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여행 중 겪은 사소한 에피소드가 현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아이 양말이 떨어져 급히 구매하려 했지만,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편의점을 뒤져도, 전통시장을 둘러봐도, 마트 진열대를 샅샅이 훑어봐도 소용없었다. 결국 어른용 덧버선을 사서 아이에게 신겨야 했다.
"요즘 아이 용품은 잘 안 나가거든요." 마트 직원의 담백한 설명이 묘하게 서늘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어느 동네든 아이 용품을 찾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그것이 당연한 현실이 되어버렸다.
이 작은 일상 속에 시대의 거대한 전환이 숨어 있었다. 최근 발표된 2024년 합계출산율 0.75명. 2023년 0.72명에서 소폭 반등했다고는 하지만, 이는 여전히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이 차가운 숫자가 단순한 통계표의 한 줄이 아니라, 우리 삶 구석구석에 스며든 생생한 현실임을 깨달았다. 지방 도시에서 아이 양말 하나 구하기 어려워진 풍경이야말로 우리 경제의 밑그림이 송두리째 바뀌고 있다는 가장 명료한 증거였다.
경제학자들은 흔히 '보이지 않는 손'을 이야기하지만, 지금 우리 앞에는 '보이지 않는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다. 인구 감소와 급속한 고령화는 단순히 사람 수가 줄어드는 문제가 아니라, 경제 시스템 전체를 재편하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인구구조 변화로 인해 우리나라 소비 증가율이 2013~2024년 중 연평균 0.8%포인트씩 둔화되었다. 이는 같은 기간 소비의 추세 증가율 하락폭(1.6%p)의 절반 수준에 해당한다. 2025년부터 2030년까지는 1.0%포인트로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숫자로만 보면 작아 보이지만, 이것이 누적되면 경제 전체의 성장 동력이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소비 패턴의 변화다. 지난 10여 년간(2010~2012년 대비 2022~2024년) 전체 소비성향이 76.5%에서 70.0%로 6.5%포인트나 하락했다. 이 중 고령층의 기여도는 -1.7%포인트로 다른 연령층에 비해 압도적으로 컸다. 60세 이상 고령층의 소비 수준은 50대에 비해 약 9% 감소한다.
더 중요한 것은 소비 구성의 변화다. 고령층은 식료품과 의료비 등 필수재 소비는 유지하지만, 내구재나 문화·외식 등 재량적 소비는 대폭 줄인다. 특히 고령층은 부채 부담이 클수록 소비가 줄어들고(DTI 1% 증가 시 소비 0.4% 감소), 다른 연령층과 달리 자가를 보유할 때 오히려 소비가 감소하는(3.0% 감소) 특이한 패턴을 보인다.
이런 변화가 경제 전체에 미치는 파급효과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우선 자동차, 가전, 패션, 여행 등 재량적 소비에 의존하던 산업들이 직격탄을 맞는다. 이들 산업의 매출 감소는 고용 축소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전체 소득 감소와 소비 위축이라는 악순환을 만든다.
하지만 모든 것이 암울하지만은 않다. 의료, 요양, 건강식품, 시니어 케어 등의 시장은 오히려 확대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실버 경제'의 성장 속도가 기존 산업의 위축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점이다. 또한 고령층 대상 서비스는 대부분 노동집약적이어서 생산성 향상 여지가 제한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식 성장 전략을 고집하는 것은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스마트 수축(Smart Shrinkage)'이다.
스마트 수축이란 단순히 규모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인구구조에 맞춰 경제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재설계하는 전략이다. 구체적으로는 세 가지 핵심 요소로 구성된다.
첫째, 고령 인력의 재활용이다. 교육 수준이 높고 건강한 베이비부머 세대가 은퇴 후에도 생산적인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이들이 단순히 소비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컨설팅, 교육, 케어 서비스 등 경험 기반 산업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도록 하는 것이다.
둘째, 생산성 혁신을 통한 효율성 극대화다. 인구가 줄어드는 만큼 한 사람당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자동화, AI, 로봇 기술을 활용해 적은 인력으로도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셋째, 선택과 집중을 통한 전략적 특화다. 모든 분야에서 경쟁하려 하지 말고, 우리가 비교우위를 가진 분야에 자원을 집중해야 한다. 반도체, 바이오, K-콘텐츠 등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분야를 더욱 강화하는 동시에, 내수 중심의 저부가가치 산업은 과감히 구조조정해야 한다.
인구 절벽은 이미 시작된 현실이다. 이를 부정하거나 회피할 수는 없다. 한국은행의 최신 분석에 따르면, 인구구조 변화로 인해 2013~2024년 중 소비 증가율이 연평균 0.8%포인트 둔화되었고, 2025~2030년에는 1.0%포인트로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선택의 여지가 있다.
정부 차원에서는 구조 개혁에 집중해야 한다. 특히 2차 베이비부머 세대(1964~1974년생)가 은퇴 후에도 자영업이 아닌 안정적인 상용 일자리에서 오래 일할 수 있는 여건 마련이 시급하다. 이들의 교육 수준과 건강 상태를 고려할 때, 이는 노동투입 감소를 완충하고 노후 불안으로 인한 소비성향 위축을 완화하는 핵심 전략이다. 또한 정부의 사회보장지출 확대에 따른 조세·준조세 부담 증가가 가계의 가처분 소득을 감소시키지 않도록 효율적인 재정 운용이 필요하다.
기업 차원에서는 변화하는 소비 패턴을 면밀히 분석하고, 새로운 수요에 부응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개발해야 한다. 60세 이상 고령층의 소비 수준이 50대에 비해 약 9% 감소한다는 데이터를 고려하면, 기업들은 고령 친화적 제품 개발과 자동화 투자를 통한 생산성 혁신에 나서야 한다.
개인 차원에서는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르고, 변화하는 경제 환경에 적응할 준비를 해야 한다. 평생학습을 통한 재교육, 건강 관리를 통한 근로 연장, 다양한 수입원 확보를 통한 위험 분산이 필요하다.
인구 절벽 시대에 변화의 물결에 올라탈 수 있다면, 우리는 더 효율적이고 지속가능한 경제 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스마트하게 적응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내리는 선택이 앞으로 20년 후 우리 경제의 모습을 결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