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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봄손님이 떠났다

by 이정미


봄바람이 살랑살랑 얼굴에 닿으면 겨우내 묵혀두었던 마음은 바람을 타고 요동을 친다.

그 바람에 봄꽃의 향기라도 얹어지면 나의 갈 곳 잃은 마음은 산란을 넘어 찬란해지기까지 한다.

세상사 적당히 두루뭉술 통달했을 것 같은 오십 대 중년여자의 찬란해진 마음이라니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듯도 하지만...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봄의 전령 벚꽃들은 한없는 아름다움으로 나의 정체 모를 허허로움을 채워준다.

그래서 저 하얗고 연연한 봄 꽃이 피어있는 이 시절만큼은 비가 오지 않길, 세찬 바람이 불어주지 않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봄날 아름다운 출근길의 단상.

며칠 전 사무실에 방문한 한 분에게 명함을 받았다.

00 건설 전기사업부 이사 이 춘 우

봄'춘', 비'우', 춘우(春雨)

아마도 '우'자가 비'우'자가 아닐 수도 있으리라

나는 명함에 적혀 있는 이름을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오래도록 명함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건 십 년 전 세상을 떠난 내 친정 오빠와 같은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엇 하고 당황했지만 오랜만에 보는 오빠의 이름은 반갑고 좋았다.

특이한 이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평범하게 흔한 이름도 아니어서 그동안 수없이 받아 본 명함에서 오빠 이름을 본 적은 처음이었다.

오빠도 이렇게 평범한 명함을 가지면서 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꽃들의 불청객 봄비 '춘우'

꽃이 피는 시절 봄비는 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다.

꽃들에겐 그들을 떨어트리게 하니 당연히 불청객이겠지.

그리고 나의 불청객 봄비 '춘우' 오빠.

어린 시절부터 놀기 바빠 공부는 뒷전이었던 사고뭉치 오빠.

대학도 가지 않고, 객지에서 이 공장 저공장을 옮겨 다니며 떠돌다 결국에는 자리잡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와서도 이것저것 새로운 일을 했지만 하는 일마다 잘 되지 않았다.

어느 날은 잡화물품 판매, 어느 날은 창호 제작, 어느 날은 묘목을 심고 거래하는 일을 하였다.

큰돈을 벌어보겠다는 허황된 삶 속에서 풍겨져 나오는 과장된 몸짓, 허세 가득한 목소리, 부족한 논리로 밀어붙이던 억지 주장들이 오빠의 모습이었다. 오빠 주변에는 그나마 남아있는 돈까지 뽑아먹으려 오빠에게 빌붙어 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왜 오빠의 눈에만 그게 보이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돈이 늘 부족했던 오빠는 동생인 나에게는 돈을 빌려달라고 하지 않았지만, 나는 지레짐작으로 오빠 전화를 일부러 피한 적도 많았다.

나는 지독하게 이기적인 동생이었고, 어느새 오빠는 손끝에 박힌 가시처럼 불편한 존재가 되어있었다.

나는 늘 오빠가 두려웠다. 무엇이 두려웠을까.

내가 오빠 때문에 불편해지는 게, 부끄러워지는 게 두려웠던 거 같다.

똑같은 부모님 아래에서 컸는데도 이렇게 다른 방식의 삶을 산다면 사람의 운명은 정말 이미 정해져서 태어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건강하던 오빠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졌다.

오빠는 혼자서 낮시간 밭둔덕에서 일을 하면서 쓰러진 것 같다고 했다.

얼마인지 모를 시간이 흐르고 갑자기 깨어나 비틀거리며 집에 갔고 깨질듯한 두통으로 혼자서 다시 의료원에 갔다고 했다. 오빠는 그렇게 응급환자가 되어 진안 의료원에서 전주대학병원으로 이송되어 수술을 받게 되었다.

그 수술이 끝나고 나서야 나는 중환자실에서 오빠를 만날 수 있었다.

중환자실 면회시간에 만난 오빠는 머리를 붕대로 칭칭 감은 모습이었다.

뇌출혈이 발생할 때 느끼는 두통은 도끼로 머리를 내리치는 것과 같은 고통으로 우리가 평상시에 느끼는 두통과는 비교할 수 없는 통증이라고 한다. 혼자서 쓰러져 병원에 가고 수술을 한 그 시간이 얼마나 지독하게 외롭고 길었을까?

면회시간에 때마침 저녁밥이 나와서 숟가락에 밥과 반찬을 올려 떠 먹여주니 오빠가 웃으며 받아먹는다.

동생에게 아기 같은 대접을 받으니 재미있는 모양이다. 오빠의 웃음에 나도 따라 웃었지만

머리에 감긴 붕대와 환자복과 오빠의 웃는 얼굴이 온통 섞여 가슴이 뒤죽박죽 쓰라리다.

베인 손끝에 소금이 스미듯, 마음이 아렸다.

인간은 외로운 거라고 외로움은 누구나 짊어지고 가야 할 숙명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알고 싶지는 않았다.


완치가 될 것만 같았던 오빠는 재출혈로 수술한 지 한 달 만에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오빠에게 밥 한 숟가락을 먹일 수 있었던 것.. 그것만은 정말 다행이었다.

오빠의 남겨진 흔적으로 우린 오빠의 삶을 고스란히 알 수 있었다.

은행에 남겨진 빚, 수술 직전에 해지한 모든 보험, 건축신고가 되어 있지 않은 가건물에 잔뜩 쌓여있는 창호자재, 자동차보험이 없어 교통사고를 내고 피해자 병원비를 마련하느라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가장 좋은 땅을 팔아버린 일.

도대체 오빠는 어떤 삶을 살고 있었던 걸까?

어쩌면 그 모든 이유들이 한꺼번에 몰아쳐 오빠를 그렇게 갑작스럽게 데려가버린 건 아닐까?

엄마가 돌아가셨던 병원에서 오빠는 세상을 떠났고, 오빠의 기일은 엄마의 생신일이었다.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서 엄마 품으로 떠나버린 철없는 나의 오빠..

오빠와 달리 공부 잘했던 나를 자랑스러워하고 아껴주었던,

내가 좋아하던 모래요정 바람돌이 인형을 무심히 사주었던,

나의 오빠는 그렇게 허망하게 작별인사 없이 떠났다.

장례식장에는 나와 언니들의 울음소리만 들렸고, 오빠의 흔적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봄은 여지없이 화창했지만, 그 해 5월 봄비는 이 세상 꽃잎을 떨구고 마치 오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슬픈 사연이 담길까 봐 비'우'자는 이름에 쓰지 않는다고 했던 것일까.

어느 물리학자가 물질의 원자에 대해서 설명하며 그랬다. 사람이 죽으면 흙속에서 완전히 소멸되는 게 아니라 더 이상 나눠질 수 없는 원자의 상태로 변하여 이 세상 어딘가에 떠다니고 있는 거라고 말이다.

오빠는 원자가 되어 이 세상 어디선가 떠다니고 있을 거라 믿어본다.


내일은 벚꽃의 찬란함이 절정이 될 모양이다.

그런데 오늘 예고 없이 봄비가 쏟아진다. 땅에 떨어진 젖은 꽃잎을 본다.

봄비가 그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봄을 품은 여름이 오겠지.

봄비를 머금고 돋아난 푸른 잎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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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꽃다발을 보내줬던 나의 춘우오빠#이젠 편안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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