긴급성: “이 가격은 오늘만.” 시간 압박은 생각을 멈추게 한다. 급할수록 우리는 검증을 포기하고, 희소성의 유혹에 몸을 맡긴다.
둘째, 경쟁 유발: “다른 사람도 계약하려 한다.” 경쟁은 판단을 흐리게 하고, ‘놓치면 손해’라는 손실회피 심리를 증폭한다. 우리는 종종 남보다 늦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실수를 한다.
셋째, 전문가 신뢰 착시: “등기부 다 확인했다.” 전문가나 절차를 거쳤다는 말은 위험한 안전감을 준다. 그러나 ‘확인했다’는 말과 ‘직접 내가 확인했다’는 행위는 다르다. 이름만으로 안심하는 것이 착시다.
넷째, 인상 착시: “좋은 사람 같았다.” 사람은 얼굴과 말투에 속는다. 미소 한 번, 친절한 말투 하나가 합리적 의심을 감춘다. 사기는 종종 ‘사람’의 얼굴을 하고 온다.
이들 네 가지 문은 한국 사회에서 특히 쉽게 열리는 문이다. 우리는 빠르게 결정하고, ‘사람’을 믿는 문화에서 살며, 때론 체면 때문에 주변에 묻지 못한다. 사기범은 그 점을 안다.
한국의 전세제도와 주거문화는 사기에게 친화적인 환경을 제공한다. 대표적인 취약 구조를 짚어보자.
첫째, ‘보증금 전액 일시 반환’이라는 제도적 관행은 세입자에게 큰 금전적 부담과 불안감을 준다. 보증보험이나 분할 반환장치가 약하면 세입자는 한 번의 실수로 큰 타격을 받는다.
둘째, 중개인 중심의 신뢰문화. 매물을 소개하는 중개인의 말이 곧 정보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중개인 한 사람의 설명에 의존하는 순간 다른 확인 경로는 등한시된다.
셋째, 등기·금융정보의 비대칭성. 등기부나 근저당 여부를 직접 확인할 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온라인으로는 확인 가능하지만, 그 해석이 쉽지 않다. ‘데이터는 공개되어 있지만, 해석은 어렵다’는 것이 문제다.
넷째, “좋은 매물은 빨리 잡아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 친구·지인들의 경험이 곧 매매행동의 기준이 되며,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심리는 합리적 의심을 덮어버린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